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부서지는 껍질 (6)
홍관의 눈썹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서량이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신교의 사공자 홍위문은 교내 수많은 비리에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그 비리들이 묻힐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교주님의 제자, 즉 본교의 후계 후보였기 때문입니다.”
탁.
찻잔이 바닥에 놓이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요.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의식불명이 된 현재, 홍위문은 후계 후보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자격을 상실했다고?”
“파순제 때 보지 않으셨습니까? 체내 독정이 깨져 독기가 오장육부는 물론 골수까지 파고든 상황입니다. 마도 무림 최고의 의원들이 모였다는 혈혼각에서도 손을 쓸 수 없다고 판정을 내렸지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섬뜩함을 불러일으키는 웃음이었다.
“이건 개인적인 궁금함인데, 왜 그를 가문으로 불러들이지 않으신 겁니까? 교주님의 권속이라고는 하나, 홍위문이 익힌 마공과 독정에 대해서는 적사가가 더욱 잘 알고 있으니 한 번이라도 주청을 드릴 만했을 텐데.”
“…….”
“뭐, 그 부분은 됐습니다. 중요한 건 홍위문이 더 이상 후계 후보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니까요.”
아무리 쓸모없다고 판단한 자식이라지만 그 자식을 망가트린 놈이 저리 뻔뻔하게 말하고 있다. 누구라도 울화가 치밀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해서, 내 아들이 지은 죄를 가문에 묻겠다는 겐가?”
“가문에 죄를 물을 거였다면 제가 아니라 형법당주가 왔겠지요?”
홍관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형법당주라? 제아무리 형법당주라 한들 한 가문의 수장인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논점을 이탈하고 싶으십니까? 불필요한 말로 주제를 흐리지 마시지요……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부글부글.
서량이 내려놓은 찻잔 속 식은 찻물이 서서히 끓어올랐다.
그곳을 보는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나이에 허공섭물의 기예를 보여 준 것만으로도 대단했는데, 손도 대지 않고 찻물을 끓게 만들다니?
바닥에 닿은 살결을 통해 찻물만 끓게 만드는 것은 허공섭물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기예였다. 섬세함보다 파괴와 확산에 중점을 둔 마공을 익힌 이는 쉽게 보여 줄 수 없는 깨달음이었다.
극에 이른 진기 조율 능력. 홍관조차 이번만큼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 형법당주가 가주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뭐라?”
“가주는 신교 소속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아까부터 말씀을 이상하게 하시던데, 잊고 계셨다면 제가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리지요.”
후욱.
싸늘하게 굳어졌던 분위기가 위험천만한 열기로 뒤바뀌었다.
“적사가만이 아니라 마도칠가 전부가 천마신교 안에 딸린 집단입니다. 말하자면 신교 휘하의 지부라고도 볼 수 있지요.”
“…….”
“수백 년 동안 신교와 귀가가 합의를 본 사항이다? 말장난하지 마십시오. 그건 합의가 아니라 아량이었고 존중이었습니다. 거주지가 다르다고 그걸 착각하면 안 됩니다.”
호로록.
서량이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 뱉은 말은 모두의 귀를 뒤흔들었다.
“여긴 정파 무림이 아니라 마도 무림입니다. 합의가 필요한 상대였다면 애초에 감찰을 나오지도 않았을 터.”
일그러졌던 홍관의 얼굴은 어느새 무표정하게 변해 있었다. 언뜻 평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목덜미는 눈에 띌 정도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찻잔을 한옆에 치운 서량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서신에 적힌 바와 같이 저의 감찰 대상은 적사가의 ‘모든’ 부서입니다. 이번 감찰 대상의 영역을 확대한 이유는 귀 가문의 장남 홍위문의 비리와도 연관되어 있으니, 부디 원활한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깔끔한 마무리였다.
뒤에서 그를 보던 위홍련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말 되게 잘하네.’
마찬가지로 마동필 역시 놀랐다.
‘……좋지 않아.’
원론을 따지기 이전에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알아야 한다. 저들이 감찰사를 어찌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곳은 마도칠가 중 하나가 아닌가.
마동필은 내심 긴장했다. 혹시라도 저들이 삐딱하게 나오면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될 수도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그렇군.”
홍관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감찰사의 말씀이 옳소. 본가는 천마신교에서 파생된 조직이며 수백 년 동안 신교를 위해 힘써 왔소.”
좌중은 깜짝 놀랐다. 홍관이 서량의 말을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신교와 본가가 ‘합의’를 해 왔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오. 감찰사는 아량과 존중을 말했지만 그 안에서 본가의 독립을 일정 부분 인정했던 것 아니겠소?”
“묵시적으론 그렇습니다.”
“그렇소. 하니, 내 신교 본단에 다시 한번 연락을 취해 보리다. 시일이 다소 걸리겠지만 본가의 사정을 헤아려 주길 바라오.”
사태를 평화롭게 해결하자는 뜻이었다. 과연 한 가문의 수장다운 유연한 대처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대가 너무 만만치 않았다.
“교주님께서, 이 일에 연륜 있는 중견 마인이 아닌 저를 보낸 이유를 아십니까?”
“……?”
“저는 귀가의 장남을 후계 싸움이라는 명목하에 박살을 내 놓았습니다. 이유인즉, 그놈이 저를 먼저 죽이려 했기 때문이지요.”
서량은 더 이상 미소 짓지 않았다.
홍관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아시겠습니까? 하필 저를, 그것도 적사가를 일 순위로 지명해 보내신 까닭은 이번 감찰을 공격적으로 감행하란 뜻입니다.”
“……!”
“위 대주.”
위홍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아까 이가주 앞에서 했던 말 다시 해 봐. 감찰 대상이 된 자들의 행동 양상에 대해 논했던 것 말이야.”
미리 준비라도 해 놓은 것처럼 위홍련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감찰 대상이 된 조직들은 부적절한 판정을 받은 경우, 다소 위험한 행동을 보이곤 합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결국 죽는다면 발악이라도 해 보자는 심산이겠지요.”
“그래서?”
“감찰에 나선 경우, 최대한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하여 혹시 모를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서량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매서운 눈으로 홍관을 주시할 뿐이었다.
홍관은 더 이상 자신의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을 보자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정녕 그리 날을 세워야만 하겠나?”
“하면 무엇을 기대하셨습니까? 세 치 혀로 나이 어린 감찰사를 농락하여 은근슬쩍 넘어가 보려고 하셨습니까?”
“이……!”
순간적으로 화를 못 참고 욕설을 뱉을 뻔했다.
그때, 홍관 뒤에 시립한 장우휘가 둔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감찰사라도 말씀이 심하십니다.”
서량의 시선이 힐끔 장우휘를 향했다.
장우휘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가주님 말씀대로 본가는 분명 천마신교 소속입니다. 하나 가주님께선 교주님 외에 어떤 사람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파삭!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장우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좌중 모두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기겁했다. 어느새 서량 앞에 있던 찻잔이 장우휘 옆, 정자 기둥에 맞아 박살이 났던 것이다.
주르륵.
튕겨 나온 날카로운 찻잔 조각에 베인 장우휘의 얼굴에 피가 흘렀다.
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 자리는 감찰사인 나와 적사가의 대표인 가주님의 독대 자리나 마찬가지다. 관계없는 제삼자가 주둥이 나불거릴 자리가 아니야.”
“…….”
“용서는 한 번뿐이다. 충고를 무시할 시, 감찰사 재량으로 처분토록 하겠다. 나와 가주님이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한 누구도 입을 열지 마라.”
폭발 직전처럼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다시 북해의 빙굴(氷窟)처럼 싸늘해졌다.
분위기를 휘어잡는 능력이 능수능란하기 짝이 없다. 어르고 달래지 않고 더 강하게 찍어 눌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니, 누구도 불만을 드러내지 못한다.
홍관의 눈이 흔들렸다.
‘이놈…….’
분노가 극에 이르렀지만, 그 분노만큼이나 놀라움이 컸다.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관록 넘치는 위정자와 대화하는 것 같다. 어린놈이라고 얕잡아 보았거늘, 시종일관 주도권을 되찾아 오지 못하고 있잖은가.
“엄한 놈이 끼어들어 대화를 끊었군요. 하지만 저 역시 더 이상의 대화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문서를 확인하겠습니다. 현 시간부로 각 부서의 장들에게 지난 삼 년 동안 기재했던 장부를 수거하라 명을 내려 주십시오.”
서량이 힐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 밝은 밤, 흩어진 구름 조각들이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다.
“이각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장부를 가져오지 못한 부서는 부적합 판정을 내릴 것입니다.”
이각 안에 부서의 삼 년 치 장부를 가져오란다. 적사가의 규모와 업무 상황을 생각하면 빠듯한 시간이었다.
혹시 모를 수작을 부릴 일말의 가능성도 봉쇄해 버린 셈이었다. 감찰을 염두에 두고 미리 허위 장부를 준비해 두었다 한들, 물품과 일일이 대조해서 어떻게든 비리를 찾아낼 것 같은 기세였다.
물끄러미 서량을 바라보던 홍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각 부서의 장들에게 전하라. 삼 년 치 장부를 이곳으로 가져오라고. 이각 안에 가져오라고들 전하도록.”
사사삭.
좌우에 앉아 있던 마인들 중 절반 이상이 급박하게 빠져나갔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체감했으니 자연히 움직임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위홍련은 서량의 빠르고 강렬한 일 처리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몰아치는데,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일일이 부서를 돌지 않았어. 한 부서를 뒤집어 까고 있을 때 다른 부서들은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는 걸 아는 거야.’
새삼스레 대단하다.
‘이 양반은 대체 어디서 이런 경험을 쌓았을까?’
실제로 무공과 살인의 경험은 출중하지만 이런 업무 쪽에서는 경험이 전무한 서량이었다.
지금 그가 보여 주는 모습은 의천맹주가 공무에서 보여 주던 것을 따라 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안다고 해서 모두가 서량처럼 자연스레 소화해 내진 못할 테지만.
묘하게도, 서량은 가장 증오하던 대상에게 배운 능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었다.
‘흠.’
각자가 상념에 젖은 그 시각.
서량은 괜한 찝찝함을 느꼈다.
‘생각보다 쉬운데?’
자신을 바라보는 홍관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분노의 감정 속에 득의양양함과 조롱의 기색도 비치는 듯했다. 상대에게 놀랐지만 크게 당황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의 수하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망신 아닌 망신을 당했다. 그런데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뭐지?’
수상하다.
새로운 찻잔을 허공섭물로 끌어오며, 서량은 아무도 모르게 천라육통식을 개방했다.
우우우웅.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오로지 서량의 귀에만 들리는 기성(奇聲).
천라육통식(天羅六通式)의 일식(一式) 초신관(超身觀)이 실로 오랜만에 발동되었다. 비할 데 없는 최고의 마공과 왕성한 마기로 발동된 초신관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하게 날 서 있었다.
서량이 눈을 감았다.
‘소리, 냄새, 공기의 감촉…….’
급속도로 예민해진 오감에 익숙해지는 시간은 짧았다.
오감이 되살아나자 기감도 증폭됐고, 증폭된 기감은 특유의 육감(六感)을 활성화시켰다.
지이잉!!
서량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초감각의 경고 때문에 목덜미가 다 뻐근해질 정도였다. 초신관 때문이겠지만 이토록 강렬한 경고를 받은 적은 없었다.
‘또…….’
알 수가 없다. 이 경고가 발하는 위험의 정체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때, 좌측 열 끝에 앉아 있던 홍여린이 입을 열었다.
“곤란하지 않으신가요?”
“…….”
“일 년 치도 아니고 삼 년 치 장부를 뒤지게 되면 감찰사님께서도 좋을 일이 없을 텐데요?”
삼 년 치의 장부에는 홍여린이 빼돌린 부서의 금액도 있다. 그녀의 도움을 받아 영약을 받아먹은 당신은 멀쩡할 것 같으냔 말이었다.
평소라면 제대로 쏘아붙여 주었겠지만 서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새가 없었다.
초감각이 주는 경고가 시간이 지날수록 격해지고 있었다.
“이…….”
홍여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대놓고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홍관이 말했다.
“이각 동안 말없이 기다리고만 있기도 힘들겠지. 술이나 한잔하시구려.”
“…….”
“마시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
“하면 되었소. 아, 그리고 미리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는데.”
스르륵.
홍관이 상의를 벗었다. 노인답지 않은 우람한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련 중 무리를 하여 하루하루 치료를 받아야 하는 몸이라서 말이오. 전담 의원을 불러 잠시 침 좀 맞겠소. 양해해 주길 바라오.”
여전히 서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감은 눈도 여전했다.
홍관이 내공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방 의원은 이리로 오시게.”
공기가 요동칠 정도로 격한 음성.
서량의 얼굴이 미미하게 떨렸다. 초신관으로 예민해진 감각 때문에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노친네. 침을 맞든 지랄을 하든 알아서…….’
그때였다.
‘어?’
서량이 눈을 떴다.
눈을 뜬 그의 표정은 멍하기만 했다.
사박, 사박.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레 옮기는 발걸음.
‘이 기운은……?’
완벽하게 갈무리된 기운이다. 만약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천라육통식을 극성으로 개방해도 쉬이 느끼지 못했을 만큼 은밀했다.
그런데 왜일까? 이 기운, 언젠가 한 번 느꼈던 것 같다. 그것도 무척이나 지독한 악연으로 얽힌 자리에서.
잠시 후,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농염한 미색과 굴곡 있는 몸매가 남성들의 시선을 절로 잡아끈다. 천하 어디서도 쉬이 보기 어려운 미색이었다.
“부르셨나요, 가주님.”
“음, 슬슬 결리기 시작하는군. 침 좀 놔 주시게.”
홍관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썰미 좋은 고수가 본다면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음이었다. 그리고 그 전음의 대상은 방 의원이라는 여인이었다.
여인이 활짝 웃었다. 그녀가 웃자 온 세상이 밝아지는 듯했다.
“알겠습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 음?”
홍관이 다시 눈을 떴다.
“…….”
“허허! 방 의원의 미색에 우리 감찰사가 놀란 모양이오.”
멍하니 여인을 보는 서량을 비꼬는 말이었다.
그러나 서량은 반응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의 의식만 반응하지 못했을 뿐 무의식은 충분히 반응하고 있었다.
치이이익!
“……!”
정자에 모인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화르르륵!
새하얀 아지랑이처럼 일어난 살기 뒤로, 어느 때보다 지독한 마기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사박.
자리에서 일어난 서량.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초감각이 무엇을 경고하고 있었는지, 천마신교를 나설 때 왜 그토록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스스로를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구나.’
시시각각 농밀해지는 살기 속에서도 투명하게 자신을 관조하는 서량.
‘나는 천마신교를 나갈 수 없던 게 아니었어.’
지금껏 제대로 된 결단력을 내리지 못했던 이유, 초월적인 감각과 명석한 두뇌를 갖고도 몇 번씩이나 실수를 반복했던 이유.
인지하지 못했던 껍질이 조금씩, 조금씩 깨져 나갔다.
‘나가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의 능력이라면, 마음만 제대로 먹으면 언제든지 천마신교를 탈출할 수 있었다. 구유마공을 완성한 이후, 그는 체제와 공포로 잡아 둘 수 없을 만큼의 강함을 쌓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교주가 외출 명령을 내려 준 것에 기뻐했다.
나갈 수 있는 능력이 되었음에도, 그 좋은 추진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먹이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왜?
‘내 꿈, 내가 바라는 진정한 자유는…….’
쿠르르릉!
심상치 않은 전조.
이내 구유마공이 극성으로 달아올랐다.
번쩍! 콰아앙!
정자의 난간이 화포에 맞은 듯 박살 나 흩어지고, 거대한 지붕은 하늘 끝까지 솟을 기세로 날아가 버렸다.
“뭐, 뭐야?!”
“이런!”
푸스스스.
자욱하게 인 먼지 사이로.
한 쌍의 붉은 안광이 방 의원, 방령(芳零)에게 고정되었다.
“너.”
갑작스러운 마기의 폭발에 겨우 중심을 잡은 방령의 눈에 짙은 사기(邪氣)가 휘몰아쳤다.
“비요왕, 그 개 같은 년과 무슨 사이냐?”
순간 방령의 안색이 굳어졌다.
사사삭.
서서히 걷히는 먼지 속, 악귀처럼 일그러진 서량의 얼굴이 드러났다.
“……좋아, 그건 네년을 꿇리고 난 후 차차 들어 보도록 하지.”
홍관이 외쳤다.
“뭐 하는 짓이냐!”
“닥쳐!”
콰아앙!
서량이 방령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내가 바라는 진정한 자유는, 해소되지 못한 원한 뒤에 숨어 있었으니까.
내가 나가지 않은 이유는, 나 혼자서는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수 없으니까.
의천맹, 철혈성.
내 죽음에 관여한 놈들을 몽땅 쳐 죽이지 않고서는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없으니까.
번쩍!
제천기의 살법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