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파순제(波旬祭)의 시작은 화려했다 (3)
“준비는 어떻게 되었소?”
“잘되어 가고 있지.”
“어떤 준비를 하셨소?”
“글쎄…… 나 자신에 대한 믿음?”
“…….”
“사실 달리 준비할 게 없어. 마검가의 장남이라고 했지? 그놈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려 해도 표면적인 것뿐이고, 하다못해 정확한 무공 수위도 모른단 말이야.”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시는 거요?”
“그러게? 당신은 어쩌려고 나 같은 인간한테 이런 일을 부탁했어?”
“나도 지금 후회를 해 볼까 생각 중이오.”
“많이 하셔.”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게 말해 주시오. 정말로 아무런 준비가 없소?”
“없어. 정신 무장을 제외하고는.”
“…….”
“그리고 뭐, 굳이 준비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하나 더 있기는 하지.”
“그게 뭐요?”
“음…….”
“왜 그러시오? 혹시 불법적인 일이오?”
“딱히 불법적인 일이라기보다는…….”
“무엇이오? 우리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거면 어떻게든 무마해 보도록 노력하겠소.”
“아, 그럴래? 그럼 말한다?”
“그러시오.”
“속닥속닥.”
“……?”
“중얼중얼.”
“……!!”
“뭐어, 대충 이런 흐름을 예상 중이긴 한데 말이야.”
“…….”
“표정이 왜 그래? 별로 안 좋은 생각 같아?”
“……삼공자.”
“왜?”
“당신, 정말 미친 거요? 진범 잡기도 전에 본당에 끌려가고 싶소?”
“이 양반이 갑자기 험한 말을 하고 그래.”
“아니지. 본당에 끌려가지 않아도 죽은 목숨이오. 윗선에서 그걸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소?”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잖소! 본교의 마인이면서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단 말이오?!”
“뭐야…… 진범 잡으려고 나름 고심한 거구만.”
“절대 불가하오. 그런 짓을 하면 내가 먼저 달려가 삼공자 손목에 수갑을 채울 거요.”
“죄도 없는데 왜 수갑을 채워? 권력 남용도 중죄인 거 알지?”
“그게 왜 죄가 아니오? 어떻게 죄가 아닐 수 있단 말이오?!”
“법전에 안 나와 있던데? 위법 아냐, 이거. 하기야 애초에 위법일 수가 없지.”
“……?”
“의심되면 한 번 찾아보든가.”
“삼공자! 지금 삼공자가 하려는 일은 법의 테두리를 한참 벗어난 문제요!”
“누가 죽어 나가는 것도 아니고, 닥치고 두들겨 패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남들 다 보는 데서 발가벗고 깨춤을 추는 것도 아니잖아?
어? 근데 풍기문란 그런 걸로도 잡혀 가나?”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 보시오. 더 이상 자살하겠다는 사람을 막진 않을 테니까.”
“성공을 빌어 줘도 모자랄 판에 저주를 하고 있어? 어쨌든 진범 잡는 데에 이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잖아. 안 그래?”
“…….”
“거봐.”
“내가 왜 삼공자를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했는지 알고는 있소?”
“아니까 이대로 하겠다고.”
“……좋소. 삼공자가 원하는 대로 해 보시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할 테니까 상황 주시하는 거 잊지 말고.”
“…….”
“대답은?”
“진범이나 제대로 잡아 주시오.”
* * *
파아아앙!
뻗어내는 주먹에서 강렬한 기운이 뿜어졌다.
무형의 진기가 동심원을 그리며 펴져 나간다. 그러면서도 일정 거리 이상 벌어지면 거짓말처럼 발경(發勁)이 사라졌다.
마동필의 얼굴에 순수한 기쁨이 어렸다.
‘됐다!’
이전보다 배는 왕성해진 공력, 나아가 마공의 경지도 두 단계는 높아졌다. 대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그의 무공은 이 조장 기양조차도 넘어설 정도였다.
대호법을 제외하면 호법원의 이인자라 할 수 있는 기양을 뛰어넘는 실력을 이룩했으니, 찬사를 받아 마땅할 일이었다.
특수호위대인 호법원 일 조와 이 조는 삼 조 이하의 조들과 차원을 달리하는 실력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일 조의 조원들은 하나하나가 마동필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고수들이었다.
이 조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조원들 간의 무공 격차는 조장끼리의 무공 격차와 비슷했다.
이미 충분히 높게 올라온 경지에서 단숨에 두 계단을 뛰어올라 기양마저 웃도는 실력이 되었다는 건 누구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기연이 달리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다만 오른 경지에 비해 경험과 연마가 부족했다.
지나치게 왕성해진 마기로 인해 힘이 제어되지 않았다. 그 힘의 제어를 며칠 동안의 피땀 어린 단련으로 어느 정도 체득하게 된 것이다.
‘딱 이 정도다. 성공했지만 방심해선 안 돼. 본능적으로 펼쳐도 의도대로 정확하게 꽂힐 수 있도록 매 순간 연마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몸이 너무 무거웠다. 아침부터 밤까지 쉴 새 없이 수련만 했으니, 이제는 정말 쉬어 줘야 할 때다.
마동필은 자세를 풀었다.
“후욱! 음?”
그가 연무장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서량이 눈을 감고 좌공(坐功) 중이었다.
전신 가득 은은한 적색 광채를 뿜어내는 서량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마동필의 눈에 근심이 어렸다.
‘벌써 한나절째 저러고 계신다. 괜찮으신 걸까?’
하긴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는 것인가. 살쾡이가 호랑이 걱정하는 격이다.
대충 땀을 털어 낸 그가 연무장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운공조식으로 내력을 회복하며 하루의 피로까지 몽땅 풀 생각인 것이다.
그렇게 그가 진기를 도인하려 할 때였다.
휘이잉.
‘응?’
마동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바람?’
남부의 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다. 그나마도 이곳이 산이라 그렇지 밑으로 내려가면 다른 지방의 늦봄 정도로 따뜻했다.
물론 바람이 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동필의 신경이 곤두선 것은 그 바람의 실린 기(氣)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바람이지?’
딱히 대단한 기도 아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결국, 호기심이 운공조식을 이겼다. 마동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헉!”
깜짝 놀란 마동필이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고, 공자님?”
우우우웅.
눈을 감은 서량은 여전히 은은한 붉은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서량의 등 뒤에 떠오른 기묘한 형상과 그 형상이 뿜어내는 이질적인 기를 제외하면.
하아아아.
서량이 입을 열어 크게 호흡을 내뱉었다.
동시에 그의 머리 위로 떠오른 집채만 한 형상의 붉은 괴수도 주둥이를 쩍 벌렸다.
‘……!’
너무나도 거대한 환상의 괴수.
마동필은 저 괴수를 본 적이 있었다. 고죽림이었는지 내전 생활을 할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딱 한 번 목도한 적이 있었다.
마치 마공 자체가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인 것처럼.
주인을 나락으로 이끌기 위해 몸에 기생하는 영성(靈性)을 지닌 괴물인 것처럼.
그때도 서량은 저 비슷한 괴수의 형상을 만들어 냈었다.
하지만 당시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때보다 두 배는 선명하고 열 배는 거대한 괴수가 천지사방에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듯했다.
움찔! 움찔!
마동필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바람에 섞인 미약한 기는 바로 저 괴수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였다. 하지만 대단치는 않아서 평범한 무인들은 무시하고 넘길 수준이었다.
그러나 저 괴수를 마주하고 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럴 수가!’
절정의 끝자락에 선 마동필.
그런 마동필조차 공포에 질려 물러나게 할 만큼 압도적인 형상이었다.
저 괴수가 제대로 된 힘을 발산하게 될 때, 얼마나 무지막지한 흉기(凶氣)를 드러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걱정이 되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것을 공자님께서 다루실 수 있을까?’
서량의 능력을 누구보다 믿는 마동필조차 덜컥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저건 단순한 괴수가 아니야.’
지옥에서 불러온 진짜 마귀다.
겁에 질린 마동필이 이를 악물고 버틸 무렵.
우우우웅.
서량의 방 창가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오색의 광채가 서량의 미간으로 흘러 들어갔다.
스르르륵.
그러자 거짓말처럼 괴수, 아니 마귀의 형상이 사라졌다. 그 거대한 힘이 몽땅 서량의 몸으로 흡수된 것이다.
“후우우.”
서량이 재차 숨을 뱉었다.
파지지지직!
그의 몸 주변으로 익숙한 암뢰의 파편들이 일었다.
이전보다 크기가 작아 요란함도 줄어들었지만, 그 파편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돌덩이 따위는 스치기만 해도 산산이 부서져 가루로 흩날릴 것 같았다.
훅!
이내, 암뢰와 붉은 광채도 사라졌다.
번쩍!
눈을 뜬 서량의 안광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했다. 잡티 하나 없이 매끄러운 적색 동공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마력으로 충만해져 있었다.
“벌써 밤인가.”
자리에서 일어난 서량이 품에서 고이 접어 둔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바로 암영진마공을 보완하는 글이 적힌 이천상의 심득(心得) 중 일부였다.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그 양반은 정말이지…….’
이천상의 안목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마공의 구결도 모르면서 뿜어내는 마기와 발경(發勁)만으로 무공의 빈틈을 꿰뚫어 보았다.
그것도 대단하거늘, 나아가 무공을 보완할 여러 구결까지 뚝딱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덕에 서량은 자신의 마공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하나로 결합해서 완성이라 하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완성해 낸 것이었다.
마치 오랜 세월 깎이고 깎여 천하일절의 명성을 날리는 구대문파의 비기들처럼.
부스럭.
그가 종이를 펼쳤다.
이백여 자의 글이 적힌 종이의 마지막엔 구유지장(九幽至章)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찌이이익.
서량이 종이를 박박 찢었다.
화르륵.
조각조각 찢긴 종이가 푸른 불길에 타서 재가 되었다.
마동필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상마진화(上魔眞火)?!”
상마진화, 정파 측 무공에서는 삼매진화(三昧眞火)라 불리는 경지였다.
열양공을 익혀서 불꽃을 피우는 게 아니었다.
순수한 깨달음을 통해 진기가 극도로 가공되는 경지, 노화순청(爐火純靑)에 이르러야 비로소 드러낼 수 있다는 내력의 불길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설마 공자님께선 벌써…….”
“아니, 극마지경(極魔之境)은 아니야. 거의 다다르긴 했지만.”
서량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저 진즉에 가공되었던 내 마기가 이제야 빛을 보는 것일 뿐이다.”
극마지경은 곧 천하십대고수와 동등의 경지다. 신교의 구대마존들이 바로 저 경지에 이른 절대자들이었다.
서량 역시 전생(前生)에 이미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던 고수. 하나 암영진마공이 그의 깨달음을 온전하게 녹여 낼 만큼 완성된 무공이 아니었던 것일 뿐이다.
아마 지금처럼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면 언젠가 그는 마공을 통한 극마지경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 시기는 서량도 알 수 없었다.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아니면 일 년 뒤가 될 수도 있었다.
‘일 년을 넘지는 않겠지만.’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이 장막처럼 드리워진 밤하늘에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빼곡했다.
“그동안 잊고 있었어. 이름 없는 자의 서글픔을.”
강호의 그 누구도 그의 진짜 이름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의천맹주도 그의 이름을 몰랐다. 다만 숫자로 불리고 의살(義殺)이라 불리었으며, 나아가 살왕이라 불리었을 뿐이다.
거기에는 자유를 꿈꾸는 암살자만이 존재할 뿐, 인간 천하진은 없었다.
“하다못해 무공의 경지에도 저마다 이름이 있거늘.”
꾸욱.
꽉 쥔 주먹에 맥동하는 마기가 담겼다.
이전보다 조금은 어두워진 듯한, 그래서 더더욱 완전한 적광(赤光)에 이른 마기.
‘암영기와 진마공을 합쳤다고 이름도 그따위로 지어? 잘하는 짓이다.’
반짝이는 별들을 올려다보던 서량이 이내 달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 서글픈 미소 한 자락이 바람을 타고 동동 떠다녔다.
“환상 속의 지옥문까지 열어젖힌 대단한 무공이라면 그에 걸맞은 품격을 갖춰야겠지.”
서량이 고개를 내렸다.
붉은 안광을 토해 내는 위엄 넘치는 모습에 마동필이 침을 꼴깍 삼켰다.
‘구유마공(九幽魔功). 앞으로 이 무공을 구유마공이라 칭한다.’
자신이 무엇을 가졌는지, 가진 것의 진명(眞名)을 아는지 모르는지의 차이는 컸다.
천마신교 삼공자 서량.
신교 역사에 획을 그을 절대마공이 달빛과 별빛, 그리고 일대종사(一大宗師)의 호위무사가 지켜보는 곳에서 조용히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또 하루가 지났다.
“동필아.”
“예, 공자님.”
“앵화한테 옷 좀 준비하라 일러라.”
서량이 씨익 웃었다.
“진범 낯짝이나 보러 가자.”
파순제의 첫날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