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신교의 무법자 (1)
천마신교 삼공자.
그 이름이 주는 여파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우와아아!”
“사, 삼공자님?!”
“실물로 뵙는 건 처음이야!”
“과연……! 소문대로 위엄 넘치게 생기셨어!”
서량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 얼굴이 위엄? 제법 잘생기긴 했어도 그냥 맹물 아닌가?
반면 지운회를 비롯한 마검가의 마인들은 다른 의미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삼공자라고? 저 청년이?’
지운회는 다시 한번 서량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과거 어느 때인가 그는 서량을 본 적이 있었다.
막 코 밑이 거뭇거뭇해질 무렵이었으니 삼공자로 발탁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 해도 그때의 서량과 지금의 서량은 너무 큰 차이가 있었다. 설마하니 삼공자가 이렇게까지 변했을 줄이야.
서량이 히죽 웃었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
“한데 인사는?”
가만히 서량을 바라보던 지운회가 천천히 포권을 취했다.
“마검가주 지운회가 삼공자를 뵙소.”
짧고 간단한 인사였다. 상대를 경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다지 예의를 차리지도 않은 미묘한 인사였다.
동시에 그의 뒤에 도열해 있던 두 청년과 검향대의 검사들도 고개를 숙였다.
“삼공자를 뵙습니다.”
기파를 발산할 때는 태산이라도 허물 것 같더니 인사는 조용하기만 하다.
지운회가 말했다.
“귀하가 삼공자인 줄은 몰랐소.”
“그으래?”
“몰랐다 한들 무례는 무례인바, 나의 잘못을 인정하오.
하나 귀하도 신교의 후계 후보로서 예법에 벗어나는 언행을 보여 주었으니 이번 일은 없는 것으로 하는 게 어떻겠소?”
깔끔한 일 처리였다. 당황했지만 순식간에 마음을 다잡고 서둘러서 사태를 무마시킨다.
과연 마도제일을 다투는 가문의 수장다운 모습이었다.
서량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럽시다. 나도 뭐 시비나 걸자고 찾아온 건 아니니까.”
그다지 신뢰가 가는 발언은 아니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그를 책잡을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감사하오. 그럼 이만…….”
“그 전에.”
“……?”
“가주께선 내 질문에 대답을 안 했잖소.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니 대답이나 들려주고 가시오.”
“……그 질문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소.”
“언제든지 들려드릴 수 있지. 나는 이렇게 물었소. 아비로서, 자식의 파렴치한 범죄를 목도했다면 어떻게 행동할는지.”
지운회의 눈이 깊어졌다. 상대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짐작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지켜보는 와중이었다. 저 신분만 높은 천둥벌거숭이와 오래 대화해서 좋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당연히 법도대로 처리해야 할 것이오.”
“법도대로 처리한다?”
“그렇소.”
“그 법도라는 것이 참 애매한 말이로군. 가문의 법도대로 처리한단 뜻인가?”
지운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되묻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지만 그는 당연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서량의 얼굴이 생각보다 훨씬 진지했던 것이다.
잠시의 침묵.
그 무거운 침묵 끝에 지운회가 대답했다.
“본가의 법도는 어떤 가문보다도 엄정하오. 혹시라도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난 자식이라도 단호하게 죄를 물을 것이오.”
“오히려 자식이기 때문에 더더욱 단호하게 죄를 묻겠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소?”
은근한 확대 해석.
하지만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운 자리였다.
외전의 마인들은 물론 외부에서 들어온 마인들로 가득하지 않나. 나아가 내전의 고수들 몇몇도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소. 내 자식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자가 어찌 가주로서 한 가문을 이끌겠소?”
“그렇군.”
“하나 나는 믿소. 내 자식들은 물론 본가의 어떤 마인들도 결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마검가주로서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말이었다. 적어도 이 말에서만큼은 지운회의 진심이 묻어났다.
물끄러미 그를 보던 서량이 고개를 숙였다.
“가시는 길 붙잡아 두어 미안하게 됐소. 신교에 입성하신 걸 환영하오.”
“별말씀을.”
서량이 한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마동필도 묵왕검을 납검하곤 그의 뒤를 따랐다.
다시금 전진하는 마검가의 병력.
옆으로 물러난 서량이 지운회의 뒤를 따르는 두 청년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서량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안색은 다소 창백했지만 매서운 눈매와 전신에 서린 칼날 같은 기도가 인상적이었다.
다른 한 명은 이제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곱상한 외모에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인상적인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검가주의 장남과 셋째로군.’
장남 지강현(池鋼賢), 그리고 삼남인 지영현(池永賢).
마동필의 눈이 번뜩였다.
“공자님.”
“그래.”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기도입니다. 장남 지강현…… 가벼이 봐서는 안 될 인물이로군요.”
“맞다. 맞기야 한데…….”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칼날 같은 기도를 뽐내는 지강현의 눈빛에서 뚜렷한 살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저 정도야 강호의 검사들도 흔히 갖고 있는 수준이다. 사람을 죽여 본 검사는 살인의 무게를 체감해 본 자들. 눈빛에 살기가 담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서량은 한 가지를 더 읽을 수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사람을 죽이는 놈이야. 그렇지 않고선 살기가 저리 생생할 수도 없고, 중첩되지도 않지.’
죽음의 영역을 강호 누구보다 깊게 답습해 본 그다. 흐르는 살기만 봐도 상대가 어떤 아수라장을 겪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수라장? 그럴 리가.’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저건 창칼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얻을 만한 살기가 아니야.’
얼핏 여느 검사의 살기와 비슷하지만, 보다 지독하고 보다 패악스러운 살기.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살해한 자의 살기다.’
말 그대로 살인귀, 살인마의 눈빛이었다.
‘장남 지강현이 진범이라…… 정말 이틀에 한 번꼴로 누군가를 죽인 거면 어마어마하군.’
일 년이면 적게 잡아도 백팔십여 명이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마두(魔頭) 소리를 들어도 부족함이 없다.
서량도 하루에 암살을 서너 탕 뛴 적이 있지만 그가 암살한 자들은 모두 무림인들이었다.
치열한 눈치 싸움과 극한의 집중이 필수인, 말하자면 전투와도 같았다.
지강현은 달랐다.
추측건대 놈이 죽인 사람들은……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양민일 가능성이 높다.
‘하긴, 마도 가문의 장남이니 마두 소리를 들으면 되레 좋아하려나.’
여하간 흉악한 놈인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마검가주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마도의 검왕 소리까지 듣는 아비의 눈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치밀함을 갖춘 놈이다.
게다가 가문의 장남으로서 부여된 업무도 하루하루 처리해야 했을 것이다.
흉성(凶性), 치밀함, 주변 모두가 의심치 않을 만큼의 자기 관리 능력까지.
‘만만치 않은 놈이구먼.’
그때, 지강현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서량과 시선이 마주치자 이내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을 바라본다.
‘여러모로 호의를 갖기 힘들다, 이거냐?’
나라도 그러긴 하겠다만.
서량이 마동필의 어깨를 두들겼다.
“동필아, 슬슬 돌아…….”
순간 서량은 등허리를 훑고 올라오는 불길함을 느꼈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에 잡히는 한 명의 청년.
“공자님?”
“…….”
“공자님!”
“어? 어어.”
“이만 가시지요.”
“그래, 가자. 위 대주는 어디 있냐?”
“위 대주는 여기…….”
그때, 거짓말처럼 위홍련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훅 올라왔다.
“절 찾으셨나요?”
“깜짝이야. 이년 이거, 언제 은신술을 배웠어?”
“오히려 제가 놀라운데요? 저어어기에서부터 공자님을 부르면서 왔는데 안 들리셨어요?”
마동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쩝, 뭣 좀 생각할 게 있었더니 못 들었나 보다. 그나저나 넌 다 질질 짰냐?”
“아, 쫌!”
“킬킬! 알았다. 야, 외전 구경도 얼추 끝났는데 내전으로 가자. 심심한데 술이나 빨자고.”
“앗?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또 뭐냐. 할 것도 없는데 외전에서 계속 죽치고 있을 수는 없잖아. 딱 보니 너희들도 재미없어하는 것 같은데.”
“헤헤, 알고 계셨구나.”
“넌 참 솔직해서 좋아…….”
그렇게 세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내전으로 향했다.
두 사람과 보조를 맞추며 맞장구를 치는 서량, 하지만 그의 의식은 조금 전에 보았던 한 청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지강현이 아닌 삼남 지영현이었다.
‘그놈…….’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말도 안 되는 힘을 숨기고 있어.’
이천상의 도움으로 완성된 구유마공의 감각이 없었다면 잡아내지 못했을 만큼 은밀한 힘의 파편.
지영현은 최소한 자신에 육박하거나, 그 이상의 내공을 갖고 있었다.
“……요고 요고 갈수록 흥미진진한데?”
* * *
한 시진 만에 술로 위홍련을 기절시켜 버린 서량이 거처를 나섰다. 그리고 그의 뒤를 마동필과 금호가 따랐다.
“너는 안 취했냐?”
“주기(酒氣)를 날렸습니다.”
“아깝게 주기는 왜 날렸어? 그럴 거면 마시질 말든가.”
“…….”
“그래, 내가 마시라고 하긴 했지만 말이다.”
“저는 공자님의 밀착 호위입니다. 언제 어느 때건 공자님을 지켜 드려야지요.”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때, 금호가 앙! 소리를 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빠른 걸음으로 속도를 맞추면서도 고개를 올려 서량을 본다.
“이놈 자식, 너도 따라오는 거냐?”
품에 안자 금호가 앞섶으로 폭 파고들어 자리를 잡았다. 따라오고는 싶은데 걷기는 귀찮은 모양이었다.
“한데 공자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환희원주한테 간다.”
“그러시군요.”
서량이 힐끔 그의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아까 멋있더라? 검을 콱! 하고 꽂고는 퍽! 소리 나도록 무릎 꿇고선 말이야.”
“아…….”
“그런 걸 보면 너도 나름 분위기를 읽을 줄 안단 말이지. 잘했다야.”
마동필이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저 마검가주의 오만방자함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입니다.”
“오만방자함은 무슨. 눈인사까지 상큼하게 해 대더니만.”
“……보셨습니까?”
“보이더라고.”
“죄송합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너만큼 죄송하단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놈 못 봤다. 아주 그냥 천하제일죄인 납셨어. 그게 대체 왜 죄송하냐?”
“그저…….”
“하여튼 딱딱하다니깐. 그렇지, 금호야?”
「앙!」
“거봐.”
마동필의 얼굴이 불편해졌다.
공자님껜 어떤 말을 들어도 상관없지만 저 요물은 아니었다. 팔뚝 크기밖에 안 되는 여우한테 얕보인 것 같아 영 찝찝했다.
서량이 낄낄거렸다.
“너는 인마, 앞으로 금호한테 잘해. 언젠가 네가 실수할 때 너의 잘못을 꾸짖어 줄 멋들어진 맴매가 될 아이…….”
순간 그의 눈이 번뜩였다.
마동필이 답지 않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떻게든 실수하지 않도록 노력하겠…….”
“숙여!”
파아아아악!
한 줄기 풀잎이 허공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