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부서지는 껍질 (3)
홍상호의 얼굴은 실로 볼만해졌다.
슬쩍 그를 본 위홍련이 서량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감찰사님. 적사가를 먼저 감찰하라는 것은 교주님의 명이었사온데, 중간에 방향을 바꾸어도 되겠는지요?”
“누가 방향을 바꿔? 감찰할 것도 없다고 하잖아.”
“하면 보고서에 어떤 식으로 올릴까요?”
서량이 콧방귀를 뀌었다.
“상황 그대로 적어. 가내 공사라는 핑계로 호위 부대를 떼어 내려는 것을 보니 필경 본교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물며 가주가 아닌 이가주가 나왔잖아? 말 다 한 거 아냐?”
위홍련은 서량의 말을 넙죽 받았다.
“알겠습니다. 하면 보고서에 그대로 작성하여 바로 연통을 넣겠습니다.”
“음? 바로 보내게?”
“예. 감찰 호위로 몇 번 붙어 본 결과, 감찰 대상이 된 조직들은 부적절한 판정을 받은 경우 다소 위험한 행동을 보이곤 했습니다. 즉각 보고하여 혹시 모를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깜냥이나 되겠어? 수작 부리다간 개작살이 날 텐데 말이야.”
“이왕이면 쉽게 가는 게 좋지요.”
“뭐, 그건 위 대주 말이 맞군. 좋아, 보고서 작성 후 즉각 내전으로 쏴.”
“명을 받듭니다.”
미리 짠 것도 아닌데 대화가 척척 이어진다. 물 흐르듯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말에 홍상호와 적사가 마인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서량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오르려 할 때.
“잠깐!”
모두의 시선이 홍상호에게 쏠렸다.
홍상호가 애써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전혀 침착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감찰 대리께서는 진정하시오.”
특수감찰사라는 정식 직함이 있는데도 감찰 ‘대리’라는 명칭을 고수한다. 딱히 책잡기는 뭐하지만 위홍련은 기분이 나빴다.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뭐래.”
“아직 우리 쪽 사정을 다 들어 보지도 않으셨잖소? 중간에서 말을 끊고 감찰 대리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무슨 경우란 말이오.”
“내 경우다.”
“…….”
“그리고 뭔 말이 더 필요해? 두 눈에 흉흉한 마기를 잔뜩 피워 올리고 있었잖아? 너 같으면 대화 한 자락이라도 나누고 싶겠어?”
가문의 수장은 아니지만 수장 다음가는 권력자가 이가주다. 게다가 나이도 한참이나 많은데 꼬박꼬박 너란다. 심지어 가문의 무사들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였다.
속에선 천불이 났지만 홍상호는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다.
“훈련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소. 마기를 진정시키지 못한 수하들의 실책이오. 대신 사과하리다.”
“훈련?”
터무니없는 핑계에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그 말 사실인가?”
“……사실이오.”
쾅!
마차 문이 거세게 닫혔다.
서량이 뚜벅뚜벅 홍상호에게 다가갔다.
홍상호의 눈이 흔들렸다. 별다른 기세도 피우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오는 서량에게서 기이한 위압감이 풍겼던 것이다.
“이가주.”
“말씀하시오.”
“너희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 들어 볼 것도 없다 하는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들은 접어 두고.”
철컥.
서량이 칠야도의 칼자루에 오른손을 올렸다. 우측 요대에 채워져 있었기에 뽑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위화감을 조성하기엔 충분했다.
“교주님을 업신여기는 건가?”
“어,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게 아니면?”
찬바람이 쌩쌩 도는 서량의 얼굴에 은은한 위엄이 서리기 시작했다.
“네 말마따나 나는 감찰 대리다. 한데 감찰사를 맡은 나는 누구를 대신해서 이 자리에 왔을 것 같은가? 특수수사원(特殊搜査院)이라는 조직 역시 임시로 만들어진 조직일 뿐인데.”
“……!”
“말해 봐라.”
홍상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대답을 해 버리면 자칫 반역자가 될 수도 있었다.
물끄러미 그를 보던 서량이 버럭 소리쳤다.
“말해!”
우우우우웅!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그의 목소리에 강력한 마기가 실렸다.
극마의 장벽을 눈앞에 둔 서량의 마기는 마인들에게 공포나 다름이 없었다. 하물며 마기의 농도 자체는 이미 극마지경의 그것이라 보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대단한 그였다.
홍상호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교, 교주님입니다.”
서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얼굴에 입꼬리만 올린 냉소다. 그 모습을 본 홍상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관계를 다시 정립해 보도록 하지.”
“…….”
“처음에 뭐라고 했지?”
홍상호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서량의 엄청난 일갈에 주변의 이목이 확 집중된 상황이었다.
자존심을 지키느냐, 아니면 가문의 미래를 지키느냐.
홍상호가 고개를 숙였다.
“적사가의 이가주입니다. 신교의 감찰사님을 영접하여 영광입니다.”
동시에 그 뒤에 선 마인들 역시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다음은?”
“……외람되오나, 본가의 외전이 공사 중인지라 많은 호위 부대를 감당할 여력이 없습니다. 임시로 편히 쉴 곳을 마련해 두었으니 감찰사님께선 안으로 드시고, 다른 이들은 임시 거처로 안내하겠습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이봐, 광마대주.”
위홍련이 고개를 숙였다.
“예, 감찰사님!”
순간 홍상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량의 말을 들은 적사가의 무인들 모두가 기겁하여 위홍련을 바라보았다.
위홍련이란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광마대주를 본 적은 모두가 처음이었다. 설마 이제 서른이나 됐을 법한 여자가 그 악명 자자한 광마대주일 거라곤 생각도 못 한 그들이었다.
소문과 현실의 괴리는 그렇게 컸다. 애초에 호위 부대가 호법원이나 형법당의 무사들이라 생각했던 이유도 있었다.
“임시 거처에서 좀 쉬고 있을래? 어련히 알아서 지었겠지만 임시로 만든 거처인 만큼 어느 정도 불편함은 감수해야 할 텐데.”
위홍련이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정 불편하면 자잘한 것들 좀 요구하면 되겠지요.”
“사고 안 칠 거지?”
“이 위홍련, 평생 사고라고는 쳐 본 적이 없습니다.”
시원하게 사고 한번 쳐 보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량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이가주.”
“……예.”
“감당할 수 있겠나? 저치들은 나도 제어를 못 해.”
어련하겠는가. 특히 광마대주 위홍련이 구대마존 중 일인인 철검마존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는 소문은 마도 무림에서도 유명했다.
홍상호는 연신 입술을 씹었다. 어찌나 초조하고 불안했는지 아랫입술이 너덜거릴 정도였다.
서량이 코웃음을 쳤다.
“길 터.”
적사가의 마인들이 순식간에 좌우로 갈라졌다.
한 걸음 내딛던 서량이 한숨을 쉬었다.
“이것들이 정신머리가 빠졌구만. 문도 안 열어 놓고 있었어?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그, 그것은…….”
“거참.”
서량의 주먹이 움직인 것은 순간이었다.
번쩍! 콰앙!
크고 두툼한 대문이 그대로 박살 나 흩어졌다.
서량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걸어가며 말했다.
“공사하면서 대문도 하나 장만해.”
“…….”
“아, 비용은 교주님 앞으로 청구해. 나 돈 없다.”
쿠구궁.
서량을 시작으로 마동필, 위홍련 그리고 광마대원들이 이끄는 마차가 적사가로 들어갔다.
* * *
“그런 사고가 있었다고?”
“예.”
“이가주가 많이 속상해하겠군.”
“그 성정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입니다.”
쪼르르.
반쯤 누워서 차를 따르는 육십 대 노인.
당대 적사가주이자 홍위문, 홍여린의 아버지인 홍관(紅觀)이 그였다.
“해서 신교에서 오신 분들은 어디로 모신 겐가?”
“외원 교사각(蛟思閣)으로 모셨습니다.”
“음, 별수 없지.”
교사각은 적사가 최고의 귀빈을 모시는 곳이었다. 홍상호가 그들을 제대로 다뤘다면 모르겠지만, 그러지 못한 이상 교사각을 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천방지축이로군. 그래도 한 가문의 이인자라는 자리거늘, 그리 막무가내로 비집고 들어왔단 말인가.”
“어쩌면…….”
“음?”
빼빼 마른 중년 사내, 장우휘(張雨輝)가 말했다.
“은근히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 삼공자 말인가?”
“그렇습니다.”
홍관은 피식 웃었다.
“장 총관이 그런 애송이를 신경 쓸 줄은 몰랐네.”
“그는 교주님께서 직접 뽑은 인재 중 하나입니다. 나이는 어리다 하나 쉽게 볼 인물은 아닙니다.”
“쉽게 보진 않아. 그러나 딱히 긴장해야 할 상대로 보이지도 않는군.”
“하지만…….”
“장 총관.”
“예, 가주님.”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말게. 근래 들려오는 삼공자에 대한 소문은 분명 대단해. 소문의 절반만 사실이더라도 대단한 인재임에 틀림이 없어.”
홍관이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무재(武才)가 출중하다고 머리까지 좋긴 어렵지. 늙은이의 교활함은 어지간한 경험으로도 당해 내기 힘들다네.”
장우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동의는 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홍관은 신중한 성격이지만 나이 어린 사람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 가문의 장자로서 어렵지 않게 가주에 오른 그다. 태어나서부터 탄탄대로를 밟아 온 인생이니, 새파랗게 어린 젊은이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반면 장우휘는 결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거친 삶을 살아오며 오만 일을 겪어 본 그는 항상 ‘변수’를 생각하는 이였다.
그래서 홍관의 측근으로서 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절정은커녕 일류에도 이르지 못한 무공으로 적사가의 총관이 된 이유였다.
“나에 관해 묻지는 않던가?”
“이가주의 설명 도중 말을 끊었답니다. 아직 듣지 못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하면?”
“여독부터 푼다고 하였습니다.”
홍관이 미소를 지었다. 젊었을 적 여러 처녀의 방심을 흔들었을 법한 멋진 미소였다.
“과격하긴 하지만 머리가 나쁜 건 아니라는 게로군. 궁금해서 따져 물을 만도 할 텐데.”
“그렇습니다.”
“교사각주에게 말해 두게. 병을 치료 중이라고. 저녁에 정식으로 초대할 것이라고 전해 두게.”
“그리 전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음?”
“혹시라도 먼저 감찰을 시작한다고 하면 어찌하오리까?”
홍관이 미소를 지었다.
“녀석이 생각이 있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걸세. 그래도 한다고 하면 하라고 하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렇게 장우휘가 나가고.
차를 홀짝이던 홍관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놈 참, 궁금하기는 하구먼.”
그때, 병풍 뒤에서 여인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뇌쇄적인 분위기를 뽐내는 삼십 대 미녀였다.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음?”
“가주님의 아들을 망가트린 사람인데 화도 안 나시는 건가요?”
홍관이 코웃음을 쳤다.
“별것도 아닌 싸움에서 져 버린 놈을 아들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 가문을 위했다면 차라리 장렬하게 죽었어야지, 죽지도 살지도 못한 꼬락서니로 뭘 어쩌겠다는 게야?”
“냉정하셔라.”
“뱀의 피는 차고 비리지. 제아무리 자식이라도 쓸모가 다해 버린 놈까지 챙기고 싶진 않군.”
“호호.”
여인이 웃으며 홍관의 어깨를 매만졌다.
“그래서, 치료는 언제 하실 건가요?”
코웃음을 치며 매몰찬 언사를 내뱉던 홍관이 언제 그랬냐는 듯 크게 웃었다.
“언제라도 좋지. 부디 무리하지 마시게.”
“어머, 제가 할 말인걸요?”
호탕한 웃음과 염색 짙은 교소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두 웃음은 격한 신음이 되어 뱀굴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