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신(神)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자 (4)
“한 잔 받게.”
“……영광이옵니다.”
쪼르르.
호박색 액체가 절묘한 곡선을 그리며 빈 잔을 채웠다.
자욱하게 흐르는 주향이 몹시 향긋했다.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 지운회였지만 이번만큼은 술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만큼 주향이 고왔고, 그만큼 마음이 심란했다.
“마셔 보게.”
지운회가 공손하게 몸을 돌려 술을 마셨다.
확실히 육천심주는 명주(名酒)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독한 술이었지만 오히려 몸을 보(保)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좋은가?”
“매우 좋습니다.”
“그럼 됐네.”
이천상이 자신의 잔을 채웠다.
지운회에게 내린 육천심주를 자신이 따라 마신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행동이 지운회에게 격동을 선사했다. 자신의 것이 된 술을 이천상이 마시는 것 자체가 감동 아닌 감동이었다.
“누구한테 들었나?”
알고 계셨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솟구쳤다. 왜 말을 안 해 주셨냐는 원망 어린 마음도 들었다.
그런 부덕한 마음이 혹시라도 들킬까 두려워 지운회는 고개를 숙였다.
“삼공자에게 들었습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전에서 제법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는 보고는 들었지.”
사소한 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지만 그건 이천상을 단순히 권력에 찌든 위정자로 보는 것이다.
그는 신교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모조리 알고 있었다. 어떤 일이 언제, 어디서 벌어졌는지 하나하나 그의 귀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천상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셋째를 데려오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이천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잠시 후.
쿠구궁!
묵직한 소리와 함께 대전의 문이 열리고 서량이 들어왔다.
이십 보 밖에 선 서량이 고개를 숙였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이리로.”
서량이 힐끔 지운회를 바라보았다.
지운회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천하의 서량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한 잔 받겠느냐?”
“괜찮습니다.”
순간 지운회의 눈이 흔들렸다.
감히 교주가 술을 준다는데 그걸 마다하다니? 저런 간 큰 사람이 세상천지에 또 어디 있을까?
더 놀라운 것은 이천상의 반응이었다.
“마실 기분이 아닌 모양이군. 게 앉거라.”
“예.”
서량이 지운회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천상이 지운회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용기를 냈더군.”
“예?”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그리 나서기도 쉽지 않지. 자네답네.”
지운회답다고 말했지만 정작 이천상답지 않은 발언이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운회가 당황하여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저는 그저…….”
“묻겠네.”
“…….”
“어떻게 처리하고 싶은가?”
지운회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짧은 물음이었지만 이천상의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아비로서 무도한 죄를 저지른 자식을 어찌 처리하고 싶으냔 말이었다.
서량이 돌발적으로 질문했을 때와는 상황도, 마음도, 무게감도 다르다. 지금 질문을 한 사람은 끝없이 펼쳐진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하고 무서운 절대자였다.
“……사적으론 제 아들이지만 이미 그는 교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제 손을 떠난 문제라고 사료되옵니다.”
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천마신교에서, 아니 마도 무림에서 이천상의 말은 곧 법이다. 그가 지강현을 제자로 받겠다 공표했으니 자신은 더 이상 아들의 일에 관여할 수가 없었다.
교주의 제자에게 관여한다는 것은 곧 교주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검가주.”
“예, 교주님.”
“이 내가, 두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게 만들 참인가?”
“……!”
지운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용서를……! 저는 그저…….”
“어찌하고 싶나? 대답하게.”
도대체 교주님께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인가?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던 지운회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교주님의 의중을 떠보려는 것 자체가 부덕한 짓이며, 알려 해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리라.
“제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곤 하나 자식은 자식입니다. 세상천지에 자식을 품어 줄 사람은 부모밖에 없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저는 마검가주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엄격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운회가 눈을 감았다.
“지은 죄에 합당한 형벌을 내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자네의 진심인가?”
“그렇습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네.”
“송구하옵니다.”
“자네 말마따나 그 아이는 나의 제자가 되었네. 자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떨어진 셈이지.”
“…….”
“하나 자네의 진심을 외면하고 싶지 않군. 본교의 여덟 번째 제자는 아무도 모르게 내 직접 처리토록 하겠네.”
이천상이 술병을 그의 앞에 놓았다.
“가져가게.”
“교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면 소신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이천상에게 절을 올린 지운회가 공손한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물러나기 전 서량을 힐끔거렸지만, 서량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지운회가 사라진 자리에 이천상과 서량, 둘만이 남았다.
스르륵.
어느새 이천상의 손에 새로운 술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허공섭물로 어딘가에 있는 술을 가져온 것이다.
“받거라.”
마시겠냐고 권하는 게 아니라 받으라는 명령이다.
서량이 잔을 들었다.
그의 잔을 채워 주며 이천상이 물었다.
“무엇을 느꼈느냐.”
“예?”
“나와 마검가주와의 대화에서 무엇을 느꼈느냔 말이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실망이군.”
“…….”
“마셔라.”
서량이 잔을 비웠다.
이천상이 다시 그의 잔을 채워 주며 물었다.
“마검가의 삼남은 아직 형법당에 있느냐?”
역시 이 양반은 알고 있었군.
“그렇습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용케 제압했군.”
“어떻게든 잡았어야 했습니다.”
“이유는?”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가?”
“예.”
“왜지?”
서량의 눈이 빛났다. 지금껏 이천상 앞에서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강단 넘치는 안광이었다.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그리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냥 제 마음이 그렇게 시켰습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은 마음에 드는군.”
“……?”
“쓸데없는 이유에 되먹지 못한 미사여구를 덕지덕지 붙인 대답이었다면 또 한 번 실망했을 것이다.”
실망하든가 말든가.
지금 서량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이천상의 감상 따위가 아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어떻게 알고 있었느냐고?”
“아닙니다. 알고 계셨으면서 왜 가만히 두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최측근인 대호법조차 이천상의 진면목을 모른다. 그리고 그가 부리는 숨겨진 마인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적어도 신교 내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걸 이천상이 아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진범을 알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 말 않고 있었던 이유는 궁금했다.
한 마인이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었다. 그리고 그 마인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이천상을 위해 기도하며 겸허히 생을 마감했다.
진범이 누군지 알고 있었으면서 왜 이천상은 이 일을 해결하려 들지 않았을까?
“이유가 궁금했다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네가 방금 내게 했던 말에 그 답이 있다.”
자신의 대답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서량이 순간 얼굴을 굳혔다.
-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냥 제 마음이 그렇게 시켰습니다.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네 마음에 드는 이유는 아니었던가?”
“…….”
“상관없다. 나는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를 쓰는 존재가 아니다.”
이천상의 눈이 투명해졌다.
“그리고 그건 그 마인도 마찬가지였지.”
“……예?”
“억울하게 죽은 그 마인은 죽는 순간까지 나를 위해 기도했다. 그가 과연 무언가를 바라고 내게 기도했을 것 같으냐?”
“……?”
“오명을 씻어 주길 바랐을 것 같더냐? 사후 세계에서만큼은 평온히 살게 해 달라 빌었을까? 그렇지 않다.”
“…….”
“그는 그저 나를 위했을 뿐이다. 인생을 바쳐 믿고 따랐던 한 신(神)의 안녕을 바란 게 전부지. 거기에 다른 의도는 없었다.”
“……!!”
“대가를 기대하는 충성과 신심(信心)은 부정하다. 불순한 것이지. 그 마인은 자신의 오명 따위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위한 게지.”
이천상이 자신의 잔을 채웠다.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살짝 음영이 진 그의 눈가에서 왠지 모를 씁쓸함을 본 것은 서량의 착각이었을까.
“억울하게 죽은 그 마인을 위해 화를 내는 것은 오히려 그의 신심을 더럽히는 짓이다.”
“…….”
“그래서 난 신(神)이라 불리는 것이다. 신은 억울함을 풀어 주는 존재가 아니야.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도 족하지.”
“하지만 교주님은…….”
서량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스스로 신이라 칭하는 사내에게 넌 사람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가 꺼림칙했다.
놀랍게도 이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난 사람이다. 사람이지만 신으로 불리지. 그렇다면 나 역시 신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노력이란 단어는 정말이지 이천상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과 같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힘도, 성격도, 그리고 저 존재감도.
가만히 그를 보던 서량이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따라 주십시오.”
이천상은 당연하다는 듯 그의 잔을 채웠다.
잔이 채워지는 것을 보며, 서량이 말했다.
“궁금한 거 하나만 더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허락한다.”
“마인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지 않은 이유는 알겠습니다. 아니, 이해는 못 하겠지만 머리로는 알았어요.”
“한데?”
“그렇다면 마검가주의 장남은 왜 제자로 받아들이신 겁니까? 굳이 억울함을 풀어 줄 필요가 없었듯, 그놈을 제자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지 않으셨습니까?”
“틀렸다. 그놈을 제자로 받아들일 필요는 충분했다.”
필요가 있었다고?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본교를 위한 재료로써, 놈은 필요했다.”
“재료요?”
“그렇다.”
“무슨 재료요?”
“설명해 주고 싶지 않다.”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하긴, 이리 많은 질문에 답해 준 것만으로도 어딘가.
이천상이 잔을 비웠다.
“그러나 설명해 주마. 너 역시 이 일에 얽혀 있으니.”
이 일에 얽혀 있다고? 아, 마검가와 얽힌 거?
이천상이 한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강력한 힘의 흐름이 느껴졌다.
쿠구구궁!
거친 소리와 함께 몇 개의 상자가 허공을 날아 태사의 옆으로 떨어졌다.
순간 서량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알아보겠느냐?”
“어…… 그러니까…… 음…….”
“습격자들의 손에 들어갈 뻔한 상자들이다. 너 역시 그 자리에 있었으니 알고 있을 테지.”
‘……걸렸다.’
좆 됐네, 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