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파순제(波旬祭)의 시작은 화려했다 (1)
파순제(波旬祭).
천마신교의 유일신(唯一神)이자 욕계(欲界) 제육천(第六天)의 주인이라는 마라(魔羅), 즉 파순에게 올리는 제사를 말함이다.
과거에는 실제로 파순에게 올리는 인신 공양까지 자행됐다고 한다. 천마신교가 마교라 불리며 악명을 날렸던 시기가 바로 그때부터였다.
그러나 현재의 파순제는 달랐다.
교리가 있고 경전이 있으되, 천마신교 역시 세상사 도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인의 영입이 수백 년간 숱하게 있어 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중원의 풍습과 상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국, 지금의 파순제는 신께 올리는 제사인 동시에 마도 무림의 축제나 다름이 없었다.
그간 격조하여 만나지 못한 이들끼리 친분을 나누기도 했고, 맛난 음식과 술을 마시며 유랑 극단을 초대하여 공연을 관람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제사는 명목일 뿐, 그냥 연회나 잔치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파순제에서 만난 이와 가정을 일군 사람도 많았고, 어릴 적 헤어졌던 혈육과 재회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음, 기억이 솔솔 나는구만.’
과거 마동필에게 파순제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때.
바로 그때 서량은 천마신교에 대한 선입견을 많이 버릴 수 있었다. 얘기만 들어 보면 중원의 여느 축제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와달라고? 나더러?”
“그렇소.”
“뭣 때문에 도와달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의외는 의외로군. 내 기억에, 우리 사이가 웃고 떠들거나 서로 협력하는 사이는 아니었는데 말야.”
“우리 사이가 어때서 그러는 거요?”
“응?”
“비록 나름의 갈등이 있었지만 그것은 각자의 입장 차에서 온 것일 뿐, 감정의 골 같은 것은 없다고 보는데 말이오.”
얼씨구?
“감정의 골은 없지. 그렇다고 껄끄럽지 않은 것도 아니잖아?”
“틀린 말은 아니오.”
절씨구?
“솔직하게 나오니 할 말이 없군.”
고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은 이전과 변함이 없소. 삼공자는 충분히 위험한 사람이오.”
“당신에게는 위험하겠지.”
“동시에 이런 생각도 하고 있소. 양날의 검은 어차피 위험한 거라고. 자칫 잘못 다루면 나도 베이지만, 어쨌든 쥐고 휘두르면 적을 베니까.”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날 쥐고 휘둘러 보시겠다?”
“그런 뜻은 아니오. 다만 공동의 적이 생길 경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을 뿐.”
“말은 잘하네. 결국 써먹기 좋은 패로 보고 있다는 거 아녀?”
“생각은 자유요. 나는 내 생각과 의지를 말에 담아 전달할 뿐, 해석은 삼공자 몫이니까.”
“됐고, 공동의 적이란 말은 뭐야? 그 전에 당신은 왜 내 도움을 바라는 건데? 내가 도와야 할 일은 또 뭐고?”
한 번에 세 개의 질문을 쏟아부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의 내용이다.
고구가 힐끔 마동필을 바라보았다.
마동필은 여전히 운공 중이었다. 극도로 집중하고 있는지 평온했던 표정이 와락 찌푸려져 있었다.
“답하기 전에 묻겠소. 삼공자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자유!
서량은 순간 헛기침을 했다. 저도 모르게 마음속의 말이 튀어나올 뻔했기 때문이다.
이 새끼, 취조하던 실력 어디 안 간 것 같구먼. 괜히 형법당의 수장이 된 게 아니란 말이지?
“후계자들이 원하는 게 뭐겠어? 차기 대권이지.”
“삼공자도 확실히 그걸 원한다는 거요?”
“왜? 아니라고 생각해?”
시큰둥하게 대답은 하지만 슬쩍 눈알을 돌리는 게 누가 봐도 어색한 모습이다.
물끄러미 서량을 바라보던 고구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되었든, 삼공자도 후계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게 여러모로 좋겠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바라는 것은 후계자 중 하나를 형법당의 뇌옥에 처넣는 일이오.”
“……?”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놀랐다.
서량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진심이야?”
“물론이오.”
“아니, 도대체 왜?”
“물론 현재 일곱, 아니 여섯 분을 건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소. 반역을 저지르거나 형법당의 내사를 건드리는 등 중대한 죄를 범하기 전까진 말이오.”
그렇겠지.
“남은 여섯 말고 또 다른 후계자가 있었어?”
“있소. 정확하게 말하자면 후계자로 내정된 자가 파순제에 맞춰 본교에 당도할 것이오.”
“그게 누군데?”
고구의 눈이 험악한 빛으로 번뜩였다.
“마검가의 장남이외다.”
마검가라면 마도칠가 중 일문으로, 칠가를 대표하는 가문이었다.
적어도 검(劍)에 관한 한 마도 무림에서 최고라 할 수 있는 가문.
마검가가 얼마나 대단하냐면, 신교의 정통 마공을 익힌 고수들도 가끔 그곳으로 가서 검학(劍學) 강의를 들을 정도였다.
‘정파의 남궁세가(南宮世家) 정도의 위치겠지.’
내심 고개를 끄덕이던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마검가의 장남이 후계 후보 중 하나로 들어온다고? 왜 난 그걸 못 들었지?”
“모르는 게 정상이오. 삼공자 손에 박살이 난 사공자처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지 않는 한.”
말을 제법 깜찍하게 하네. 기식이 엄엄한 홍위문에게 직접 들려주고 싶을 정도야.
“걔를 왜 잡아 처넣고 싶은데? 뭔 잘못이라도 저지른 거야?”
“그렇소.”
“무슨 잘못?”
“삼공자가 내 제안을 수락한다면 그때 말해 주겠소.”
“염병하고 자빠졌네. 뭔 죄를 저질렀는지 알아야 마음이 동하든 말든 할 거 아냐?”
“나는 다른 후계자들을 제하고 삼공자에게 가장 먼저 왔소. 하지만 삼공자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다른 후계자에게 갈 것이오.”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그럼 가면 되잖아?”
“…….”
“왜? 문제라도 있어?”
“아무렇지 않단 말이오?”
“언짢아야 할 이유는 또 뭐야? 내가 영 아니다 싶으면 다른 후계자한테 부탁하면 될 일이잖아? 오히려 품 팔아야 할 당신 발바닥을 걱정해야지?”
고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대체가 모를 사람이다.’
형법당 안에서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는 생각했다. 삼공자는 굉장히 영악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은 또 뭔가? 멍청한 건지 무관심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이 일을 도와줘도 형법당은 이전처럼 공평무사하게 일 처리를 할 것이오.”
“개뿔.”
“하지만 나라는 개인은 이 일을 도와준 누군가에게 나름의 빚을 지게 되겠지.”
“아하? 그러니까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마라?”
“다소 이죽거리는 방식으로 해석하고 계신 것 같지만, 말하자면 그렇소.”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매혹적인 제안은 아니로군.”
무려 형법당주에게 빚을 지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못하게 취급한다. 고구는 내심 기가 막혔다.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고, 제대로 된 거래 물품도 안 가져왔으면서 냅다 도와달라고 해? 웃기고 있네.”
“…….”
“다른 데서 흥정하쇼. 나는 관심 없어.”
서량이 몸을 돌렸다.
그런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다. 고구는 그 단호한 행동에서 서량의 귀찮음을 읽었다.
물끄러미 서량의 뒷모습을 보던 고구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범죄자요.”
“아무렴.”
“본교의 신도 일곱 명을 강간, 살해하고 그 죄를 엄한 마인에게 뒤집어씌웠소.”
순간 서량의 발이 멈칫했다.
고구의 말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말하자면 본당이 크게 실수한 거요. 결국 중범죄자는 살아남아 아직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교에 영혼을 바쳤던 마인은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이 되었지.”
“…….”
“그 마인은 죽는 순간까지도 교주님을 향해 기도했소. 아직도 그 광경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오.”
고구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가 어떤 성격인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떠나 형법당주로서의 자책감만은 확실히 갖고 있는 듯했다.
“본당의 치부를 타인에게 알려 주고 싶진 않소. 부끄러우니까. 하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그놈은 잡아야겠소.
그놈을 잡아서 억울하게 죽은 마인의 유족 앞에 끌고 가야 하오.”
“…….”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오.”
“그리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소.”
“그게 끝이야?”
“……?”
“빚 하나를 지겠다는 몽실몽실한 거래 물품 말고 확실한 걸 내놔 봐. 그럼 움직여 주지.”
고구가 차갑게 미소 지었다.
“당신도 결국 비슷하구려.”
“뭐가 비슷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달라야 할 이유도 없을 것 같군. 애초에 도와달라 제안한 것은 당신이었어.”
“……내가 실언을 했소. 그렇지, 나 역시 부탁보다는 거래가 편하오.”
“그래서 거래 물품은?”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면, 받아들인 쪽에서 원하는 물품을 내놓아 보시오.”
“그거 좋지.”
서량이 몸을 돌렸다.
그를 노려보던 고구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내가 바라는 거래 물품은 몇 사람의 파직(罷職)이다.”
“…….”
“왜? 싫나?”
“그 몇 사람 중에 나도 포함이 되는 거요?”
“겁나시나 보지?”
“겁 이전에 불가능하오. 그러기 싫은 것이 아니라, 내가 물러나면 형법당의…….”
“걱정하지 마. 당신이 물러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니까.”
“하면?”
“당시 수사를 진행했던 당원들. 그 당원들을 몽땅 파직시켜.”
“…….”
“마음 같아선 싹 다 모가지를 뽑으라 말하고 싶다만, 거래 물품에 사람 목숨을 올려놓고 싶진 않아서.
파직 정도로 그림 하나 예쁘게 만들어 보면 될 것 같군.”
고구의 눈이 깊어졌다.
‘뭐지?’
진심인가? 그저 손해만 보는 이 거래를 진짜로 하겠다고?
서량이 콧방귀를 뀌었다.
“싫어? 오히려 그놈들을 걷어 내면 당신한테도 좋은 일 아냐? 무능하기 짝이 없는 놈들 버리고 의욕 넘치는 신인을 영입해서 보다 아름다운 형법…….”
“이미 다 파직시켰소.”
“……?”
“실수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오. 나는 교내 마인들보다 본당의 당원들에게 더욱 엄격하오.”
“…….”
“…….”
“어허허험! 멋진 척하는 것도 꽤 어려운 일이구만.”
“제법 멋졌소. 진심이라는 것도 알았고.”
“시벌, 당신한테 그따위 소리 들어 봤자 쪽팔리기만 하다고.”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좋아, 빚이든 뭐든 이 건은 도와주도록 하지.”
“고맙소.”
“됐고, 그래서 그놈 어떻게 잡을 건데?”
“모르겠소.”
“……?”
“…….”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모른다고?”
“그렇소.”
“장난쳐?”
“그래서 삼공자를 먼저 찾아온 거요.
형법당 앞에서도 그 난리를 벌인 삼공자의 배포와 예상을 절묘하게 비껴가는 잔머리라면 어떻게든 방도가 나올 것 같아서.”
서량이 한숨을 푹 쉬었다.
“답도 안 나오는 문제를 들고 찾아와서 뭐? 빚? 아주 그냥 세상 편하게 사셔, 응?”
“달리 방도가 없겠소?”
서량이 빽 소리를 질렀다.
“있겠냐!”
“…….”
“……지금 속으로 날 무능하다고 욕했지?”
“아니오.”
“목소리 떨리는 거 봐라.”
“괜한 자격지심에 사람 억울하게 만들지 마시오.”
“염병.”
한참 혼잣말로 투덜거리던 서량이 말했다.
“형법이 적힌 법전(法典) 있지?”
“그렇소.”
“보기 좋은 놈으로다가 하나 가져오셔.”
“그건 왜……?”
“솥 받침으로 안 쓸 테니까 내놔 봐. 형법에 대해서 뭐라도 알아야 놈을 엮든 말든 할 거 아냐.”
“……알겠소. 그 외에 달리 필요한 건 없소?”
“필요하면 그때 말하지. 파순제가 언제라고?”
“닷새 뒤요.”
“빡빡하구만. 알았어.”
“인력은? 사람이 필요하진 않겠소?”
“충분해.”
“혼자서 가능하단 말이오?”
“혼자? 난 혼자가 아닌데?”
“음?”
그때였다.
푸스스스.
새하얀 아지랑이를 피워 내며 천천히 일어나는 마동필.
어느새 전신에 새겨진 도상들에 딱지만 남았다. 크게 심호흡을 하는 그의 얼굴에 선명한 환희가 깃들었다.
고구의 눈이 흔들렸다. 마동필에게서 풍겨 나오는 마기가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다.
“어때?”
그가 서량을 돌아보았다.
서량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니네 당원 백 명을 줘도 안 바꿀 최고의 인력 등장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