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파순제(波旬祭)의 시작은 화려했다 (2)
“후우, 힘들군.”
소연심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연일이 조심스레 말했다.
“벌써 사흘 밤을 새우셨습니다.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 오시는 건 어떠신지요?”
“아니야. 파순제가 벌써 사흘 뒤인데 일은 산더미잖아. 쉬고 있을 틈이 없어.”
“하면 반 시진이라도 휴식을 취하시지요. 물자 정리 건은 저와 주 총관이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순간적으로 ‘그럴까?’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소연심이 고개를 저었다.
“너도 나만큼이나 고생했잖아. 게다가 화아는 무공을 되찾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내가 해야지.”
연일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소연심은 멋진 상사였다. 일 처리에 능했고 제 사람들을 아낄 줄 알았으며, 어려운 일은 손수 도맡아 하는 훌륭한 상관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어려운 상관이기도 했다.
자고로 윗사람이 고생하면 아랫사람은 그만큼 눈치를 보게 마련이다.
소연심도 그걸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워낙에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연일은 그런 소연심을 존경했다. 쉬라는 것도 진심 어린 걱정에서 하는 말일 뿐, 눈치를 봐서가 아니었다.
당연히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기야 했지만…….
‘차라도 좋은 놈으로 타다 드려야겠군.’
연일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물러나려 할 때였다.
“소 원주우!!”
창가 너머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소연심과 연일은 깜짝 놀랐다.
“이 목소리는?”
“소 원주! 저 왔어요! 잠깐 시간 좀 내 주세요!”
소연심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연일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물자 정리 건은 저희가 처리토록 하겠습니다. 원주님께서는 귀빈을 맞으시지요.”
“……그래야겠구나.”
잠시 후, 원주실에 서량과 소연심이 마주 앉았다.
“기별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어인 말씀을 그리하시나요.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엥? 원주가 미안해할 건 또 뭡니까?”
“일전 수송대 건으로 진즉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늦었지요?”
서량은 유쾌한 농담으로 넘기려 했다.
그러게 진즉 술이나 사지 왜 늦장을 부렸냐는 둥, 한 살이라도 어린 놈이 먼저 찾아오는 게 맞다는 둥 너스레를 떨어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려 했다.
하지만 소연심의 얼굴을 보니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병자가 다 됐군.’
맑고 투명했던 피부는 푸석푸석했고 눈 주변은 시커멓게 변해서 쑥 들어갔다. 귀빈이랍시고 나름 꾸미긴 했지만 누가 봐도 피로에 찌든 모양새였다.
“커허험, 괜찮습니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요, 뭐.”
“그래도 그게 아니지요. 이 자리를 빌려서 정식으로 사과드릴게요.”
고개를 꾸벅 숙이는데 동작이 느릿느릿했다. 피곤해도 보통 피곤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과중한 업무가 주는 피로는 고수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감사해요. 공자님이 아니셨다면 수송대의 임무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거예요.”
“주 총관한테 다 들으셨군요.”
“네.”
“뭐, 저도 괜한 고집 부려서 주 총관을 사지로 끌어들인 격이 된 거니까요. 그냥 없는 일인 셈 치죠.”
“그리 말씀해 주시면 제가 감사하죠.”
서량이 입맛을 쩍 다셨다.
소연심이 애써 밝은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인 일로 찾아오셨나요? 제게 따로 부탁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뭐, 마음 같아선 술이나 진탕 마시자 하고 싶긴 했는데 저도 나름대로 일이 있어서…… 공사가 다망하신 와중에 찾아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부탁이 있는 게 확실하군.
소연심이 웃으며 물었다.
“아니에요. 해서, 어떤 일로 오셨지요?”
“심사를 좀 흐트러트릴 만한 일입니다. 평소라면 모르겠는데…… 음, 미리 사과를 드릴게요.”
“무슨 일이시기에?”
“죽은 교도의 문제로 찾아왔습니다.”
죽어? 죽긴 누가 죽어?
“재작년에 환희원 소속으로 일하던 시녀 한 명이 살해되지 않았습니까?”
순간 소연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건으로 찾아오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왜죠?”
상당히 날카로운 반응이다.
피해자 중 여섯 명이 외전 소속이고 남은 한 명은 환희원 소속이었다. 앵화처럼 내공심법만 익혔을 뿐, 반 초식의 외가 무공도 모르는 시녀였다.
자신의 소속원이 살해되었다는데 기분이 좋을 상사는 없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소연심의 반응은 지나치게 날카로운 감이 있었다.
가만히 소연심의 신색을 살피던 서량이 툭 던지듯 물었다.
“알고 계셨군요?”
“…….”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 알고 계셨지요?”
“……공자님께선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지요?”
역시 알고 있었군.
“어떻게 아는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다만 제가 그 진범을 잡으려고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니는 중이라는 게 중요하죠.”
“네?”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이번에 그 진범 놈 잡으려고요.”
소연심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공자님이요? 직접이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그걸 왜 공자님이? 이런 일은 형법당에서 처리하는 것이 옳은…….”
“…….”
“혹, 형법당에서 협조를 요청했나요?”
“역시 눈치가 귀신이십니다.”
“진범의 정체도 들으셨나요?”
“들었습니다.”
훅!
소연심의 몸에서 강렬한 마기가 치솟았다.
그 마기는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연심 역시 환희원을 총괄하는 초고수인바, 뿜어내는 마기의 압박이 실로 대단했다.
“누구죠, 진범이?”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소연심은 이유가 뭐냐고 묻지 않았다. 자신이 형법당주라도 진범의 정체에 대해 발설치 말아 달라 말해 두었을 것이다.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까.
“좋습니다. 공자님께서 그 진범을 잡으려 하신다는데 저희가 정보를 제공해야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마땅히 양팔 걷어붙이고 도와야지요.”
“피해자의 자세한 신상 명세와 외모적인 특징, 그리고 평소 습관 같은 것들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잠시 후, 마인 하나가 문서들을 가져왔다.
“총 다섯 장이에요. 여기에 피해자에 대한 모든 정보가 적혀 있어요.”
“잘 받았습니다. 보아하니 한창 바쁘신 것 같은데 저는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공자님.”
“예?”
“……꼭 잡아 주세요.”
서량이 든든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든 잡아 보겠습니다.”
그렇게 서량이 나간 뒤,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소연심이 허공의 줄을 당겼다.
“부르셨습니까, 원주님.”
“연일.”
“예.”
소연심의 안광이 싸늘해졌다.
“이번 파순제에 참가하는 수뇌부들의 명단 몽땅 추려서 가져와.”
평소 서량이라면 분명 ‘파순제’라는 말을 꺼냈을 것이다. 상대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본능적으로 파고들어 알아 내려는 것은 서량의 습관이었으니까.
그러나 오늘 서량은 파순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혹 그녀가 진범에 관해 낌새를 알아차리진 않을까 염려한 것일 터였다.
게다가 형법당에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후계자 중 한 명에게 이 일을 부탁했다.
수사 능력만 필요로 했다면 형법당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려 들었을 것이다. 훨씬 전문적이고 확실할 테니까.
즉, 형법당원들로는 진범을 쉽게 건드리기 힘들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진범은 이번 파순제에 참가하려는 고위층 마인일 가능성이 컸다.
“특히 마도칠가 명단을 빼놓지 말도록.”
고위층 중에서도 세력이 약하거나 단독이었다면 형법당은 후계 후보가 아니라 군사부에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정치적인 문제로 부각되지 않을 테니까.
고로 진범은 마도칠가에 속한 마인일 확률이 높다.
‘알려 주지 않으면 직접 알아내면 된다.’
소연심의 비상한 머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상황과 대화 몇 마디만으로 진범이 속한 집단까지 순식간에 파고든다.
무공보다도 무서운 힘, 그것은 바로 눈치와 두뇌였다.
‘반드시 잡아 주마.’
아랫사람을 잘 챙기기로 유명한 소연심이었다. 비록 이 년 전의 사건이지만 그녀는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했다.
소연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간 쌓인 피로가 한순간에 몽땅 날아갔다. 피로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천마신교의 재무를 담당하는 최상위 권력자의 분노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 * *
“대가리 무지하게 아프네.”
검지 길이만큼이나 두꺼운 법전을 던진 서량의 푸념이었다.
투웅!
마동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침상 위, 법전이 떨어진 자리가 쑥 꺼져 있다. 저 법전이 얼마나 살인적인 양의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더 무서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다…… 읽으신 겁니까?”
“어? 어어, 대충?”
마동필은 서량을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서량이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저게 뭔 무공 구결도 아니고 하나하나 의미 찾아 가며 살펴볼 필요는 없잖아? 그냥 대충 훑어본 거야. 태반이 기억도 안 난다.”
“그래도 굉장하십니다.”
“굉장하긴? 딱 보니까 그냥 말장난만 한가득 써놓은 법전이더구먼. 그런 걸 보면 형법당도 순 제멋대로라니까.
꼴리는 대로 잡아 처넣고 대충 죄목 몇 개 찍으면 바로 죄인 되는 거잖아.”
투덜거리던 서량이 나른하게 하품했다.
사흘 동안 잠도 안 자고 마공을 재점검한 것도 모자라 하루는 수련에 임했고 하루는 저 법전을 싹 훑어보았다.
벌써 닷새 동안이나 잠을 자지 않은 것이다. 초절정고수라도 피로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좀 붙이시는 게 어떠신지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하나만 확인하고 나서.”
서량이 마동필을 힐끔거렸다.
“어떠냐?”
“예?”
“몸뚱이 좀 어떠냐고? 제법 신세계일 텐데.”
마동필의 낯빛이 대번에 밝아졌다.
“굉장합니다. 저는 제게 이런 힘이 숨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래, 나도 상상을 못 했다. 네가 그렇게나 무식하게 힘을 억누르고 있었을 줄은.”
“……면목이 없습니다.”
“왜 나한테 면목이 없냐? 자유롭지 못한 네 정신에 면목이 없어야지.
의지만 굳건하면 뭐해? 사고가 꽉 굳어 버렸는데. 너 그러다 나중에 크게 한 방 맞는 날 올 거다.”
“…….”
“뭐라 하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풀 죽어 있을 필요 없어, 인마.”
“아, 예.”
서량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제법 유해졌다고 생각했더니만 여전히 딱딱해서 농담도 못 알아듣느냐는 내용이었다.
마동필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이러기도 쉽지 않으실 텐데.’
새삼 생색내는 데에 참 소질이 없는 분이란 걸 깨닫게 된다. 하긴, 그런 담백함이 매력적인 분이지만.
“네가 익힌 마공이 호법원의 마공이지?”
“예, 호법원의 모든 호법이 익히고 있는 무공입니다.”
“호법원주도?”
“아, 대호법은 보다 더 고차원적인 마공을 익혔습니다.”
“흐음.”
턱을 쓰다듬던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네 마공도 한번 보자. 설마 비밀이랍시고 구결 안 알려 줄 건 아니지?”
“아, 물론입니다.”
오히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다. 초고수가 자신의 무공을 봐 주겠다는데 어찌 마다하겠는가.
“좋아, 그럼 됐어.”
침상에 몸을 누인 서량이 눈을 감았다.
“해 넘어갈 때쯤 나 깨워라.”
“따로 하실 일이 있으신지요?”
서량이 씨익 웃었다.
“할 일이 또 뭐가 있겠어? 무공이나 몸에 확실히 붙여 놔야지. 어차피 진범 잡으려면 여기저기 움직여야 할 것 같고. 결정적으로…….”
“……?”
“너도 신세계지만 나도 신세계를 보고 있거든. 파순제 전까지 완전히 보완해 놓을 생각이다.”
“……!”
“잔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
마침내 파순제를 하루 앞둔 밤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