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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114화 (114/774)

114화. 부서지는 껍질 (4)

“휴, 좀 살겠구만.”

뜨끈한 물로 목욕까지 마친 서량이 창가에 앉았다.

마동필이 차를 따랐다.

“벽라춘입니다. 드시지요.”

“어, 고맙다.”

침상에 앉아 뜨끈한 차를 마시니 제법 안온한 느낌이었다.

“너도 한잔할래?”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호로록, 호로록 잘도 차를 마시는 서량을 보며 마동필이 물었다.

“공자님.”

“왜?”

“감찰은 언제 시작하시겠습니까?”

“뭐 급할 거 있겠어? 천천히 하면 되지. 언제 또 적사가에 와 보겠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서량은 적사가에 한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물론 당당하게 대문을 통해 들어온 건 아니었다. 살왕이었던 시절, 적사가 최고의 부대라는 혈망단(血蟒團)의 단주를 암살할 때 한 번 들러 본 적이 있었다.

서량은 힐끔 침상을 바라보았다.

‘흐음.’

붉은색 비단 이불. 남부에서 쓰는 진한 적색의 비단이다.

‘이건 또 감회가 새롭군.’

암살하러 왔을 때 한 번, 거처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한 번, 그리고 지금 또 본다.

‘심지어 후보들 중에 홍위문 그놈하고 제일 빨리 얽혔었지. 그렇게 보면 적사가하고는 상당한 악연이군.’

머리를 긁적이던 서량은 문득 드는 허전함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라? 금호는?”

“저는 잘…….”

“흠, 이놈 잠만 자고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소 뒤에 마차 대어 놨지?”

“아, 금호를 찾으러 가십니까?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됐다. 너도 씻고 와라. 찝찝할 텐데.”

“저는 공자님의 호위를…….”

“염병한다. 똥 쌀 때도 호위한다고 옆에 있을래? 잠 한숨 안 잘 생각이야?”

말을 하고 나니 순간 무서웠다. 마동필이라면 왠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는…….”

“됐으니까 얼른 씻으러 가. 그리고 착각하지 마, 너 아직 나보다 약하다.”

“…….”

“씻어. 땀내 난다.”

마동필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방에서 나온 서량이 마차를 뒤적거렸다.

“어디 보자…… 이놈아! 어디 갔냐?”

금호 특유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직이 투덜거리던 서량이 기감을 예민하게 세웠다.

우웅.

그러자 끄트머리 마차에서 금호의 기가 느껴졌다.

“참나, 언제 또 저기까지…… 음?”

뭐지, 이 익숙하면서도 기분 나쁜 인기척은?

서량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네요.”

무표정한 얼굴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화사한 미모는 여전하다.

“그러게. 오랜만이야.”

물끄러미 그를 보던 홍여린이 턱으로 교사각 옆을 가리켰다.

“잠깐 차나 한잔할까요?”

* * *

차를 홀짝이는 서량의 얼굴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홍여린은 달랐다. 수려하지만 싸늘한 얼굴 위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저 여우는 뭐죠?”

서량이 자신의 옆자리를 보았다. 의자 위에 올라온 금호가 몸을 동그랗게 말곤 눈을 감고 있었다.

“친구다.”

“천하의 천마신교 삼공자께서 여우를 친구로 두다니, 흥미롭네요.”

“남들이 흥미로워하건 껄끄러워하건 내 알 바 아니야.”

서량이 늘어지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래서 차 한잔하자고 한 이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역시 달라.’

지금도 서량을 보면 가슴 안쪽에서 울컥하는 뭔가가 튀어나온다.

입마에서 깨어났다는 소식에 찾아간 그는 과거와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가히 변신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될 정도로, 얼굴만 같지 아예 다른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서량은 서량이다. 입마에 들고 심경의 변화는 있었을지라도 그의 천성은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

나른한 자세, 귀찮음이 묻어 나오는 눈빛 속 은은하게 떠오른 날카로움이 보인다. 턱 하니 꼰 다리와 대충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보자면 오만함보다 한없는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주화입마에 걸리기 전의 서량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가 뭐냐고 묻잖아.”

“…….”

“별거 없나 보군.”

서량은 그대로 차를 비워 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였지만 전혀 뜨겁지 않은 모양이었다.

탁!

찻잔을 놓은 그가 일어났다.

“금호야, 가자.”

용케 알아들었는지 돌돌 만 몸을 쭉 편 금호가 입맛을 다시며 서량의 발치로 내려왔다.

그때, 홍여린이 말했다.

“축하드려요.”

“뭐가?”

“고죽림에서 귀환 후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 준 삼공자. 무공이 일취월장하여 제자들 중 최고라 불릴 만하며, 파격적인 추진력으로 사공자인 홍위문을 순식간에 쓰러트린 신진고수.”

홍여린의 눈이 깊어졌다.

“교주님의 총애를 받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임시나마 감찰사라는 직책까지 얻었네요?”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오라비 작살 낸 놈 면상에 침이라도 뱉고 싶나?”

“그럴 리가요. 오히려 고마울 정도예요. 저는 그놈과 사이가 별로 안 좋거든요.”

서량이 차갑게 웃었다.

“참 어리군.”

“……?”

“경쟁심을 느꼈든 어쨌든 그놈은 네 오라비다. 혈육을 개작살 낸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도 오히려 고맙다고?”

“그놈은 나한테 거치적거리는 장애물 따위에 불과해요.”

“장애물? 웃기지 마라. 넘을 수 없는 벽이었겠지.”

“뭐라고요?”

“놈은 치졸한 쓰레기였다. 별 시답잖은 수작을 부려 가며 사람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일품이었지. 하지만 적어도 칼을 뽑을 땐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

“쓰레기였지만 무사다움을 잃지는 않았지. 하지만 넌 아니야.”

서량이 몸을 돌렸다.

“쟁취하고 싶은 게 있는데도 싸움이 무서워 남에게 기생이나 하는 너보다는 그놈이 더 나았다. 적어도 너 따위에게 비웃음당할 만큼 머저리는 아니야.”

홍여린의 눈빛도 덩달아 차갑게 굳어졌다.

“내가 무슨 감정을 느꼈든 그걸 당신에게 평가받을 이유는 없을 텐데요.”

서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갈 뿐이었다.

홍여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깨달았다. 입마에서 깨어난 직후 서량에게 느꼈던 위화감이 무엇인지를.

그는 더 이상 이쪽 세상 사람이 아니다.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탐욕의 괴물이 아닌 것이다.

서량은 권력 쟁투라는 전장에서 벗어나, 더 높은 차원의 전장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홍여린은 그 전장에서 서량이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서량은 더 이상 자신의 말에 흔들리거나 휘둘리지 않을 거라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이 홍여린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충고 하나 할까요?”

문을 열던 서량이 힐끔 그녀를 돌아보았다.

홍여린이 비틀린 얼굴로 말했다.

“뱀의 아가리로 들어온 이상, 당신이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어쩌라고.”

“감찰로 비리를 파헤치고 싶든 어쨌든, 뭔가를 얻고 싶다면 고개를 숙이는 법 정도는 알고 있는 게 좋을걸요?”

고개를 숙여야 하는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은연중 내비치는 말.

서량이 피식 웃었다.

“안 본 사이에 왜 이리 유치해지셨나? 아니면 그게 네 한계냐?”

“말조심해요!”

“숙여야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면 알아서 숙이지. 난 인사성이 좋은 편이거든. 하지만 너희에게는 그럴 가치가 없어.”

서량이 다시 몸을 돌렸다.

“사람도 아닌 뱀 주제에 무슨.”

쿵!

문이 닫혔다.

동시에.

콰앙!

탁자가 박살 났다. 분을 이기지 못한 홍여린의 일장(一掌)이 자아낸 결과물이었다.

그녀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감히.”

호의라면 호의이거늘 그걸 걷어차 버렸다. 아니, 아예 자신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놈에게 이제는 살의마저 느껴졌다.

몇 번이나 숨을 고른 홍여린.

잠시 후, 그녀가 사람을 불렀다.

“아버지는?”

“가주님께선 현재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홍여린이 차갑게 웃었다.

“치료라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꽤 예전부터 이름 모를 첩 하나를 들였다는 것을. 사실 첩인지 아닌지도 지금 와서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첩이 의술에 능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짐승 같은!’

혈육이고 뭐고, 정말이지 가문의 사내놈들은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전해. 금일 만찬에 나도 낄 거라고.”

“알겠습니다.”

* * *

깔끔하게 의관을 정리한 서량의 자태는 무척이나 훌륭했다. 위홍련과 마동필은 새삼 서량의 옷매무새가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멋들어진 자태에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금일 만찬에는 가주와 가내 수뇌부들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겠지.”

“나름대로 긴장 빡 하고 있을 거예요.”

“그것도 그렇겠지.”

“일단 분위기 자체는 우리 쪽에서 주도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본교에서 직접 명령을 받고 내려왔으니까요. 제아무리 적사가라도…….”

“그건 아닐걸.”

“네?”

적색 장포를 걸치고 감찰사 안장까지 찬 서량이 무심하게 말했다.

“놈들은 시작부터 나와 광마대를 떼어 놓으려 했어.”

“아, 그랬지요. 근데 그게 왜요?”

“단순히 부담을 덜고 싶어서? 아니야. 놈들은 나를 외딴 섬에 홀로 떨어진 세상 물정 모르는 청년으로 만들려 한 거야.”

위홍련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유는 확실하지. 이쪽 놈들은 어떤 수작을 부려서라도 날 압박하려 들 거야.”

“압박이라…….”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제 가문의 장자를 개작살 내 버렸으니. 게다가 가주의 딸과도 악연이 있거든.”

“정말이지 공자님은 적을 만드는 데에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나도 평화가 좋다.”

철컥!

무장은 칠야도 한 자루였다. 용린도와 유성쌍도는 마차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적사가에서 돌발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뭐 걸리는 거라도 있으신지요?”

서량이 입술을 매만졌다.

‘내가 생각했던 분위기와는 조금 달라.’

거경가는 어떨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사가는 혈육에 대한 정이 크지 않은 것 같았다.

홍위문을 적대시하는 홍여린의 모습도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홍상호 건을 생각하니 더더욱 그러했다.

‘공기가 비슷해.’

홍상호는 가주의 동생이다. 게다가 이가주라는 직책까지 가지고 있었다.

신교에서 나온 감찰사이니 허튼수작은 부리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적대감 정도는 가져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곳의 공기는 처음 들어올 때나 지금이나 여일(如一)했다.

지이잉.

초감각이 작은 울음을 토해 냈다.

‘위험? 아니야. 하지만 뭔가 껄끄러워.’

탕!

아랫배를 시원하게 두드린 서량이 말했다.

“적사가에서 어떻게 나올지 고민하는 건 의미가 없다. 가서 부딪쳐나 보자고.”

위홍련이 씨익 웃었다.

“역시 화끈한 게 낫죠.”

“그렇지.”

“만찬에는 저희도 가는 겁니까?”

“당연한 거 아냐? 동필이는 내 호위고 너는 감찰 부대의 부대장이잖아.”

“하지만 공자님만 초대했잖아요, 저치들이.”

“그래서 안 오겠다고?”

“설마요.”

스르릉.

살짝 뽑아 든 포아검의 검날이 무척이나 흉포해 보였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겁니다. 어쨌든 임무니까.”

“임무니까 따라붙어.”

“알겠습니다.”

“사고는 안 칠 거지?”

“안 칠 겁니다만, 왠지 공자님 말투가 묘하네요? 쳐 주기를 바라시는 것 같은데요?”

서량이 씨익 웃었다.

“그래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난장 벌이는데 너만큼 믿음직한 사람이 또 없잖아.”

“탁월한 안목이십니다.”

“준비는 됐지?”

“물론이죠.”

서량이 문을 열었다.

“자, 뱀고기 맛 좀 보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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