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신교의 무법자 (2)
퍼억!
바위에 작은 구멍이 뚫리는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작은 소리에 마동필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만약 서량이 경고해 주지 않았다면 바위가 뚫리기 전에 그의 가슴이 뚫렸을 터였다.
그것도 고작 풀잎 한 장에.
‘대체 누가?!’
마동필이 빠르게 상체를 바로 세우고는 주위를 살폈다.
그때 이미 서량은 움직이고 있었다.
파아악!
풀잎이 날아온 곳으로 순식간에 접근한 서량이 칼을 뽑아 들었다. 혹시 몰라 챙겨 온 칠야도였다.
번쩍! 파라라라락!
육연지옥풍의 풍인(風刃)이 펼쳐지자 작은 풀숲이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확실히 서량의 인화도법은 이전과 달라졌다. 일초육식의 육연지옥풍을 모조리 쏟아붓지 않았는데도 연환식을 펼친 것처럼 칼 놀림이 부드럽고 유연했다.
서량의 일도(一刀)를 피하고 어느새 저 멀리 검은 점이 되어 사라진 고수의 무공은 그래서 더욱 대단했다.
마동필의 눈이 불을 뿜었다.
파아아악!
순식간에 수풀로 접근한다. 당장에라도 놈을 쫓으러 가고 싶은 것이다.
그때, 서량이 손을 들었다.
“그만.”
타다닥!
마동필이 멈추었다.
“공자님?”
“늦었어.”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저 방향, 백 단위의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내전이라 하나같이 고수들뿐이야. 저만한 고수들 틈에서 놈의 기척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해.”
“하, 하지만…….”
“너보다 강한 나라도 불가능하고, 나보다 추격에 능한 너라도 불가능하다. 받아들여라.”
마동필이 입술을 깨물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던 서량이 풀잎이 박힌 바위로 다가갔다.
“허? 이 새끼 봐라?”
서량이 입맛을 쩍 다셨다.
“적엽비화(摘葉飛花)의 수법이라…… 화살보다 빠른 속도에 바위마저 뚫어 버리는 위력이라고? 이거 걸물인데?”
마동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정도의 적엽비화술을 쓸 수 있는 고수라면 가히 초절정고수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예?”
서량이 자신의 품을 내려다보았다.
앞섶에 쏙 들어간 금호가 나른하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이런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은 듯했다.
‘분명 풀잎의 살기는 대단치 않았어. 하지만 나라면 사전에 알아챌 수 있었을 거야.’
그 정도 고수가 암습을 하려는데 초감각이 주는 위화감이 없었다. 심지어 금호는 졸린지 서서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말은?
“야, 동필아.”
“예, 공자님.”
“대체 나 없을 때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 이름 모를 초고수의 여동생한테 이별 통보라도 한 거냐?”
“……예?”
“놈이 노린 건 내가 아니라 너야.”
“……?!”
“널 노린 거라고. 나를 노린 거였으면 풀잎이 날아오기도 전에 공격이 들어올 걸 알아챘을 거다.”
마동필의 입이 충격으로 쩍 벌어졌다.
서량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좆 된 것 같은데?”
* * *
“여긴 어쩐 일이오?”
“거참, 내가 뭐 못 올 데 온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인상을 쓰시나?”
“인상 쓴 적 없소. 그리고 지금 삼공자의 모습을 보시오. 마주하는 사람이 긴장을 안 하게 생겼는지.”
고구의 말마따나 서량은 제법 살벌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흑색 무복 위에 걸친 백색의 장포. 잘 연마된 체격이 어울리는 훌륭한 차림새였다.
문제는 그의 무장이었다. 요대 우측에는 칠야도를 찼고 등허리엔 유성쌍도, 등에는 길이만 다섯 자에 달하는 용린도까지 차고 있었다.
그야말로 인간 병기 창고나 다름이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어디 전쟁이라도 하러 가는 줄 알 것이다.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언제 어느 때나 방심하지 말자는 주의라서.”
“…….”
“그냥 그런 줄 알면 돼.”
“그 대단한 무공에 칼이 무겁진 않으실 거요. 다만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 등 뒤의 칼은 옆에 세워 두는 게 어떻소?”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손에는 착착 감기는데 앉을 때는 영 거치적거리더라고.”
용린도를 한옆에 세워 둔 서량이 의자에 앉았다.
고구가 용린도를 힐끔거렸다.
“중병(重兵)을 다루시오?”
“꽤 하지?”
“몰랐소.”
“앞으로도 쭉 몰랐으면 좋겠군. 왠지 당신이 나에 대해 많이 알수록 피곤해질 것 같거든.”
꽤 하는 정도가 아니다.
이천상이 한 수 가르침을 내려 준다면서 네 자루의 칼 중 하나를 뽑으라 했을 때 서량은 망설임 없이 용린도를 골라 들었다.
저 무거운 용린도를 반나절 동안이나 휘두른 것이다. 그것도 단 한 번의 공격도 성공시키지 못할 차원이 다른 강자를 향해서.
의식해서 뽑은 게 아니었다. 아니, 의식할 틈도 없었다.
말하자면 본능이다. 지금 그의 육신은 용린도 정도의 무게가 되어야 육체의 힘을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 만큼 단련되었다는 뜻이었다.
아마 같은 상황이라면 지금의 그는 반나절이 아니라 한나절 동안이라도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뭐, 잡설은 이만하도록 하고 얘기나 좀 하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오. 무슨 일로 오셨소?”
“들었지? 마검가주 앞에서 난장 부린 거.”
“들었소. 아찔하더군.”
“잘 마무리된 것도 들었고?”
“칼부림이 나지 않았다고 마무리가 잘된 건 아니외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왜? 마음에 안 들었나?”
“물론이오. 삼공자는 너무 성급했소. 게다가 그 애매한 질문은 무엇이오?
차라리 그 자리에서 만인에게 공표했다면 모를까, 어중간한 질문으로 오히려 진범에게 경각심만 주었잖소.”
“이 양반이 미쳤나? 만인 앞에서 진범의 죄목을 공표해? 나 바보 만들 일 있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애초에 그리 나서선 안 되었단 말이오. 삼공자의 발언으로 진범은 더더욱 몸을 사릴 것이오.”
“반대로 이점 역시 있지.”
“이점?”
“진범이 최악의 상황에 몰려도 우리는 마검가를 적으로 돌리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
“……!”
“마검가주 정도가 되면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신교에서, 심지어 그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가주는 대답했다.
자식이기에 더더욱 봐주지 않을 거라고.”
“…….”
“보는 눈이 있어서라도 진범을 옹호하지 못할 거야. 최소한 대놓고 움직이진 못하겠지. 왜? 체면이 무너지니까.”
서량이 차갑게 웃었다.
“체면은 곧 세력의 흥망성쇠를 결정짓는 열쇠다. 나는 마검가주가 장남 하나 살리기 위해서 가문까지 말아먹을 벽창호라고 생각하지 않아.”
고구의 눈이 흔들렸다. 이제야 서량이 왜 그리 성급하게 굴었는지 깨달은 것이다.
“삼공자의 의도는 알겠소. 하지만 그것은 진범의 덜미를 잡고 나서의 문제요.
증거도 없이 몰아붙이기만 하면 오히려 분노한 마검가주의 검이 우리를 노리게 될 것이오.”
“뭐, 그 말도 맞지.”
“달리 복안이라도 있으시오?”
“복안은 없고, 이제 한 가지는 확실해졌지.”
“그게 무엇이오?”
“파순제 동안 진범을 잡지 못하면 마검가주는 영원히 나를 고깝게 볼 거라는 사실.”
“……!”
“그러니까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범을 잡아야 해. 어때? 이제 똥구멍이 좀 시큰시큰해졌나?”
“마검가주가 삼공자를 고깝게 보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고구가 한숨을 쉬었다.
“삼공자는 정말 피곤한 사람이오.”
어차피 한 배를 탄 상황이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서로를 지켜 줘야만 한다. 그래야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사기는 확실하게 올려 주잖아. 앞으로 긴장 빨고 움직이자고.”
“그 얘기만 하려고 예까지 오신 건 아니라고 생각하오. 날 찾아온 다른 이유가 무엇이오?”
“본론 좋지. 그 전에!”
“또 뭐요?”
“사람 하나를 더 불렀는데 괜찮겠지?”
“사람을 부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그때, 문밖에서 사박사박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고구의 눈이 흔들렸다. 발소리가 아니라 은근하게 풍겨 오는 기도로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린 것이다.
“삼공자…….”
“들어오십쇼!”
덜컥!
문이 열리고 소연심이 들어왔다.
평소의 온화한 미소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무표정한 소연심의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히 입 한 번 떼지 못할 만큼 싸늘했다.
서량이 헛기침을 했다.
“두 분, 서로 잘 알지요? 인사 나누시지요.”
소연심의 투명한 안광에 고구가 담겼다.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를 보던 고구가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에 뵙소.”
“얼추 이 년 만이로군요.”
“설마하니 삼공자가 소 원주까지 불렀는지 몰랐소.”
“탐탁지 않은 것 같군요.”
“…….”
“나는 기뻐요. 당주가 직접 도움을 요청했다면 더더욱 기뻤겠지만요.”
고구가 고개를 저었다.
“소 원주를 뵐 면목이 없소.”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래서 직접 왔잖아요? 이 불편한 관계를 씻어 내기 위해서요.”
사전에 범죄를 막지 못한 거야 그럴 수 있다. 애초에 그 일은 환희원의 잘못이었고, 호법원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애먼 사람을 잡아들인 것은 전적으로 형법당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려 죽은 그 마인은 삼 년 전까지 환희원에서 일했던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형법당의 잘못된 수사로 인해 환희원은 식구를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큰 곤욕까지 치러야 했다.
고구가 서량을 바라보았다.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소?”
“그러려고 했는데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관계를 생각하면 다소 과했다는 건 알지만 이번은 그냥 넘어가 줘.”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결정적으로 소 원주 역시 어느 정도 진범의 윤곽을 잡은 상태야. 직접 찾아내려고 동분서주 중이셨거든.”
“……!”
“이만큼 능력 좋은 분을 어디서 또 찾겠어? 그럴 바에야 힘을 합쳐서 진범을 하루빨리 잡아다 족치는 게 낫지. 안 그래?”
고구가 한숨을 쉬었다. 오늘따라 유독 한숨을 많이 쉬는 그였다.
“알겠소.”
“좋아.”
그렇게 신교의 세 거물이 한자리에 모였다.
“일단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 전에, 제가 이곳으로 온 이유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군요.”
서량은 한 시진 전에 있었던 일을 두 사람에게 알려 주었다.
소연심은 물론 고구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삼공자를 습격하다니? 하물며 신교 본단에서?
“정확히는 날 노린 게 아니라 동필이를 노린 거였지만요.”
서량이 진지하게 말했다.
“동필이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나는 동필이가 어떤 놈이지 잘 알아요.
그놈, 워낙 고지식해서 꺼리는 사람들은 있어도 어디 가서 원한 같은 걸 살 놈은 아닙니다.”
소연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해요.”
사적인 친분은 없지만 호법원의 삼 조장이었던 고수다. 마동필의 성격, 성향은 소연심도 제법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의문의 고수는 동필이를 노렸어요. 차라리 날 노렸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해 보진 않았을 겁니다.”
“공자님 말씀은, 마 호위를 노린 의문의 고수가 실제로는 그에게 원한이 없을 거라는 뜻인가요?”
“똑똑하고 눈치 빠른 사람과 대화하면 이래서 편한가 봅니다.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마 호위의 성격은 저도 알고 있지만 사람 사이의 원한은 어떤 이유로라도 생기게 마련이에요.”
“원한이 있었다면 더더욱 저를 노렸어야 했습니다.”
“왜죠?”
“제가 동필이보다 강하니까요.”
“…….”
“동필이보다 강한 나부터 처리하고, 그 이후에 동필이를 처리하는 게 더 확실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단순한 신법 속도만 봐도 내가 동필이보다 훨씬 더 빠른데 말입니다.”
소연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문의 고수가 서량의 무위를 몰랐다는 가정은 필요치 않다. 굳이 무공이 아니더라도 서량은 영향력이 있는 인사였다.
마동필을 그리 죽이고 싶었다면 서량부터 처리하는 게 옳다.
“하여 의문의 고수가 누구인가를 고민하는 것보다, 그자가 노리는 게 무엇인지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답을 얻으셨나요?”
“예.”
“어떤……?”
서량이 문을 향해 소리쳤다.
“동필아!”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마동필이 들어왔다.
그가 요대에서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 검을 본 고구와 소연심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그 고수가 동필이를 습격할 만한 이유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묵왕검.
신교오대마검이자 강호십대마검으로 꼽히는 희대의 마병.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그리고 전 이 사태가 진범을 잡는 일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