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나를 깨닫다 (3)
“우웨에엑!”
한 움큼의 피를 토하고도 비틀비틀 후원으로 향하는 자요대주.
그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이럴 수가.’
어느새 광마대는 자요대를 지나 후원 인근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저렇게 강하다니!’
신교 최악의 부대라곤 하지만 최강은 아니다. 광마대가 무서운 이유는 그들의 엄청난 독기와 짐승을 연상케 할 만큼 매서운 광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번 짧은 전투에서 자요대주는 깨달았다.
강하지 않으면 독기고 광기고 소용없다는 걸. 광마대가 무서운 이유는 단순히 지독해서가 아니라, 강하면서도 지독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신교와 칠가 사이의 격차란 말인가…….’
자요대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단순 무력 수준만 보자면 적사가를 대표하는 자요대 역시 광마대에 크게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드는 법이다.
그 미세한 차이를 사람들은 격이라 말한다. 제어되지 않는 폭탄과도 같은 부대가 천마신교에서 당당히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빌어먹을!’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 질 수는 없다. 자요대주는 자꾸만 힘이 빠지려는 다리를 간신히 끌며 아득바득 후원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등 뒤에서 기성(奇聲)이 들려왔다.
“또 뭐…… 헉?!”
파아아아앙!
바람처럼, 혹은 번개처럼.
희미한 빛이 명멸을 반복한다 싶은 순간, 그 빛이 기다란 광선(光線)을 만들며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빛의 결정체가 쏘아지는 방향은 가주실 후원이었다.
“뭐, 뭐였지?!”
분명 몸이 굳을 정도로 굉장한 기운을 느낀 것 같았는데?
‘아니, 그런 걸 떠나서…….’
기분 탓인지, 실제로 그렇게 보인 건지.
“……여우?”
* * *
휘이이이이잉!!
“크으윽!”
“흡!”
후원에 발을 들인 모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쿠웅!
몇몇은 병장기를 땅에 박아 넣어 흔들리는 육신을 지탱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 고수 아닌 이들이 없었다. 한데도 그들은 휘몰아치는 폭풍에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했다.
정확히는 그 폭풍 속에 깃든 상상을 초월하는 마기 때문이었지만.
콰르르릉!
바람 소리가 격해지면 천둥소리와 비슷해진다는 걸 그들은 처음 알았다.
쏟아지는 도풍(刀風)에 홍관은 기겁했다. 도법의 경지도 엄청났지만 그 속에 배어든 마기와 살기는 초절정고수의 몸을 굳게 만들 정도였다.
‘이!’
화르르륵!
적화교룡마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그가 쌍장을 휘둘렀다.
퍼퍼퍼펑!
홍관의 흑골사영수는 홍위문의 그것과 차원을 달리했다. 아예 다른 무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홍위문처럼 손가락이 굵어지고 손톱이 길어지는 등의 기형적인 변화는 없었지만 위력에선 비교가 되지 않았다.
파아아악!
서량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장법과 조법을 절묘하게 합친 무공이었다. 묵직한 도풍으로 모조리 상쇄시켰다고 생각했는데, 그 틈을 비집고 나온 기운이 어깨를 할퀴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콰앙!
대지를 찍은 그가 또다시 도풍을 일으켰다.
‘어딜!’
후속 공격을 허용하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홍관은 다음 공격이 들어오기도 전에 서량에게 장력을 발출했다.
‘……?’
순간 홍관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반대로 주변 공기는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잘못 알았나 싶을 정도였다.
‘열양공?!’
서량이 씨익 웃었다.
“속이 뜨끈할 거다.”
육연지옥풍(六連地獄風)에 이은 구유인화도법 이장(二章), 종극무간도(終極無間道)의 발현이었다.
퍼퍼퍼펑!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불기둥이 탐욕스러운 화룡처럼 변해 홍관을 향해 짓쳐 들었다.
‘이익!’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열기다. 심지어 불기둥을 이룬 것은 극에 이른 도기(刀氣)였다. 도기가 유연하게 휘어져 타오르는 불꽃의 형상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실제 불이 아니더라도 휩쓸렸다간 불에 타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을 것이 자명했다.
파아아아악!
퍼부어지는 극양도기(極陽刀氣)가 모두의 시야에서 홍관의 존재를 지워 냈다.
콰르릉!
아름답던 후원 땅 일대가 폭삭 주저앉았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적사가의 마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서량의 도법을 알고 있던 마동필조차 할 말을 잃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서량은 멈추지 않았다. 멈춰선 안 되었다.
어설프게 건드리면 어떤 맹수라도 독이 오르는 법, 하물며 상대는 치명적인 극독을 머금은 독사 중의 독사다.
화아악!
뜨거운 공기가 하늘 높이 날아가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피부를 찢고 뼈까지 얼릴 지독한 한기(寒氣)였다.
종극무간도에 이은 혈규대홍련(血叫大紅蓮)의 도초. 어두운 빙해(氷海) 위에서 펼쳐진 핏빛 칼춤에 공기마저도 하얗게 얼어붙는다.
쩌저저저적!
주저앉고 부서진 땅 역시 어느새 얼어붙어 서리가 내린 것처럼 허옇게 반짝였다.
천하 누구라도 목숨을 장담하기 힘든 무공. 단순한 무공을 넘어 술가(術家)의 신이(神異)한 능력이 아닌가 의심될 공부였다.
콰앙!
한 줄기 폭음과 함께 땅속에 파묻혔던 홍관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올랐다. 새하얀 연기를 꼬리처럼 남기며 날아오른 그의 얼굴엔 낭패의 기색이 역력했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역시.’
구유인화도법의 연환삼장(連環三章)은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정일룡도 그랬듯, 장(章)과 장 사이의 미세한 틈을 읽을 수 있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말은 연환삼장이라 하지만 초고수들의 눈에는 약간의 빈틈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공을 익히며 얻은 폐해였다. 암영기로 똑같은 무공을 구사했다면 그따위 빈틈이 생길 리 없다.
반면 이득도 있었다. 바로 도법 자체의 파괴력이 한 차원 높게 상승했다는 것.
‘나머지 두 개의 장을 꺼내 들 수밖에 없는가…….’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야.
구유인화도법의 진정한 위력은 지금보다 한 차원 높아졌을 때 나온다. 마도 무림의 경지로 치자면 극마지경(極魔之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때가 되면 굳이 연환식에 연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 초식, 한 초식에 절대의 위력이 나올 테니까.
바꿔 말하자면 결국 후반 두 개의 장을 꺼내 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실패한다면 과도한 내공 소모로 오히려 이쪽이 불리해질뿐더러, 상대를 죽일 각오였다면 모르되 지금은 그럴 자리가 아니다.
지금 그가 바라는 것은 하나.
홍관을 위시한 모두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든 후 방령을 사로잡는 것이다.
서량이 등 뒤로 손을 뻗었다.
파아아앙!
허공섭물로 끌어온 칠야도가 그의 왼손에 잡혔다.
오른손에는 용린도, 왼손에는 칠야도.
“이노옴!”
이제는 홍관의 눈에도 이성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당했으니 체면 따위를 차릴 때가 아닌 것이다.
화아아악!
어두운 밤인데도 거대한 자색 기류가 그의 양손으로 모여드는 게 확연히 보였다.
사아아아아악!
함박눈처럼 서서히 떨어지는 자색의 독기.
서량이 외쳤다.
“모두 전권에서 이탈해!”
마동필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이지 이번에도 공자님에게 전투를 맡기고 싶진 않았다. 호위무사라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권에서 이탈하지 않으면 오히려 공자님의 신경만 분산될 것이다.
‘별수 없어.’
파악!
신속하게 후방으로 이동한 그가 방령을 찾았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공자님을 보면서도 그녀의 움직임에 줄곧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마동필의 눈이 일순 커졌다.
‘왜?!’
그 위치, 그 방위에서 이탈하는 순간 사로잡으면 그만일 터.
한데 방령은 전권을 이탈하지 않았다. 오히려 펑펑 쏟아지는 독기의 전장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대체……?’
쿠웅!
땅으로 내려선 홍관.
그리고 그의 뒤에 방령이 서 있었다.
서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 안 되면 죽일 생각이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최후의 선택지다. 방령이 중독되어 쓰러지면 곤란해진다.
“저것들이…… 어?!”
놀랍게도 방령의 안색은 평온했다. 아니, 공포로 창백하게 질려 있긴 했지만 홍관이 뿜어내는 독기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뭔진 모르겠지만.’
잘 됐어.
콰아앙!
서량이 그대로 질주했다.
이미 비요왕의 무공은 겪어 봐서 알고 있다. 만약 천라지망에 당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벌였다면 되레 살왕이었던 시절의 그에게 승기가 있었을 것이다.
하물며 초절정의 영역에도 올라서지 못한 수준이라면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지이이잉!
초감각이 위험을 경고했다.
파아악!
마주 달려오는 홍관.
그 뒤에 선 방령의 두 눈이 시커멓게 변했다. 동공부터 흰자위까지 몽땅 흑색으로 물들었다.
우우우우우웅!!
서량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방령과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그때, 홍관의 흑골사영수가 질러졌다.
콰아아앙!
울컥 피를 토하며 물러난 서량.
아주 잠깐의 틈이었지만 고수들 간의 공방에선 그 미세한 틈이 승패를 결정짓는 한 수가 되기도 한다. 서량의 감각이 워낙 예민하고 반응 속도가 뛰어났기에 이 정도에서 그친 것이다.
‘뭐야?!’
머리가 띵했다. 숨을 들이쉬면서 어느 정도 독기를 흡입한 것이다.
그것까진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홍위문의 독정보다 훨씬 지독했지만 몸 한구석에 모아 배출시키면 그만이다.
그러나.
퍼어어어어엉!!
이번에는 상당히 깊게 들어왔다. 용린도의 넓은 도배로 막았지만 그 충격파가 몸 전체까지 전달되었다.
‘빌어먹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사아아아악!
독기로 가득 찬 공기에 짙은 사기(邪氣)가 침투했다.
마기와 독기, 사기로 꽉 찬 후원은 보이지 않는 마경(魔境)이나 다름이 없었다. 범부가 이곳으로 들어오면 중독사하기 전에 충격으로 심맥이 터져 즉사할 터였다.
‘사공(邪功)? 사술(邪術)?’
모르겠다.
통상의 경우 마공은 사공의 우위에 선다. 사공의 달인이라도 일류의 마인 앞에서는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방령이 구사하는 사공은 달랐다. 사공이지만 마공과도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분석은 나중에!’
후우우웅!
용린도로 묵직한 바람이 모여들었다.
공기가 요동쳤다. 독기가 꿈틀거리고 자욱하게 퍼진 사기가 연기처럼 제멋대로 흔들거렸다.
홍관의 손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쩌어엉!
서량이 쥔 칠야도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공격이 날아올 줄 알고 미리 칼을 날려 장력의 흐름을 방해한 것이다.
홍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놈은 정녕…….”
대체 어디서 저런 물건이 튀어나왔는가? 후속타를 예상한 것도 모자라 눈을 감고 정확한 위치에 칼을 날려 투로를 흐트러트렸다.
백전연마의 고수들도 실전에서 써먹기 힘든 수법들을 숨 쉬듯 편안하게 구사하는 싸움법.
‘천재라는 것인가.’
부아아앙!
허공으로 날린 지옥풍에 독기와 사기가 돌풍을 일으키며 하늘로 치솟았다.
퍼억!
서량의 몸이 흔들렸다. 종극무간도를 펼치기 직전 옆구리에 구멍이 뚫렸다. 빈틈을 정확하게 노린 홍관의 지풍이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러다가 싸워 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전략을 바꿔야겠군.’
화르르르륵!
사방천지를 뒤덮는 무간지옥의 겁화.
서량이 버럭 외쳤다. 열린 입에서 핏방울이 튀었지만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홍관!!”
홍관의 콧잔등이 떨려 왔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누가 봐도 도발 섞인 웃음이었다.
“혼자서는 못 이길 거 같았나? 별 시답잖은 수를 쓰는구만!”
“이놈!”
퍼어어어억!
“……!”
서량이 고개를 숙였다.
거리를 벌려 여유롭게 공격을 가했던 홍관이 순식간에 코앞으로 접근해 그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박은 것이다.
“오냐,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내 진즉…….”
꽈아악!
“……?”
“이렇게 가까이는 처음이지?”
하얗게 질린 안색,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후련한 표정을 한 서량이 말했다.
홍관의 팔목을 꽉 잡은 그가 용린도를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안 되겠다. 저년을 잡을 게 아니라 널 잡아서 이 비린내 나는 가문을 탈탈 터는 게 더 편하겠어.”
“……!”
“잘 오셨네, 독사 대장.”
폭산(爆山)의 기운을 한계까지 모아 둔 서량이 홍관의 코앞에서 발경을 터트렸다.
콰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