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나를 깨닫다 (2)
“비켜! 안 비키면 다 죽는다!”
쩌저저정!
혼신의 힘을 다한 신법에 다급함이 묻어 나왔다. 앞에 누가 있든 일직선으로 뚫고 가는 위홍련에게서 강력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적사가의 마인들은 당황했다. 살기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긴 했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그들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아직 후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랐다. 가주실 후원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실로 거대했지만, 사정을 모르기에 막을 수가 없었다.
“비켜, 비켜! 비켜어!!”
마구 소리치며 단숨에 외원 교사각까지 다가간 위홍련이 버럭 외쳤다.
“비상사태다! 광마대는 전원 집결해!”
살기등등한 그녀의 외침이 교사각을 넘어 내원의 경계까지 넘나들었다.
치리리링!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거처에서 쉬고 있던 광마대원들 모두가 숨 몇 번 몰아쉬기도 전에 모조리 위홍련 앞으로 달려 나왔다.
칼 같은 기도, 맹수처럼 번들거리는 눈빛.
대주의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상황인지 단숨에 파악한다. 뒷골목에서 어슬렁대는 삼류 파락호처럼 보였던 그들이, 순식간에 천마신교 최악의 부대라는 광마대의 정체성을 되찾았다.
“이 시간부로 적사가를 황색적도(黃色敵徒)로 규정한다! 목표지는 가주실 후원, 임무는 감찰사님의 보호다!”
“존명!”
사악!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원들이 목에 접혀 있던 복면을 올려 썼다. 눈 밑까지 오는 새하얀 복면에는 ‘광마(狂魔)’라는 두 글자가 멋들어진 초서체로 쓰여 있었다.
모였을 때도 살기등등했지만 복면까지 올려 쓰자 분위기가 또 달라진다. 두 눈에 번득이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광기, 꿈에서라도 보기 두려운 악귀의 현신이었다.
광마대원 하나를 시켜 서량의 용린도와 유성쌍도까지 챙긴 위홍련이 발목을 빙빙 돌렸다.
“가자!”
파아악!
위홍련을 선두로 광마대 이 조가 빠르게 움직였다.
뭉클뭉클.
백 명이 넘게 움직이는데도 마치 한 몸과 같다. 지형에 따라 순간순간 진형을 맞춰 이동하는 그들, 헤아릴 수 없는 실전과 수만 번의 노력이 만들어 낸 일체감이었다.
“머, 멈추……!”
내원으로 통하는 대문의 수문위사들이 당황해서 검을 쥐었다.
위홍련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비키지 않으면 죽이겠다.”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았는데도 신기하게 귀에 쏙쏙 틀어박힌다. 전투 상황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기파는 물론 목소리에도 살기가 깃든 것이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수문위사들이 저도 모르게 좌우로 물러났다.
위홍련의 포아검에서 시퍼런 검기가 뿜어졌다.
콰앙!
일격에 문짝을 이어 주던 기둥까지 모조리 박살 났다. 휑하니 뚫린 그곳으로 광마대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진입은 불허한다.”
수많은 마인들이 진을 치고 그들을 막았다. 적사가를 대표하는 자요대(紫妖隊)였다.
한 박자 늦었지만 그들 역시 가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무리 신교 본산의 부대라도 길을 열어 줄 수가 없었다.
“상부에서 명이 내려오기 전까지 감찰 부대는 그 자리에서…… 헉!”
콰르릉!
자요대주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빛살처럼 날아든 검기를 막아 낸 그의 얼굴은 대번에 창백해졌다.
포아검을 뻗은 위홍련, 그녀는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뚫어!”
화아아악!
저마다 병장기들을 뽑아 든 미친 마귀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쩌저저정! 푸화아악!
* * *
퍼어엉! 쾅!
연신 터져 나오는 폭음 속에서 어떻게든 몸을 빼는 방령의 보법은 무척이나 기기묘묘했다.
강호 어디에서도 대접을 받을 만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실력도 두 초고수의 무자비한 공방 앞에서는 빛을 잃는 느낌이었다.
빠각!
사이하게 질러 나가는 일장(一掌)에 서량의 신형이 주춤했다.
파라락!
시뻘건 도기(刀氣)의 폭풍에 홍관의 장포가 걸레짝이 되었다.
방령의 눈이 흔들렸다.
‘이럴 수가.’
그녀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금일 적사가에 방문하는 감찰사는 교주의 셋째 제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 셋째 제자가 넷째인 가주의 장남을 회생 불능 상태로 몰고 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후기지수 아닌가. 천마의 제자이니만큼 굉장한 무공을 갖추고 있겠지만 감히 적사가주와 비견될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 깨져 버렸다. 육안으로 따라잡기 힘든 공방을 보면 박빙(薄氷)이라는 두 글자가 절로 떠올랐다.
‘적사가주와 박빙을 이뤄? 저 어린놈이?!’
방령은 홍관을 잘 알고 있었다. 홍관은 상대가 어리다고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즉, 지금 홍관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뜻.
‘말도 안 돼!’
그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더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사부님을 알아?!’
비요왕이란 별호를 모르는 무림인은 단연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놈은 자신을 보고 사부님의 별호를 언급했다.
사부님도 알고 있지만, 완벽하게 갈무리된 자신의 사공(邪功)까지 읽어 냈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사공은 살수공(殺手功)보다 은밀해서 초절정고수라도 쉽게 눈치 채지 못했다.
방령의 눈에서 사기가 넘실거렸다. 당황이 느껴지는 안광이었다.
‘일단은 여길 벗어나야 해.’
살을 섞은 사이라고 홍관이 자신을 지켜 주는 게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게 있기 때문에 방령을 지켜 주는 것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홍관을 위해서라도 자리를 벗어나는 게 상책이다.
사락!
부드럽게 땅을 밟은 방령이 후방 멀찍이 물러났다.
서량의 눈이 불을 뿜었다.
어느새 칠야도를 역수로 쥔 그가 그대로 칼을 쏘아 던졌다.
파악!
“조심!”
도주하던 방령이 깜짝 놀라 몸을 뒤집었다.
구유마기를 한껏 머금은 칠야도가 그녀의 등을 스치고 지나가 정원 한편에 자리한 인공 연못에 박혔다.
퍼어어어엉!!
하늘 높이 치솟은 물기둥. 연못에 살던 잉어들이 너절하게 찢긴 채 사방으로 떨어졌다.
펑!
칠야도를 날린 그 짧은 순간을 홍관은 놓치지 않았다. 대망아(大蟒牙)의 각법 일격에 서량이 피를 토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서량은 반격을 준비하지 않았다. 목표물을 향해 다시 한번 강하게 땅을 박찰 뿐이었다.
피이이잉!
사람이 달려 나가는데 팽팽했던 금줄 끊어지는 소리가 난다.
자세가 무너져 비틀거리던 방령은 순간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거대한 살기의 덩어리가 자신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접근해 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때였다.
“이노옴!”
피잉!
홍관이 먼 거리에서 송곳 같은 지풍(指風)을 날렸다. 이전까지 펼치던 무공보다 위력은 줄었지만 속도는 두 배 가까이 빠른 공격이었다.
서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만 뻗으면 방령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손을 쓰는 순간 심장이 뚫릴 것이다.
‘이렇게는 안 돼.’
마(魔)의 불길에 몸을 실은 그의 분노는 시시각각 크기를 불려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분노 속에서 마침내 차가운 이성이 솟구쳤다. 생존 본능이 이끌어 낸 이성이었다.
‘시간을 길게 끌면 안 된다. 놈은 끝까지 날 방해할 거야.’
그렇다면?
퍼어엉!
짧고 굵은 파공성.
어느새 몸을 돌린 서량이 주먹질 한 방으로 지풍을 날려 버렸다. 덕분에 방령은 그새 다섯 걸음을 물러날 수 있었다.
방령이 다시 한번 자리를 박차려 할 때.
“움직이면 죽는다.”
오싹!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금껏 발산하던 살기보다 훨씬 섬뜩했다.
방령은 물론 홍관 역시 멈추었다. 방령은 심상치 않은 공포 때문에, 홍관은 서량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멈추었다.
서량이 방령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어지간하면 사로잡고 싶지만 그게 안 되면 죽인다. 섣불리 움직이지 말도록.”
파지직. 파지지직.
방령을 향해 뻗은 손에서 시뻘건 번갯불이 일었다. 마(魔)의 전광(電光)은 그 자체로 위협이요, 협박이었다.
홍관이 으르렁거렸다.
“네놈이 정녕 미쳤구나! 감히 예가 어디라고 이 난장을……!”
“감히 장담하는데.”
담담한 표정 위로 서늘한 기운이 일었다.
“적사가는 이 시간부로 반역자의 가문으로 낙인찍힐 것이다.”
“……뭐라고?”
홍관은 기가 찼다.
“정말 미친 게냐?”
“현실을 말했을 뿐이야. 궁금하다면 이유를 말해 주지.”
“개소리 마라!”
“비요왕은 과거 철혈성과 연수한 적이 있거든.”
“……?”
“지금은 모르겠군.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넌 철혈성과 ‘한 번’이라도 연수한 적이 있는 비요왕과 연관된 사람을 가문으로 끌어들인 거다.”
“……!”
홍관의 눈이 흔들렸다. 그런 얘기는 처음 들었던 것이다.
치리링! 쩌저정!
마동필이 네 명의 노고수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사사삭!
한참 떨어진 곳에서 이곳으로 몰려오는 고수들의 발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서량은 침착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난전 유도.
“모든 부서의 장부를 뒤지라는 명령이 내려올 정도로 너희는 신뢰를 잃었다. 거기에 이 사실까지 알려지면 너흰 마도 무림에서 매장되겠지.”
홍관이 방령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비요왕의 제자 중 하나라는 것은 오로지 그만 아는 사실이었다.
방령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철혈성과의 연수는 전혀 모른다는 뜻이었다.
서량의 눈이 빛난 것은 그때였다.
‘위 대주!’
저 멀리서 익숙한 기도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홍관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날 우롱하려 하지 마라! 내 이번 일은 직접 신교에 가서 따질 것이다! 아무리 교주님의 제자라 한들 어찌 천둥벌거숭이를 감찰사로……!”
퍼어어억!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홍관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빈틈을 노리고 날아온 서량이 암룡각으로 후려친 것이다.
일격을 허용 당했지만 홍관의 반응은 빨랐다. 순식간에 반격 태세를 갖춘 그가 재차 장력을 날렸다.
‘……?’
홍관의 눈이 흔들렸다.
‘어디?!’
정말이지 놈의 신법은 경탄을 넘어 경악스러울 지경이었다. 한 수 위의 고수조차 시야에서 놓칠 정도로 빠른 속도라니, 대체 저런 무공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방령!’
파아악!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홍관이 방령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그곳에 서량은 없었다. 그저 당황한 표정의 방령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엄한 곳에서 폭음이 터졌다.
콰아앙!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누군가가 훨훨 날아 땅에 처박혔다.
“오장로?”
퍼버벅! 콰득! 풍덩!
강벽수, 비폭권, 암룡각, 마무리로 폭산경까지 허용한 다른 장로의 몸은 피떡이 되어 인공 연못에 빠졌다.
“헉헉!”
순식간에 장로 둘을 날려 버린 서량.
“공자님!”
마동필이 재빨리 서량의 옆에 섰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어찌나 흉험한 전투였는지 피범벅이 된 외양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위홍련의 외침이 들려왔다.
“공자님!!”
서량이 고개를 들었다.
후우웅!
어둠을 가르고 세 자루 병장기들이 날아왔다.
참마도(斬馬刀)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거대한 칼과 청색과 홍색의 날렵한 쌍도. 바로 용린도와 유성쌍도였다.
파아앙!
그 순간, 홍관이 무서운 속도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왠지 서량이 저 칼들을 쥐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늦었다.
터엉!
날아오른 서량이 순식간에 용린도를 쥐었다.
동시에 그의 두 다리가 번개처럼 휘둘러졌다.
파박!
어느새 칼집에서 뽑힌 유성쌍도가 서량의 발길질에 맞아 홍관에게 쏘아졌다.
홍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칼이란 쥐고 휘두르라고 만든 물건이다. 한데 그것을 발로 차서 날릴 생각을 하다니?! 실력을 떠나, 기가 막힐 정도로 독창적인 공격이었다.
퍼벅!
홍관을 스치고 지나간 쌍도가 땅에 꽂혔다.
절묘한 움직임으로 칼날을 피한 홍관이 적사가 최강의 비기, 흑골사영수(黑骨蛇影手)를 내치려 할 때.
“위 대주와 동필이는 저 여자 잡아!”
휘이이이잉!
휘몰아치는 지옥의 칼바람.
양손으로 용린도를 쥔 서량이 구유마공의 마관상천지문식(魔觀上天知門式)을 개방했다.
파지지지직!
일순간 마기의 방출량이 배로 늘어났다.
서량이 차갑게 말했다.
“하여간에 방해하는 놈들이 많아.”
지옥의 칼바람이 홍관을 향해 쏟아졌다.
부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