90화. 성장하다 (5)
“어엇?!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
“세상에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시다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바쁘시오?”
“제 일이야 항상 그렇지요. 하지만 바쁜 게 대수겠습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대호법께서 오셨는데요!”
호요성이 호들갑을 떨며 무담을 맞이했다.
“여기 앉으시지요. 푹신푹신하니 좋은 의잡니다.”
“그럼 실례 좀 하겠소.”
“차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이번에 좋은 벽라춘이 들어왔는데 그걸로 드릴까요? 아니면 술?”
“…….”
“캬하하! 제가 잠시 대호법의 성격을 잊고 있었군요! 아무거나 대령하겠습니다!”
여전히 정신 사나운 사람이군.
속으로 촌평을 날린 무담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요성의 집무실은 온갖 문서들과 죽간, 고서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래도 신교의 총군사라면 나름대로 집무실을 꾸밀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무담은 총군사의 그런 면만큼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격식에 매몰되는 것보다 효율을 중시하는 성격은 진실로 나쁘지 않다.
그 격식이란 걸 너무 안 차려도 문제지만.
“향 좋지요? 제가 요새 수전증이 생겨서 말입니다. 잘 우려냈는지 모르겠네요.”
“감사하오.”
“크헑! 대호법께 감사하단 말도 듣고, 오늘 이 사람 운수가 아주 대통입니다, 대통!
오늘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녀야겠어요. 혹시 압니까? 떨어진 금원보 조각이라도 주울지!”
경박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가만 놔두면 날이 새도록 떠들어 댈 기세였다. 무담이 곧장 입을 열었다.
“일은 잘되시오?”
“하하! 항상 비슷하지요, 뭐.”
“그렇군.”
“예에.”
“…….”
“응? 왜 그러십니까?”
무담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호요성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뭔가 하실 말씀이 있는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긴 뭣해서 세상 사는 얘기로 포문을 열어 볼 작정이었는데,
이 요망한 총군사 놈이 보통 경박스러운 게 아니라서 쉽게 입을 떼기 힘든 상황이로군요?”
“…….”
“맞죠?”
사람 마음을 너무 잘 읽는 것도 문제다.
담담하게 차를 마신 무담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삼공자와 만나셨다고 들었소.”
“아? 그 소문이 대호법님 귀에까지 들어갔군요.”
“어땠소?”
“에잉?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랍니까? 어땠냐니요?”
“말 그대로의 의미요. 삼공자는 어떠했소?”
무담의 질문을 받으며, 호요성은 세상사란 돌고 도는 거란 격언을 떠올렸다.
‘내가 환희원주에게 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들을 줄이야.’
더 웃긴 것은 환희원주가 했던 대답과 비슷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다, 저렇다 할 게 있겠습니까? 한 번 보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파악하기란 힘든 법입니다.”
“옳은 말씀이오. 그래서 나는 지금 본교에서 가장 안목이 좋다는 총군사께 묻고 있는 것이오.”
거 할 말 없게 만드시네.
가만히 무담의 신색을 살피던 호요성이 되물었다.
“갑자기 삼공자에 대해서는 어찌 물어보시는 겁니까?”
무담의 눈이 깊어졌다.
“이틀 전, 삼공자가 교주님의 부름을 받고 마신궁에 들었소.”
“그런데요?”
“교주님께서 무려 반나절 동안이나 삼공자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셨소.”
“……!”
이것만큼은 진실로 예상치 못했다.
호요성의 눈빛도 덩달아 깊어졌다.
“반나절 동안이나요?”
“그렇소. 그리고 그건…….”
“지금껏 어떤 후계도 받아 보지 못한 특혜지요.”
“그렇소.”
잠시 침묵하던 호요성이 고개를 저었다.
“놀라운 일이긴 합니다만, 그게 별문제라도 되는지요?”
“후계 싸움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오. 모든 것은 교주님의 뜻대로 이뤄질 테니까.”
“그런데요?”
무담의 얼굴이 굳어졌다.
“후계가 누군지는 관여할 일이 아니라 하나, 내정(內政)의 균형이 깨지게 되는 건 좌시할 수 없기 때문이오.”
“…….”
“삼공자에게 천마병창을 열어 주셨다고 들었소.”
“그렇습니다.”
“간단하게 말하겠소. 총군사께서 너무 과하셨소.”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과해 보일 수도 있지요.”
“총군사는 그리 생각지 않는단 말이오?”
“예.”
“어찌하여?”
“이제 보니, 대호법께서는 내정의 균형을 걱정하기 이전에 이 사람을 꾸짖으러 오신 것이로군요.”
“내겐 총군사를 꾸짖을 만한 권한도, 연륜도, 지혜도 없소. 다만 호법원의 좌장으로서 교내 정치권의 정점에 있는 총군사에게 우려를 표하러 온 것뿐이오.”
“즉, 삼공자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은 그가 무리해서라도 천마병창을 열어 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냔 의문의 연장이로군요.”
“비슷하오.”
호요성이 딱 잘라 말했다.
“열어 줄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무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더더욱 문제외다.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어찌하여 천마병창을 개방…….”
“이미 선두에 선 사람에게 신병이기 따위는 필요치 않겠지요. 그래서 삼공자에겐 천마병창은 필요가 없었습니다.”
“……!”
무담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설마하니 총군사가 삼공자를 이리 높게 평가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스스로도 굳이 천마병창에 들 필요가 없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저울에 천마병창이란 거래 품목을 올려 두었지요.”
“이유를 들어 봐도 되겠소?”
“상대에게 불필요한 물품을 주는 대가로 그와 독대하여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까.”
“……!”
“저는 삼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속속들이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날의 대화로 어느 정도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요.”
“…….”
“교내 정치권의 정점에 오른 이가 저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럴 만한 그릇이 못 되는 사람입니다. 다만 저는 삼공자와 저울 놀이를 했던 것처럼, 교내 인사들을 파악하여 커다란 저울추를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교주님께서 저울을 잘 재시도록 말이지요.”
호요성이 고개를 숙였다.
“대호법께서 우려하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으니 너무 심려하진 마십시오.”
무담은 다소 놀란 눈으로 호요성을 바라보았다.
호요성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리고 진실했다.
평소 경박한 모습만을 보여 주던 그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신교를 걱정하는 선배를 보며 그 역시 총군사로서 진지한 태도로 대화에 임하는 것이다.
무담이 그저 트집 잡기 위해서 온 게 아님을, 진심으로 신교를 걱정해서 이 자리에 온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호요성을 바라보던 무담이 포권을 취했다.
“이 사람이 총군사를 잘못 보고 있었소. 사과드리겠소.”
깜짝 놀란 호요성이 일어나 손사래를 쳤다. 진심으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이러면 감당키가 힘든데.”
“아니오. 나는 총군사에게 선입견이 있었소. 제대로 대화 한번 나눠 보지 않은 주제에 그대를 가볍게만 보았소.”
무담이 재차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소.”
호요성이 못 말린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고지식하면서 착한 사람한테 약하다고, 이 선배야.
“귀한 시간 내서 오셨는데 차만 대접해서 죄송합니다. 일간 제가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소.”
무담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평생 그런 표정을 지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다소 어색한 얼굴이었다.
“한 번씩 이 사람이 들를 테니, 이렇게 차나 한잔 대접해 주시면 감사하겠소.”
“어엇?! 제 귀한 찻잎을 축내실 생각이십니까?”
“……그런 괴악한 농담만 안 해 주면 좋겠소.”
그 한마디를 남기고 무담이 집무실을 나갔다.
이내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호요성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것 참, 근래 들어서 신교 생활 참 흥미진진하구만.”
소연심과의 날 선 대화, 그리고 삼공자와의 달콤하고 살벌했던 독대.
이제는 사석에서 대화 몇 번 해 보지 못했던 무담과 신교의 미래에 대해 논하게 되었다.
‘하지만 뭐…….’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이것도 재미있는데?”
* * *
방에 틀어박혔던 서량은 사흘이 지나서야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간 먹지도, 씻지도, 싸지도 않은 그의 몰골은 그야말로 볼만했다. 잠도 한숨 안 잔 것인지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강력한 내공과 완벽에 가깝도록 다져진 육체를 생각하면, 그가 사흘 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으다다다!”
한껏 기지개를 켜는 서량을 보며 마동필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공자님!”
“으응? 어, 동필이구나.”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뭐 죽기 일보 직전이지. 대가리 굴리는 것 때문에 이렇게 피곤해 본 적도 오랜만이지 싶다.”
“식사라도 간단하게 하신 후 눈을 좀 붙이시지요.”
“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그나저나 미친 대주는?”
“위 대주 말씀이십니까?”
“그럼 미친 대주가 그년 말고 또 있겠냐? 걔는 갔냐?”
“아, 예. 공자님께서 두문불출하신 이후 한 번도 들른 적이 없습니다.”
“그래? 잘 됐…… 아니지. 걔 설마 삐진 건 아니겠지? 걔 삐져 가지고 나중에 또 난리 치면 어떻게 해?”
마동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만한 주변머리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놈도 어지간히 학을 뗀 모양이군.
“여하간 잘됐다. 귀찮게 하는 사람도 없고. 앵화한테 후딱 부탁해서 밥 먹고 자야…… 응?”
서량의 눈이 문득 빛났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마동필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요놈 봐라?”
“……예?”
“나, 방에 틀어박힌 지 며칠이나 지났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공자님.”
“사흘이라…….”
생각보다 많이 안 지났군.
“사흘밖에 안 지났는데 그 정도란 말이지?”
“예?”
서량은 힐끔 마동필의 요대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요대에 걸린 묵왕검을 바라보았다.
묵왕검은 처음 가져왔을 때와 똑같았다. 어떻게 주조되었는지 모를 저 검갑에 들어가 있을 때면 한 점의 마기도 흘리지 않았다.
“검 좀 뽑아 봐.”
“묵왕검 말이신지요?”
“그럼 여기에 검이 묵왕 빼고 또 있냐? 뽑아 봐, 빨랑.”
갑작스러운 요구에 얼떨떨했지만 마동필은 순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우우웅.
뽑히자마자 발산되는 강력한 마기.
하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묵왕검은 처음 봤을 때와 거의 똑같은 자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묵왕검을 보는 서량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 진지한 분위기에 마동필은 절로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괜히 신병이기가 아니란 말이지?”
“……?”
“아니지, 신병이 아니라 마병이지. 여하간 신통방통한 물건이군. 그도 아니라면…….”
서량이 마동필을 힐끔 쳐다보았다.
“너의 노력이 그만큼 치열했든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군.”
“……죄송합니다. 저는 공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따라와.”
아무런 설명 없이 연무장으로 걸어 올라가는 서량.
마동필은 저도 모르게 그의 뒤를 따랐다. 공자님의 몸이 걱정되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워낙 진지해서 쉽게 쉬시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이윽고 두 사람이 연무장 중앙을 두고 마주 섰다.
“…….”
잠시의 침묵.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서량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언제까지 알면서도 놔둘 순 없으니까.”
서량이 다시 마동필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마동필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진지함과 대견함을 오가는 서량의 저런 눈빛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넌 충분히 강하지만 날 지켜 주기엔 아직 모자라. 지켜 준다는 명목하에 먼저 죽는 꼴 보는 것도 고역이고.”
“……?”
“이왕지사 교주님 덕 본 거, 너도 내 덕이나 좀 봐라.”
“예?”
“반나절이다. 반나절 안에 네 수준을 끌어올리겠어.”
마동필은 깜짝 놀랐다.
반나절 안에 자신의 수준을 끌어올린다는 말 때문이 아니다.
놀랍기는 하지만 서량이 그렇다면 그럴 것이다. 삼공자라서가 아니라 그의 실력을 믿기 때문이다.
정작 그가 당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설마하니 지금 내 몸 상태를 걱정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 상태로도 너 정도는 다섯 합 안에 제압할 수 있어, 인마.”
“그건 그렇습니다만…… 저는 그저…….”
“뭐가 문제야?”
마동필이 살짝 헛기침했다.
“한계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고뇌하지 말고 전진하라 말씀하셨잖습니까.”
“어쩌라고?”
“예?”
“너는 계속 전진해. 나는 옆에서 거들어 줄 테니까.”
“그것은…….”
“너 설마, 남의 도움을 받아서 성장한 힘은 온전히 네 것이 아니란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서량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도 나지만 너 역시 올라갈 계단이 한참 남아 있어. 네 눈이 ‘성장’이라는 단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그런 오만한 소리는 하지 말아야지.”
“아…….”
“스승의 가르침, 전투의 경험, 친우의 조언. 그 모든 것이 성장의 원동력이다.
하다못해 밥 먹다가도, 똥을 싸다가도 깨달음을 얻는 것이 고수의 세계인데 뭘 그렇게 주저하는 거냐? 네가 그런 걱정을 하기엔 아직 백만 년은 일러.”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하면 염치 불고하고…….”
“그런 말 자체도 오만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임하도록.”
스르릉.
서량이 칠야도를 뽑아 들었다.
“말했듯이 난 그저 거들 뿐이야. 반나절 안에 네 안의 깃든 힘을 뽑아내지 못하면 결국 네 의지가 그것밖에 안 되는 거라 해석하겠다.”
마동필의 얼굴에 긴장의 기색이 스쳤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다.”
스르릉.
묵왕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취하던 마동필은 순간 의문이 들었다.
‘내 안에 깃든 힘? 그게 무슨 말씀이지?’
그 말은 마치, 본래 자신이 지금보다 훨씬 성장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억눌렀다는 말로 들렸다.
훅.
“미리 말한다는 걸 잊었군.”
마동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어느새 좌측으로 이동한 서량이 칠야도를 높이 쳐들고 있었다.
“집중 안 하면 너 죽을 수도 있다.”
서량이 칼을 내리쳤다.
쩌어어어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