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성장하다 (6)
“그렇게 되었군요.”
“그렇다네.”
기양이 한숨을 내쉬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설마하니 마동필이 무기한 정직을 먹고 삼공자의 개인 호위로 발탁될 줄이야.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
“음? 그게 무슨 말인가?”
“예?”
“상부의 명령? 상부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기양은 당황했다.
“하면 삼 조장을 삼공자님께 보내신 것이 상부에서 떨어진 명령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이군성이 피식 웃었다.
“설마하니 교주님께서 직접 명을 내리셨을까.”
“그, 그렇다면…… 설마 원주님께서?”
“자네도 알겠지만 호법원은 타 조직으로의 인사 이동권이 없다네. 그건 원주님도 마찬가지야.”
“……!”
기양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그렇다면 선배의 독단으로 삼 조장을 보낸 것입니까?”
이군성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피로에 찌든 그의 눈이 무엇을 좇고 있는지 기양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삼 조장은 변했다네.”
“선배.”
“정확히는 삼공자님과 함께 고죽림에 다녀온 이후로 변해 버렸지.”
이군성이 미소를 지었다.
대견함이 묻어나는 웃음 너머, 일말의 씁쓸함이 보이는 것은 기양의 착각일까?
“자네, 기억하고 있나? 마검가주 건으로 제법 바빴을 때 말일세. 정확히는 삼공자님이 출림(出林)하기 얼마 전이었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굴송차의 찻잎을 얻으러 삼 조장이 왔었지.”
“그랬지요.”
“하면 그때의 삼 조장이 보여 주던 모습도 기억하고 있을 걸세.”
기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칠어진 손, 얼굴에 자리한 커다란 상처와 함께 되돌아온 마동필의 변화는 충격적이었다.
외양의 변화도 변화지만 특히나 뿜어내는 살기가 실로 압도적이었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지만 원주님께서는 언젠가 은퇴를 하실 걸세. 내 능력과는 별개로, 그분은 십중팔구 날 차기 원주로 내세우시겠지.”
“당연합니다.”
“내 감히 원주님과 비교할 수는 없네. 차기 원주로서의 자격을 생각한다면 나 역시 끝없는 연마가 필요해.
하지만 원주님을 제외하면 호법원에서 가장 강한 마인이 나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이군성이 담담한 얼굴로 기양을 돌아보았다.
“그런 내가 삼 조장의 살기를 대하자마자 얼어붙었네. 작정하고 뿜어낸 것도 아니고, 은연중 흘려 낸 살기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설 지경이었어.”
“……!”
“자네도 그랬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고죽림에서의 임무가 끝나고 돌아온 삼 조장은 어떠했나?”
“자신의 살기를 완벽하게 수습하고 있었지요. 참으로 많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많이 노력했겠지. 지나치게 노력해서 오히려 해가 될 정도로.”
“예?”
“우리는 호위 대상의 안전을 위해 목숨도 내놓아야 하네. 내가 죽어도 호위 대상은 살아야 해. 그러기 위해선 곧 외부의 침입에 완벽하게 대응해야 하지.”
“……!”
“그곳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삼 조장의 살기는 폭발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네.
그런 살기는 필연적으로 적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게 마련이지.”
“그, 그 말씀은?”
“그래. 호위 대상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살기는 호위무사로서 치명적인 결함이네.”
“즉, 삼 조장은 호법으로서의 정체성을 위해 본인의 살기를 다스렸다는 뜻입니까?”
이군성이 차를 홀짝였다. 굴송차의 묵직한 향에 지끈거리던 머리가 조금이나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저 추측일 뿐일세. 하지만 그 살기를 완벽하게 수습한 이후, 고죽림에 들어가기 이전과 큰 차이 없는 실력을 보여 준 것도 사실이지.
잠재력만큼은 폭발적이었지만.”
“하지만 저는 삼 조장의 검기를 보았습니다.”
“호마검식으로 바위를 뚫어 버린 그 검기 말인가?”
“그렇습니다.”
“하면 내 묻겠네. 그만한 검기를 다루는 고수가 이번 수송대 건에서 스무 명이 넘는 조원들을 희생시킬 정도로 당했다는 게 말이 된다고 보나?”
순간 기양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다. 기습해 온 적들의 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그들이 보았던 마동필의 수준에 그만한 피해를 본 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살기를 제어하며 끊임없이 억누르고 있었던 게야. 본인의 실력을, 그리고 잠재력을.”
“…….”
“고죽림에서 큰 기연이 있었는지, 내력으로 녹이지 못한 힘이 전신에 가득 퍼져 있더군.
하나 출림 후의 기간을 따져 보면 잠재력의 오분지 일 정도는 내력으로 수습했어야 했어. 하지만 삼 조장은 그러지 못했지.”
“정확히는, 그러지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로군요.”
“난 그렇게 생각하네.”
이군성이 입맛을 다셨다.
“제 임무를 위해 강해질 수 있는 길을 무의식적으로 외면해 버렸어.
호법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성장마저 억누르다니, 이것을 책임감이 넘친다고 표현해야 할지 고지식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의 말을 들으며 기양은 다시 그때를 떠올렸다.
수개월 만에 본 마동필 앞에서 이군성과 자신은 너무 놀란 나머지 말도 제대로 못 했다. 그리고 그 어색한 분위기에서, 마동필은 이렇게 말했다.
- 제가 때를 잘못 골라 온 것 같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기양의 얼굴에 자책이 어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동필에게 호법원은 집이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가족들이 자신을 보며 잔뜩 긴장하고 있다. 그것은 실로 서글픈 일이었다.
집 떠난 가족이 돌아왔는데 웃으며 맞이해 주진 못할망정 놀라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니.
그것이 마동필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그 경직된 분위기를 읽으며 마동필은 스스로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어쩌면 성장을 외면하게 된 마동필의 심경 변화가 자신들 때문은 아니었을지.
“그래서 삼공자께 보냈네.”
“…….”
“적어도 삼공자께선 삼 조장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야.
또한, 호법들을 제외하고 삼 조장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삼공자님이라고 생각했네.”
“그러셨군요.”
이군성이 미소를 지었다.
“다시 돌아올 걸세. 언젠가 반드시. 다시 돌아올 때의 삼 조장은 우리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그러나 한층 크게 성장한 무인이 되어 있을 걸세.”
기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비로소 왜 마동필을 삼공자님께 보냈는지 이해한 것이다.
“동필이는 잘 해낼 겁니다.”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네.”
답답함과 안도감이 섞인 한숨을 내쉬는 두 사람.
문득 떠올랐다는 듯 기양이 물었다.
“하지만 인사 이동권이 없는데, 들키면 어쩌시려고 그러셨습니까?”
“난 원주 대리일세. 외부로의 인사 이동권은 없어도 내부의 인사 이동권은 물론 징계 행사권 정도는 갖고 있네.
그래서 삼 조장의 정직을 무기한으로 처리할 수 있었지.”
“그러나 삼공자님께는…….”
“그쪽에선 별말 없던데?”
“……아?”
“지레짐작을 하셨든 뭐든, 받아들이셨으면 그만이지. 아니 그런가?”
기양이 기가 막힌다는 듯 이군성을 바라보았다.
이군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질 좋은 찻잎도 드렸는데 이 정도는 봐주시겠지. 어쩌면 더 좋아하실는지도 모르겠어.”
“…….”
“혼자 지내는 것보단 둘이 낫잖나?”
이군성은 서량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었다.
* * *
“슬슬 해가 질 시간이군.”
하늘을 올려다보던 서량이 힐끔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연무장 중앙에 마동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몸 여기저기에 수많은 도상(刀傷)이 새겨져 있고 안색도 제법 창백했지만, 표정은 고요하기만 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새끼, 그래도 한다면 하는 놈이군.”
마동필이 본능적으로 억누른 살기.
그 살기는 지금껏 호법 임무를 하며 쌓아 놓은, 그리고 이후 고죽림에서의 전투로 활짝 개화시킨 살기였다.
고죽림의 귀물들은 절정고수도 아차 하면 죽을 만큼 위험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놈들은 사람과 대등한 이성을 지닌 존재들은 아니다. 말이 귀물이지 놈들은 짐승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서량과 마동필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야생에서 팔 개월 동안 혈투를 벌이며 살아남았다는 뜻.
짐승들이 기척을 죽이고 은신하는 경우는 사냥할 때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은 귀물을 사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해지기 위해서 싸워야 했다.
당연히 기세가 날카롭게 벼려질 수밖에 없었고, 과격한 살기로 놈들을 긴장케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서량보다 전투 기술이 부족한 마동필은 그렇게 해서라도 귀물들을 몰아내야만 했다.
그 살기는 영죽의 힘을 받아 날이 갈수록 증폭되었다. 당시 마동필의 지상 과제는 서량과 달리 ‘성장’이 아닌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증폭된 살기를 모조리 성장의 원동력으로 쓸 때가 왔다. 이왕이면 본인이 스스로 깨달았으면 좋았겠지만 이런 방식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성장하느냐가 아니라, 성장한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니까.
“으라차차, 저놈 자식 깰 동안 나도 좀 쉬어 볼…… 응?”
대문 너머에서부터 강렬한 진기의 박동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쉴 팔자가 안 된다느니, 도대체 날 찾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냐느니 별소리를 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투덜거리지 못했다.
그 기파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거 또 재미있는 분이 행차하셨군.”
잠시 후, 누군가가 마차에서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덜컥!
서량 역시 미리 문을 열어 놓았다.
열린 문 너머, 무뚝뚝하기가 마동필의 곱절은 됨직한 고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쩐 일로?”
“들어가도 되겠소?”
고구를 위아래로 쓸어 본 서량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차는 못 줘.”
그렇게 고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연무장을 힐끔거렸다.
“호법원의 마동필 삼 조장이로군.”
“전(前) 삼 조장이라고 봐야겠지. 지금은 정직 처분을 받은 몸이라.”
“정직 처분을 받아 할 일이 없는 사람과 같이 지내다니, 친분이 그리 깊은 줄은 몰랐소.”
“할 일 버젓이 하는 중이야. 개인 호위로 발탁되었거든.”
“개인 호위라?”
고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공자 같은 실력자의 개인 호위를 하기에는 다소 모자람이…… 음?”
우우우웅.
기다렸다는 듯 마동필의 몸에서 강한 마기의 박동이 시작되었다.
잠재된 살기와 영죽의 기운을 모조리 마기로 녹여 내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의 출발점을 찾아내기가 어려울 뿐, 찾기만 한다면 금세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그래, 모자랄 것 같아서 강제로 끌어올려 놨다.”
“…….”
“그래서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신 이유가 뭔데?”
“삼공자.”
“왜.”
“새삼스레 느끼는 거지만…… 참으로 대단하시오.”
목소리에 고저가 없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그 말에 진심 어린 감탄이 담겨 있는 것은 분명했다.
서량이 ‘이놈 갑자기 왜 이래?’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대단한 게 아니라 저놈이 대단한 거야. 애초에 저만한 잠재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 저놈이니까.”
“그걸 끄집어내는 방법을 아는 것도 대단하오.”
“기공에 대해 깊게 고심해 보면 누구라도 응용할 만한 방법이야.”
“그래서 대단하다는 것이오. 어지간한 마인들은 그렇게까지 기공의 운용에 대해 고뇌하지 않으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대단한 만큼 위험하다는 말을 하고 싶나?”
“너무 당연한 말이라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인 것 같소.”
서량이 피식 웃었다.
“이 정도 대화면 얼추 인사치레는 했지? 우리 사이가 농담 따 먹기나 할 사이는 아니잖아? 본론을 말해.”
고구가 서량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서량의 얼굴이 대번에 찝찝해졌다. 이놈이 기별도 없이 와선 왜 뻘소리를 하나 싶은 표정이었다.
잠시 후, 고구가 입을 열었다.
“파순제가 코앞으로 다가온 건 삼공자도 알고 계실 거요.”
“파순제?”
뭐, 들어 본 적은 있다만 그게 어떻다고?
고구가 유독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본론부터 말하겠소. 힘을 빌려주시오.”
……아,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