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부서지는 껍질 (1)
“일어나시자마자 반주를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주무시지 않고 지금까지 드시는 겁니까?”
호요성의 깜찍한 물음에도 이천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와 좀 다르시군.’
밥은커녕 안주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 이천상이 오늘은 제법 술상다운 술상을 깔았다.
외양의 변화도 컸다. 앞섶을 환히 드러내던 평소와 달리 무척 깔끔한 복식을 선보였다. 대충 어깨에 걸쳐 놓곤 했던 곤룡포도 제대로 입었다.
태산 같은 위엄과 하늘에 닿을 듯한 고고함이 동시에 전해져 온다. 팔 척 거구임에도 전혀 둔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공간을 꽉 채우는 존재감을 자랑했다.
고대 대륙의 왕국들을 석권하여 대제국을 세운 황제의 풍모가 이와 같을는지.
이천상의 고귀한 자태에 호요성은 눈이 부신 것을 느꼈다.
물끄러미 이천상을 보던 호요성이 넉살 좋게 말했다.
“저도 한 잔 주시겠습니까?”
“이리로.”
한옆에 놓인 빈 잔을 채워 주는 이천상.
호요성이 고개를 숙이곤 잔을 비웠다.
“오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 오기로 했네.”
“손님이요?”
천하의 이천상 입에서 ‘손님’이란 말이 나오다니.
“누굽니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호요성은 솔직하게 물었다.
재차 그의 잔을 채워 준 이천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비궁주(秘宮主).”
“……!”
호요성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이천상과 전대의 몇몇 마인들을 제외하면 비궁주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그리고 신교의 총군사인 호요성은 그 두 사람 중 한 명일 수밖에 없었다.
“비궁주가…… 직접 말입니까?”
“그렇다네.”
“어떤 심경의 변화이기에?”
“만나자고 하더군. 오라고 했네.”
“……과연 대단하십니다.”
이천상은 두말할 것 없는 신교의 주인이다.
하지만 그런 교주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게 바로 비궁주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역대 어떤 교주들도 비궁주를 마신궁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무력, 통치력 등 여러 면에서 최고라 평가받았던 칠 대 천마도 비궁주를 존중했다.
비궁주의 무공이 교주를 뛰어넘는 것도, 교주를 견제할 만한 어떤 수단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비궁주는 존중받아 마땅할 위치에 있었다.
교주가 양지(陽地)에 있다면 비궁주는 음지(陰地)에 있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비궁주가 어쩐 일로 교주님을 뵙자고 한 것일까요?”
“글쎄.”
“모르십니까?”
“궁금하지 않네.”
참으로 이천상다운 대답이라고 호요성은 생각했다. 비궁주에게 달리 악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 정말 신경 한 톨 쓰지 않는 것이다.
호요성이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그러다가 비궁주가 화를 내면 어쩌시려고요?”
“화를 내든 슬퍼하든 그건 그녀의 자유일세.”
“그건 그렇습니다만.”
“다만 내 앞에서 추태를 부린 이후의 결과 역시 그녀가 안고 가야 할 책임이겠지.”
호요성은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자신을 보자고 한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는 것처럼, 비궁주가 무슨 짓을 하든 관심이 없다.
하나 혹시라도 비궁주가 심기를 거슬리게 하면, 이천상은 두말없이 그녀를 끌어내릴 것이다.
‘역시 무서운 분이야.’
교주가 비궁주를 존중하는 것은 상징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천상에게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미 스스로가 천마신교 그 자체이기 때문에.
“비궁주가 들으면 섭섭해하겠습니다.”
“그런가.”
여전히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말투다.
호요성은 피식 웃었다.
“교주님의 관심을 끌 만한 주제를 꺼내 볼까요?”
“…….”
“약 이각 후, 삼공자가 교를 나설 것입니다.”
무심하기만 하던 이천상의 눈에 흥미가 일었다.
호요성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비궁주가 이 모습을 보면 더 섭섭해할 거란 말입니다, 교주님.’
만약 그 생각을 말하면, 섭섭해하는 것 또한 그녀의 자유라고 말씀하시겠지만.
“광마대를 호위 부대로 차출했더군.”
“그렇습니다. 일손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이 일에 딱 맞기도 하지요.
아시잖습니까? 광마대가 어떤 부대인지. 어지간한 분란은 광마대의 악명만으로 무마될 겁니다.”
근래 좀 치이기는 했지만 광마대는 명실공히 천마신교 최악의 부대였다.
실제 임무지에서 광마대가 얼마나 무서운 모습을 보여 주는지 수뇌부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천상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조합을 잘 짰군.”
“역시 그렇지요?”
“어쩌면 광마대가 셋째를 말려야 할 순간이 올는지도 모르겠네.”
다른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의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호요성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잔을 비운 이천상이 물었다.
“자네도 보았나?”
“본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보았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사가는 녀석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걸세.”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가문의 장남인 홍위문을 폐인으로 만들었고, 딸인 홍여린도 창피를 당했다.
홍위문은 여전히 신교에 남아 치료 중이지만 홍여린은 파순제가 끝나자마자 휴가란 명목으로 가문과 함께 돌아갔다.
아마도 지금쯤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 터였다.
특수감찰사로 삼공자가 내정되었다는 것을 알렸으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량을 철저하게 망가트리려 들 것이다.
물론 이천상의 개입 정도를 계산해 보겠지만.
“교주님.”
“말하게.”
“만약…… 삼공자가 그들에게 당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이천상은 전혀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잔을 따랐다.
“교주의 제자를 죽였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 좋은 명분이 되지.”
호요성은 생각했다. 마도 무림, 어쩌면 전 무림에서 명분이란 것을 가장 하찮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니 오히려 더욱 무섭다고.
“하지만 셋째가 당할 거라곤 생각지 않네.”
“삼공자를 믿으시는군요.”
이천상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은 신뢰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마 호요성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하나였다.
“자네도 들어가 보았던 판마정에 셋째도 들였었지.”
“예, 들었습니다.”
“셋째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냈지만 모든 것을 알아내진 못했어.”
호요성의 눈이 흔들렸다. 삼라만상의 이치를 꿰뚫어 볼 것 같은 이천상이 아직 서른도 안 된 한 청년의 실체를 다 보지 못했다고 한다.
“녀석에겐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어.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는 자를 믿을 만큼 나는 맹하지 않네.”
“…….”
“이번 감찰로 인해 녀석이 숨기고 있는 무언가를 꺼내 놓았으면 좋겠군.”
물끄러미 이천상을 보던 호요성이 툭 던지듯 물었다.
“교주님께서는 저를 믿으십니까?”
“믿네.”
누군가에게 신뢰를 받는 것이 이렇게나 기분 좋으면서도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호요성은 처음 알았다.
“보고할 것이 더 남았나?”
“아닙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손님이 오셨네. 이만 가 보게.”
쿠구궁!
대전의 문이 열렸다.
* * *
“공자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앵화가 침을 삼켰다.
시커먼 무복 위, 평소 즐겨 입던 백색 장포가 아닌 붉은 장포를 걸친 서량의 모습은 은근히 위압적이었다.
요대 오른쪽에 찬 칠야도와 등허리에 걸친 유성쌍도, 그리고 등에 사선으로 맨 용린도에서 굉장한 박력이 풍겼다.
왼쪽 어깨에는 황금빛 수실로 ‘신교감찰장(神敎監察長)’이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진 견장도 찼다.
대충 풀어 헤친 머리카락과 어둡고 진한 복색이 평소 서량의 다소 가벼운 분위기를 완벽하게 지워 주었다.
그래서일까? 서량의 발치에 앉아있는 금호도 평소처럼 마냥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긴장감. 평소와 다른 흐릿한 눈빛.
앵화는 감히 서량에게 잘 다녀오시라 말을 건네기 힘들었다.
서량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공기가 차군.’
평소 기분 좋은 서늘함을 안겨 주던 새벽의 찬 공기가 오늘은 싸늘하게만 느껴졌다.
‘다시 이 공기를 느낄 수 있을까?’
서량이 눈을 감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일전 환희원의 수송대와 나섰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긴장감이었다.
‘……간다.’
적사가에서는 결코 자신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교주의 제자이니 쉽게 건드리진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두 손 놓고만 있지도 않을 것이다.
‘기회는 많지 않아. 어지간하면 적사가에서 작업을 끝내야 해.’
그리고 그 작업은 천하십대고수라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정교한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을 것이다.
서량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방 안에 익숙한 공기가 감돌았다. 지난 수개월 동안 숙식하던 방인 만큼 친근감이 느껴졌다.
‘정말로 떠난다고 생각하니 싱숭생숭하군.’
방을 둘러보길 한참, 그의 시선이 문득 앵화에게로 향했다.
앵화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왠지 공자님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새벽부터 이것저것 준비해 주느라 고생이 많았어.”
“아닙니다, 공자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
“아냐. 그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너에게는 하루하루 고마웠다.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속 편하게 지내진 못했겠지.”
앵화는 무언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평소의 서량과 달랐기에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그의 진심이 그녀의 감정을 흔들었다.
서량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책 두 권을 그녀에게 건넸다.
“받아.”
“네?”
“받으라고.”
앵화가 얼떨결에 책자를 받았다.
“펼쳐 봐.”
공자님의 말대로 책을 펼치자, 세세하게 주석을 달아 놓은 글자들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이것은…….”
“너도 소질은 제법 있는 것 같지만 뛰어난 무재(武才)라고 보긴 어려워. 대신 남들이 갖지 못한 꾸준함과 진지함이 장기지.”
“공자님?”
“네가 익히고 있는 내공심법은 안정적이지만 뛰어나진 않아. 그래서 준비한 거야.
본교에서 내로라하는 무공은 아니지만 어디 가서도 일류라 불릴 만한 무공이지.”
“무, 무공이요?”
“시간이 있었다면 직접 봐 주었겠지만…… 읽기 편하게 주석을 달아 놓았는데 어떨는지는 모르겠다.”
앵화의 눈에 서서히 습기가 차올랐다.
두 무공에 각기 주석을 달기 위해 서량도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다가오는 감동이 컸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녀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은 바로 불길함이었다.
공자님께서 왠지 이대로 훌쩍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실 것 같은 불안감에 그녀가 서량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평소에는 감히 생각도 못 할 행동이었다.
“공자님. 가지 마세요.”
“…….”
“다른 사람한테 임무를 넘기시면 안 되나요?”
서량은 씁쓸하게 웃었다.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감정. 앵화는 자신이 떠날 마음을 먹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전의 출교 때와는 분위기부터가 다르니까.
“차려 줄 사람 없다고 밥 굶지 말고.”
“…….”
“간다.”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아 봐야 서로만 힘들다. 서량은 냉정하게 방문을 나섰다.
연무장에는 흑색 무복을 입은 마동필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예, 공자님.”
그때 뒤에서 앵화가 소리쳤다.
“공자님! 꼭 무사히 돌아오세요!”
서량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는 무심하게 걸어 나갔다.
이윽고 대문이 열리자, 일곱 대의 마차와 전포(戰袍)를 입은 백여 명의 마인들이 살벌한 안광을 빛내며 도열해 있는 것이 보였다.
선두에 선 위홍련이 무릎을 꿇었다.
쿵!
“신교불패! 만마앙복! 외부감찰대리, 특수감찰사님을 뵙습니다!”
곧이어 광마대 이 조 조원들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특수감찰사님을 뵙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던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존명!”
서량을 시작으로 모든 마인들이 마차에 올랐다.
그렇게 일곱 대의 마차가 신교를 나섰다. 여전히 어둡기만 한 새벽 하늘은, 아침이 와도 그다지 밝아질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