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신교의 무법자 (4)
“시작된 것 같소.”
“그렇군요.”
“원주는 여기 있어도 괜찮겠소? 명일 대회의 문제로 환희원이 한창 비상이라던데.”
“괜찮아요.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그렇군.”
“그리고…….”
소연심의 눈에 살기가 맺혔다.
“봐야겠어요, 진범이 꽁꽁 묶이는 꼴을.”
“어차피 지금 진범을 잡아도 구금만 시켜 놓을 거요. 진범의 죄목을 만천하에 뿌리는 날은 내일이오. 바로 그때, 진범의 손목에 금해철이 채워질 거요.”
말을 하면서도 고구는 떨떠름했다.
“물론 그전까지 증거란 증거는 전부 수집해야겠지만.”
이것은 말하자면 함정 수사다. 하지만 물증이 없으니 일단 잡아넣은 후, 제대로 된 증거들을 하룻밤 동안 찾겠다는 뜻이었다.
만약 그래도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바로 그때 서량이 나서기로 했다.
고구가 서량의 계획에 치를 떨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이 망할 삼공자는 함정 수사는 물론이거니와 파순제라는 축제 자체를 이용하려 들고 있었다.
그것도 교주 면전에서.
‘하기야, 애초에 신교 소속이 아닌 자를 두고 함정 수사를 벌이겠다는 것 자체가 문제지만.’
마음 같아선 서량의 두개골을 쪼개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법의 경계선을 넘나들다 못해 그냥 불법의 늪으로 쑥 들어가 버릴 생각을 어찌 떠올릴 수 있었는지.
“고로 진짜 결판은 내일 날 거요.”
“상관없어요. 몇 번이라도 보고 싶은 광경이니까요.”
지그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고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당주는 괜찮겠어요?”
“무엇이 말이오?”
“결정적인 순간에 들이닥쳐 범인만 체포한다…… 일견 얄미워 보일 수 있지만,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 그 공(功)은 전부 삼공자가 가져가게 될 텐데요.
반면 형법당의 위신은 제법 떨어질 거고요.”
“형법당은 사전에 범죄를 막는 조직이 아니라 일어난 범죄를 수습하고 형벌을 내리는 조직이오. 항상 우리가 하던 일이니 이제 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소.”
“하긴 그도 그러네요.”
“그리고…….”
고구가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죄인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수많은 당원이 포음막(捕音幕)을 둘러친 그곳을.
“사실이잖소? 삼공자가 공(功)을 세운 것은.”
“…….”
“공 이전에 삼공자도 잡아넣어야 하는 게 아닌지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겠지만.”
* * *
쩌어어어엉!
괴인의 무지막지한 수공에 마동필이 연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상대의 무공은 막강했지만 그 역시 충분히 강해졌기 때문이다.
파박!
절묘한 보법으로 충격을 흐트러트린 마동필이 전진하며 묵왕검을 휘둘렀다.
후퇴와 정지, 전진까지의 동작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빨랐다. 낭비되는 힘은 하나도 없었고 내력의 흔들림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퍼어엉!
마동필이 주춤거렸다.
보법과 검법의 연환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다.
실력을 떠나 내공의 격차가 너무 컸다. 손짓 한 번에 태풍이 일고, 발길질 한 번에 바위도 날려 버린다. 숫제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역시, 마동필은 당황하지 않았다.
절묘한 무게 중심으로 다시 자세를 잡더니 일순 엄청난 쾌검으로 괴인의 목을 노린다.
치리리링!
묵왕검과 팔뚝이 부딪쳤는데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엄청난 검기공!’
단순한 수검(手劍) 정도가 아니다. 손을 넘어 한쪽 팔 전체가 신병이기처럼 단단하다. 전신의 내력을 팔 하나에 집중시키니, 묵왕검에 부딪치고도 긁힌 상처 하나가 없었다.
우우우웅!
괴인의 팔에서 시퍼런 광채가 뿜어졌다.
‘온다.’
파아아악!
번개처럼 휘두르는 수검이 거대한 청색의 검기를 만들어 냈다.
마동필의 눈이 흔들렸다.
초승달처럼 날아오는 검기의 위압감이 엄청났다. 속도도 속도였지만 그 검기에 집약된 진기의 밀집도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방어는 불가능하다. 이건 무조건 피해야만 했다.
마동필이 허공 높이 뛰어올랐다.
퍼석!
쏘아진 검기가 대지에 거대한 검흔을 새겨 놓았다.
단단한 땅을 한도 끝도 없이 뚫고 들어간 검기다. 어찌나 예리한지 소음도 거의 없었다.
마동필의 판단은 정확했다. 만약 이 검기를 막았다간, 묵왕검은 멀쩡했어도 최소한 그의 두 팔은 잘려 나갔을 것이다.
번쩍!
괴인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높이 떠오른 마동필의 몸은 허점투성이였다. 허공답보를 구사할 수 있는 초절정고수가 아니고서야 누구라도 허공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치이이잉!
괴인의 팔에 작은 초승달 십여 개가 생성되었다. 십여 개의 검기를 일시에 쏘아 내 마동필에게 치명상을 안겨 주기 위함이었다.
그때, 묵왕검에 푸른 마기가 일렁였다.
괴인의 진기보다 어둡고 탁한 마기는 바로 마동필의 검기였다.
“단혼, 귀천.”
촤아아아악!
마동필의 비기는 괴인의 검기와 상당히 흡사했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괴인의 검기보다 작은 대신 두텁고 단단하다는 느낌을 준다는 정도?
괴인이 팔을 휘둘렀다. 저 검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그때였다.
퍼퍼퍼퍼펑!
괴인의 몸이 주춤거렸다.
“여럿이서 한 놈 두들겨 패는 거, 별로 마음에는 안 들지만 말이야!”
어느새 나타난 위홍련이 광기 넘치는 웃음과 함께 재차 포아검을 휘둘렀다. 괴인이 피할 수 있는 방위를 향한 공격이었다.
그 사이 마동필의 검기는 괴인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콰아앙!
폭음이 일었다.
괴인의 검기와는 달랐다. 마동필의 검기 역시 충분히 날카로웠지만 그의 무공 자체가
예리함보다는 단단하고 묵직한 쪽으로 특화되었기 때문에 굉음도 요란했다.
파아악!
위홍련이 마동필의 옆으로 다가왔다.
“잡은 건가?”
“그럴 리가.”
“시발, 역시 그렇지? 저 새끼 몸뚱이가 만년한철만큼 단단하던데.”
“그렇소.”
“그나저나 너, 언제 이렇게 강해졌냐? 그거 다 그 검 때문이지? 그렇지?”
지잉!
자욱한 먼지 안쪽에서 시퍼런 광채가 이글거렸다.
마동필의 눈이 번뜩였다.
“한가하게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오!”
훅!
먼지를 뚫고 쏘아진 두 줄기 검기가 마동필과 위홍련을 노렸다.
퍼어어어엉!
“크윽!”
“우웨엑!”
마동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보다 다섯 걸음이나 더 물러난 위홍련은 피까지 토했다.
단 일격을 막은 것만으로도 이 지경이다. 예리함이니 무거움이니 하는 걸 떠나서, 내공의 수준이 달랐다.
‘깨달음마저도 억눌러 버리는 힘! 내공의 질과 양이 압도적이라면 몇 수 위의 고수라도 위험해지는군.’
푸스스스.
먼지를 걷어 내며 걸어오는 괴인.
어느새 그의 손에서 푸른 광채가 일었다. 이전보다 더 강하고 예리한 검기였다.
“시, 시발! 저거 도대체 어떻게 된 새끼야? 내공이 무한대라도 되는 거야?”
피까지 토해 놓고도 잘도 외쳐 댄다. 아직 살 만하다는 증거였다.
척.
괴인이 살짝 상체를 수그렸다.
마동필의 눈이 흔들렸다. 상대가 처음으로 자세다운 자세를 잡은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적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묻어 나온다. 그 필살의 의지 너머, 숨길 수 없는 탐욕이 일렁였다.
그리고 그 탐욕이 향하는 곳에 묵왕검이 있었다.
파악!
괴인이 움직인다 싶은 순간 마동필도 검을 휘둘렀다.
놀랍게도 그가 구사하는 것은 그가 지닌 최고 절학이 아니라 호마검식이었다.
호법원의 기본 검공인 호마검식.
물론 그 자체로 일류라 불릴 만하나 생사결에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무공이었다.
그러나 마동필이 호마검식을 쓰는 이유가 있었다.
퍼퍼퍼펑! 쩌어엉!
검기와 검기가 부딪치고.
퍼어어억!
재빨리 위홍련을 들쳐 멘 마동필이 괴인을 걷어차며 그 힘의 반동을 이용, 순식간에 오 장 거리를 벌려 놓았다.
‘역시.’
경지가 올라가며 무공을 바라보는 시야도 한층 자유로워졌다.
호마검식은 뛰어난 절학은 아니지만 적어도 방어에 있어서는 절정의 검술이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반격 초식도 훌륭하며, 적의 공격을 받아 내고 신체의 자유를 도모하는 데에 특화가 된 검식이었다.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그렇다면…….’
번쩍!
묵왕검에서 푸른 마기가 일렁였다. 어둡고 탁했지만 은은하게 흐르는 그의 검기는 심해를 연상케 했다.
‘지킨다.’
꽝!
마동필이 울컥 피를 토해 냈다.
다행히 생각보다 큰 내상은 아니었다. 호마검식으로 괴인의 공격을 절반 가까이 튕겨 냈기 때문이다.
‘된다. 가능해. 하지만…….’
콰릉!
‘공자님.’
퍼어억!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소연심이 초조한 듯 물었다.
“도대체 삼공자는 언제 오는 거죠? 본래라면 진즉에 개입해서 저놈을 제압했어야 정상이잖아요.”
고구가 침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급하게 어딘가를 다녀오겠다는 서신을 보냈소. 얼마 안 걸린다고 했으니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라고 했소.”
“……제길!”
“믿어 봅시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아니잖소?”
다시 한번 폭음이 일었다.
콰르릉!
마동필과 위홍련이 연신 뒤로 물러났다.
고구와 소연심의 참전을 바랄 수는 없었다.
만약 이 일에 교의 수뇌부들까지 얽혔다는 게 알려지면 그때 마도 무림의 정세는 혼돈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집무실에서 업무 중이라고 허위 정보까지 흘리지 않았는가.
괴인을 놓치게 되는 최악의 상황.
두 사람은 바로 그때 움직일 것이다. 말하자면 예비 병력이라고나 할까.
물론, 모두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일에 예비 병력이 나서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을 것임을.
“카아악!”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괴인의 괴성이 포음막에 부딪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앞에 선 마동필과 위홍련에겐 실로 엄청난 위협이 되었다. 괴인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그때였다.
퍼어어어엉!
강한 충격파와 함께 괴인의 몸이 삼 장이나 뒤로 날아갔다.
두 사람의 혼신을 다한 합공으로도 고작 주춤하게 만든 게 전부인 걸 생각하면 허탈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괴인을 물러나게 만든 부드럽고도 강력한 무공. 그 무공의 이름은 금라신장이라 하였다.
마동필의 얼굴이 밝아졌다.
“공자님!”
“호위 대상에게 보호받는 호위무사 역할 안 지겹냐?”
“……면목이 없습니다.”
“장난이야, 인마.”
저 멀리서부터 저벅저벅 걸어오는 서량.
펄럭이는 장포 아래 자리한 한 손에 용린도를 쥐었다. 이미 그의 용린도에는 시뻘건 구유마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어떤 병신한테 뭣 좀 얻어 오느라고.”
휘이이이이잉!
용린도 주변으로 거센 바람이 모여들었다.
마동필의 눈이 커졌다.
“고, 공자님! 설마 죽일 생각이십니까?”
“미쳤냐? 저놈 죽이면 우리가 지금까지 발품 판 게 뭐가 되겠냐? 절대 안 죽여.”
“하지만 그 도법은…….”
도법의 이름은 몰라도, 저 지독한 칼바람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저 엄청난 도풍(刀風)에 맞으면 어떤 고수라도 무사할 수가 없다.
“그래서 문제지.”
“예?”
서량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그래서 너희가 그렇게 밀린 거야. 이 정도가 되지 않으면 저놈을 제압할 수가 없으니까.”
“……!”
쾅!
강하게 진각을 밟는 서량의 몸에서 웅혼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 충격에 위압감을 느낀 것일까? 어느새 일어난 괴인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냈다.
서량이 씨익 미소 지었다.
“이차전 준비는 끝났나, 또라이?”
괴인, 지영현이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
“발성 좋고!”
콰르르릉!
불같은 적도(赤刀)와 시린 청검(靑劍)이 정면으로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