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부서지는 껍질 (5)
적사가 내전, 가주실의 후원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기화요초 만발한 정원과 인공 호수, 그리고 수십 명이 올라가도 넉넉할 거대한 정자가 화사한 운치를 자아냈다.
여느 무가(武家)와 큰 차이가 없는 가문의 외관과 달리 내전만큼은 황실이 부럽지 않게 꾸며 놓았다. 마치 권력이 집중된 황제의 처소처럼, 적사가의 모든 권력이 가주에게 집중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비슷하군.’
홍위문의 거처가 떠올랐다. 이에 비할 순 없지만 놈도 집 안을 상당히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그 꾸밈새가 이곳과 비슷했다. 확실히 부자지간은 부자지간인 모양이었다.
한 마인이 고개를 숙였다.
“저쪽 정자에서 귀빈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좋은 연회가 되시길.”
“그래.”
“그리고…….”
“왜?”
마인이 한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작은 병기 보관대가 있었다.
“병장기는 이곳에 두고 가시면 됩니다.”
위홍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것들이 어디서…….”
“그만.”
서량이 칠야도를 풀어 건넸다.
“위화감 조성하려고 온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발끈해? 자, 여기 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는 무슨. 감찰사라고 왔지만 여긴 자네들 가문 아니겠나. 존중할 건 존중해야지.”
마인의 얼굴에 언뜻 감격이 묻어 나왔다. 상대의 신분을 알기에 이런 관용을 보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하면 이곳에…….”
“아, 다만 그거 잘 관리해 줘야 된다. 칠야도라고, 제법 쓸 만한 물건이거든.”
순간 마인의 눈이 흔들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리가 제법 떨어졌지만 이곳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마인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칠야도라면 천마신교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칠대천마의 애병이 아닌가. 굳이 도객(刀客)이 아니더라도 마인이라면 죽기 전에 한번 보고 싶은 마병 중의 마병이었다.
그런 전설의 병기를 삼공자가 갖고 있다니?
포아검을 푼 위홍련이 콧방귀를 뀌었다.
“뿐이랴? 여기 이 딱딱한 인간이 찬 검은 묵왕검이야. 보관 잘못해서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너희 가문 개작살 난다.”
마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묵왕검이라면 신교오대마검, 강호십대마검 중 하나다. 칠야도가 상징성 덕에 유명해진 칼이라면 묵왕검은 그 자체로 전설이나 다름이 없었다.
마인은 저도 모르게 정자로 시선을 돌렸다. 이토록 귀한 병기들을 정말 보관해도 되겠냐는 뜻이었다.
그때 마동필의 입이 열렸다.
“내 임무는 감찰사님을 호위하는 것. 어떤 이유로라도 검을 맡겨 놓을 수 없소. 양해해 주시길 바라오.”
“하, 하지만…….”
“감찰사님께선 귀 가문을 존중하여 손수 애병을 푸셨소. 이쪽에 별다른 의도가 없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한 셈이오. 하나 귀 가문의 규율 때문에 이 사람의 임무까지 소홀히 하라 강권하지 말기를 바라오.”
위홍련은 은근한 놀라움이 담긴 눈으로 마동필을 바라보았다. 바위처럼 딱딱하고 고지식한 놈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달변이 아닌가.
마인은 망설였다. 적사가 내원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통하는 그였지만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때, 저 멀리 정자에서 중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상 대주, 귀빈들을 그만 불편하게 하고 이만 들라 하시게.”
“예, 가주님.”
한옆으로 물러난 마인이 고개를 숙였다.
“괜한 시간을 끌어 죄송합니다. 들어가시지요.”
그렇게 세 사람이 정자로 향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위홍련은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밖에서 봤을 때도 그랬지만 이거 진짜 화려하네.”
마도칠가 중 최고의 자금력을 자랑하는 가문은 천보금가다.
하지만 천보금가도 후원을 이리 화려하게 꾸며 놓진 않았을 것 같았다. 게다가 화려한 와중에도 은근히 담백한 맛이 있어서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참 멋들어진 곳이긴 한데.’
순간적으로 ‘나 역시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이전부터 울리고 있는 초감각의 경고마저 잊을 뻔했다.
지잉. 지잉.
‘음.’
서량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마동필이 의아한 듯 물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
“공자님?”
“어? 어어.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있는 대로 찌푸려진 얼굴을 보자면 도무지 괜찮아 보이지가 않았다.
‘알 수가 없네.’
지금껏 초감각은 수많은 위험으로부터 그를 지켜 주었다.
그러나 지금 제멋대로 곤두서 있는 초감각은 평소와 달랐다. 이전까지의 초감각이 실질적인 위협을 경고했다면, 지금의 초감각은 다소 모호했다.
‘평소처럼 외부에서 다가오는 위협이라기보다는…….’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나 자체의 위험이다. 이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가 위험하다는 뜻이야.’
정말이지 특이한 경고였다. 내가 왜 위험하지? 아니, 누군가에게 내가 위협이 된다고 한들 그게 그렇게 불안해할 일인가?
‘이런 경고는 생전 처음…….’
순간 서량이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야.’
출교 후 이곳 적사가까지 오던 와중.
초감각 때문에 크게 앓았던 적이 있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경고로 인해 전신이 식은땀으로 푹 젖었을 정도였으니까.
‘어떤 이유로 초감각이…….’
그때, 다시 한번 중후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곳에서 보는 경치도 좋지만 정자 위에서 둘러보는 경치 역시 일품이외다.”
이만 올라오라는 뜻이었다. 잠시 멈춰선 서량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후욱.
‘흐음.’
정자의 계단을 한 발, 한 발 오를수록 느껴지는 강력한 기파.
‘강하군.’
얼굴을 보지 않아도 느껴질 만큼 대단한 기도다. 이 거대한 정자 바깥으로 넘실거리는 무형의 기도는 무척이나 날카롭고 사이했다.
마침내 세 사람이 정자로 올랐다.
“어서 오시오.”
맞은편 끝, 상석에 앉은 노인이 일어났다.
육십 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건장한 체구에 자연스러운 주름이 인상적인 멋진 외모였다. 의복은 생각보다 수수했지만 가문의 수장으로서 부족하지 않은 품격이 드러났다.
좌우로 십여 명의 원로들과 홍여린, 그리고 몇몇 중장년들이 앉았지만 서량의 눈에는 오로지 노인만이 보였다.
존재감만으로 이 많은 사람을 내리누르는 일대마인.
‘굉장하군.’
그는 같은 칠가의 수장인 지운회를 마주한 적이 있었다.
지운회는 초절정고수였다. 단순 무력의 수준만 보자면 지금의 서량보다는 반 수 위의 무공을 갖춘 이였다.
하지만 적사가주 홍관은 또 달랐다.
칠가 중 최고라는 마검가주보다도 인상적인 기도였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오히려 지운회보다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차이는 거의 없어. 그래도 지운회보다 확실히 강해.’
고수일수록 한 수의 차이는 크다. 그 한 수 위의 경지로 올라서기 위해 피땀을 쏟아 가며 연마해야 함은 당연하다.
‘쉽게 볼 인물이 아니야.’
홍관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적사가를 맡고 있는 홍관이오. 신교를 대표해서 오신 감찰사를 뵙게 되어 영광이외다.”
척!
좌우에 선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우렁찬 외침은커녕 숨소리 하나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그 침묵의 인사가 오히려 언행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마동필의 얼굴에 긴장이 떠오르고, 위홍련의 눈에 은은한 광기가 일었다. 상대의 대응에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든 것이다.
서량이 고개를 숙였다.
“외부감찰대리, 특수감찰사 서량입니다. 홍 가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동필과 위홍련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량이 누군가에게 이리 저자세로 나가는 걸 처음 보았던 것이다.
홍관도 서량의 인사에 놀란 듯했다.
“예의가 과하시오. 이 사람이 몸 둘 바를 모르겠소.”
“본교의 삼공자로 방문했다면 모르되, 임시로나마 감찰사 신분인 만큼 그에 마땅한 예의는 보여야지요.”
말하자면 삼공자라는 신분이 감찰사보다 높다는 뜻이며, 저자세로 나가는 것은 지금뿐이라는 뜻이다.
홍관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대단한 배포시오. 용맹과 무력이 출중하여 당금 신교 최고의 기린아로 불린다더니, 소문이 틀리지 않은 것 같소.”
솔직하게 놀라움을 드러내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단순히 말을 잘하는 게 아니었다. 잘 다듬어진 기도만큼이나 사람을 대하는 게 익숙해 보인다.
“인사가 길어지면 어색함만 늘어나는 법, 차린 것은 많지 않지만 예 와서 식사부터 하십시다.”
“그러지요.”
홍관의 맞은편으로 걸어간 서량이 거칠 것 없다는 듯 그 자리에 앉았다.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감돌았다. 홍관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그 자리에 앉으시는 게요? 이 사람 옆으로 오시지 않고.”
“이 자리는 철저하게 공적인 자리입니다. 가주의 옆자리는 업무가 끝났다고 판단되면, 그때 앉지요.”
의아함은 곧 불편한 감정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그래도 만찬에 초대를 받았거늘 분위기를 너무 딱딱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홍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찰사의 마음을 알겠소. 하면 풍악은 이 일을 마치고 나서 울리도록 합시다.”
“그러시지요.”
서량의 눈에 은은한 마기가 일었다.
미소 띤 얼굴에 여전한 여유가 묻어 나오는 대응. 하지만 그는 홍관의 눈빛 속에 깃든 가소로움이란 감정을 읽었다.
‘얕보는군.’
홍관 역시 이쪽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서량의 연배를 생각하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 분명할 터. 그럼에도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하나다.
‘나이 때문이야.’
자기보다 어리면 그 사람이 얼마나 뛰어나던, 어느 방면에 재능이 있든 별 것 아니라 치부한다.
천하 어디에서든 숱하게 볼 수 있는 꼬장꼬장한 노인의 전형이다. 하지만 홍관이 그들 대다수와 다른 것은 그 자신의 능력과 위치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나쁠 거 없지.’
누군가에게 얕보이는데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서량은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저 투명하지 못한 시선이, 냉정하지 못한 마음이 상대에겐 약점이 될 것이고 자신에겐 무기가 될 것이다. 특히나 이런 자리에선 더더욱.
“하면 감찰사께서는 이 공무의 시작을 어디서부터 건드려 볼 생각이시오?”
서량이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들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음.”
홍관이 손을 뻗었다.
우웅.
부드러운 바람이 분다 싶은 순간, 서신이 그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좌우에 앉은 마인들의 얼굴에 경탄이 일었다. 가볍지만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허공섭물의 한 수였다.
“이것이 무엇이오?”
“본교에서 작성한 감찰 대상 부서입니다. 확인하시지요.”
홍관이 웃으며 서신을 젖혔다.
“수백 년 동안 신교와 칠가가 합의를 본 감찰 대상 부서는 정해져 있소. 한데 새삼스레 이런 서신을…….”
“…….”
“……!”
서신을 훑어본 홍관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껏 보여 주던 여유 넘치는 모습이 한순간에 깨져 버린 것이다.
서량이 손을 뻗었다.
우우웅.
홍관 옆자리에 놓인 찻잔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어느새 서량의 손에 잡혔다. 홍관의 허공섭물 못지않은 인상적인 한 수였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서량이 말했다.
“수백 년의 역사는 모르겠고, 어쨌든 그 서신에 수결부터 찍어 주시지요.”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것이오?”
“왜 그러십니까?”
“이 서신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오?”
“설마 제 임의대로 공문서를 고쳤다고 말씀하시고 싶은 겁니까? 죄송하지만 제겐 그 정도의 배포가 없습니다.”
홍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말 같지도 않은 서신에 수결을 찍으라고?”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아드님을 잘 두셨어야지요.”
정자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싸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