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늪에 빠져도 숨은 쉴 수 있다 (1)
“오늘부로 교내 전 부서 감찰을 끝냈습니다. 감찰 결과서는 이틀 후 군사부에서 올릴 예정입니다.”
“수고했네.”
고구가 짧게 읍했다.
“하면.”
평소라면 대답도 하지 않았을 이천상이 오늘은 웬일인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생활은 어떤가.”
고구가 멈칫했다.
“생활이라 하심은…….”
“본교 생활 말일세.”
지금껏 교주에게 이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구는 당황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상대가 교주일지라도 그의 표정은 쉽게 변하질 않는 것이다.
“언제나 여일(如一)합니다.”
“그런가.”
“…….”
“한 잔 받겠나?”
고구의 눈이 흔들렸다.
보고가 끝났을 때 붙잡은 것도 처음인데 술까지 받겠냐고 묻는다. 오늘 이천상은 상당한 파격을 보여 주고 있었다.
“영광입니다.”
이천상이 손을 까딱였다.
우우웅.
허공을 날아간 잔이 고구의 코앞에서 멈추었다.
술이 가득 따라진 잔이지만 일말의 흔들림도 없다. 잔 주변에서 요동치는 기(氣)의 떨림조차 없다.
공손하게 잔을 받은 고구가 고개를 돌려 잔을 비웠다.
물끄러미 그를 보던 이천상이 툭 던지듯 말했다.
“자네가 입교한 지 얼마나 되었지?”
움찔!
잠시 잔을 만지작거리던 고구가 말했다.
“이십육 년이 되었습니다.”
“이십육 년.”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되었군.”
“…….”
“형법당을 맡은 지는?”
“올해로 정확히 십 년 되었습니다.”
“그런가.”
“예.”
편안하게 태사의에 등을 묻은 이천상.
“기억이 나는군. 자네를 형법당 수장으로 임명할 때, 주변 시선이 곱진 않았지.”
고구 역시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고구의 나이는 스물여덟, 아홉에 불과했다.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마인이 신교 최상위 권력자 중 하나가 되었으니 자연 질투하는 이들도 많았다.
“자네는 그 불편한 시선들을 실력 하나만으로 모조리 잠재웠네.”
“…….”
“후회되지 않나?”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고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후회되지 않습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굳이 과거의 일을 들추는 이유가 무엇일까?
고구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적어도 그가 아는 이천상은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는 위인도 아니었고, 추억을 안주 삼아 술 한 잔 기울이는 취미도 없었다.
달리 의도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난 삶에 회한이라도 느끼는 걸까?
“변했군.”
“……예?”
“자네, 변했어.”
무심하기만 하던 이천상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드리워졌다.
고구의 눈이 커졌다. 그는 이천상이 저리 미소 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근래 마음을 흔드는 일이 있었나?”
“……?”
“어지간해선 흔들리지 않는 금천(禁天)의 빙혼(氷魂)에 한 줄기 금이 갔어.”
“…….”
“비슷한 사람을 봐서 그런 겐가?”
“……!”
고구의 안색이 돌변했다.
미소를 머금었던 이천상의 얼굴이 이내 특유의 무심함으로 뒤덮였다.
“교…….”
“가 보게.”
“…….”
“…….”
“이만 물러가옵니다.”
대례를 올리고 몸을 돌린 고구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비슷한 사람?’
근래 들어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낀 사람은 한 명이다.
‘……설마 교주님께서도 알고 계신 건가?’
아니, 정말로 ‘그’는 자신과 같은 경로로 이곳에 들어온 사람이란 말인가?
혼란을 안고 대전을 나가는 고구.
그런 고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천상의 눈에 은근한 흥미가 감돌았다.
“여전하군.”
고금(古今)을 통틀어 이와 같은 경지에 도달해 본 자가 또 있을까 의문이 들 만큼 지고한 영역에 올라왔음에도, 당대 최강의 마신은 느꼈다.
여전히 세상은 재미있는 구석을 잃지 않고 있다고.
‘똑같은 분란, 똑같은 어리석음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나는 이것을 다르다고 보는 것인가.’
극에 이르렀을 때는 점차 수그러들던 흥미가, 또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니 조금씩 기지개를 켠다. 이유인즉, 과거에는 ‘그들’과 같은 세상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그들과 다른 세상에서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천상은 부인하지 않았다. 다시 그들의 세상 속으로 풍덩 빠져 보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고 있다는 걸.
온갖 번뇌와 분란으로 가득한 저 오물 가득한 세상에, 다시 한번 거인의 발자국을 드리우고 싶어진다.
‘어쩌면 그 한 걸음은 이미 시작되었을는지도 모르지.’
셋째를 감찰사로 보내 잡초를 뽑아 버리려 한 건 흥미가 아니라 신(神)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잡초를 뽑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머나먼 과거, 무자비한 마력으로 대륙을 뒤흔들었던 천마(天魔)의 광기를 끄집어내고 싶었다.
‘아직은.’
이천상이 눈을 감았다.
‘아직은 아니지.’
아니, 오히려 그런 순간은 오지 말아야 했다. 온전한 신(神)이 되기 위함이라면.
“……과연 신이란 필요한가.”
* * *
“물 좀 드시겠소?”
“응.”
마동필에게 수통을 받은 위홍련이 그대로 고개를 젖혔다.
콸콸 쏟아지는 물을 모조리 위장에 쏟아 넣은 그녀가 입맛을 쩍 다셨다.
“물을 더 구해야겠군.”
“더 있소.”
“그래도 더 구해야 해. 다음 감찰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건 그렇소만.”
한숨을 푹 내쉰 위홍련이 나무에 등을 기댔다.
마동필이 주변에 흩어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기며 말했다.
“쉬고 있으시오. 정리는 내가 하리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잘해 줘? 무섭네, 마 씨.”
“고생했잖소.”
“고생이야 마 씨도 만만치 않았지.”
“그렇게 생각하면 한 손 거드시오.”
“잔다.”
마동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참 물품을 정리하는 그에게, 잠시 후 위홍련이 재차 입을 열었다.
“상처는 어때?”
“다 나았소.”
“벌써?”
“그렇소.”
“철골이 따로 없군. 내상이 상당했었는데.”
“끝장을 보진 않았으니까.”
“그러긴 하지.”
왠지 모르게 겉도는 대화였다.
당연히 위홍련은 이런 삼삼한 대화나 나누는 취미 따윈 없었다.
“뭐가 문제야?”
“…….”
“뱀굴에서 나온 이후로 왜 이렇게 처져 있어?”
“처져 있지 않았소.”
“주둥이 많이 놀린다고 기분이 안 처진 건 아니잖아. 완전 팍 가라앉았구먼, 뭘.”
마동필이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 처진 것은 아니오. 그저 궁금할 뿐이지.”
“뭐가?”
그가 말없이 한옆에 떨어진 거목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선 서량이 가부좌를 틀고 운공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을 거대한 황금빛 여우가 수호신인 양 지키고 앉아 있었다.
위홍련은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정말이지 볼 때마다 그 자태에 감탄이 아니 나올 수 없다.
짐승의 그것이지만 마치 득도한 고승(高僧)처럼 깊고 담백한 푸른 눈.
광채가 흐르는 듯한 황금빛 털이 전신을 덮고 있지만 턱 아래는 풍성한 하얀 털이 역(逆)의 삼각(三角) 형태로 수북하고, 여우임이 분명함에도 다리가 고양이나 범처럼 유연하고 굴강해 뵌다. 실제로 날카로운 발톱이 발 안쪽으로 숨어 있었다.
마치 호랑이와 늑대를 섞어 놓은 듯한, 그러나 여우임이 분명한 거대 영물.
“쟤가 정말 그 쪼깐했던 여우 새끼란 말이지?”
“그런 것 같소.”
“말이 돼?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 상식이라는 게 있는데. 내 팔뚝보다 조금 컸던 여우가 언제 저렇게 커졌대?”
마동필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관계만큼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오.”
“여전히 공자님을 따른다?”
“그렇소. 위 대주도 봤잖소?”
위홍련의 얼굴이 굳어졌다.
“봤지.”
아무리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한들 움직임을 육안으로 좇지도 못했다. 황금빛 돌풍을 일으키며 나타나 삽시간에 홍상호를 물어 죽이는데 그곳에 있던 어떤 고수도 반응을 못 했다.
그렇다. 그것은 짐승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세상 어떤 짐승도 그런 속도로 움직일 수가 없다.
“이가주를 물어 죽이곤 공자님께 대가리를 툭툭 디밀어 댔지. 마치 새끼 때처럼.”
“…….”
“……세상에는 정말 영물이라는 게 있었구나.”
떠들어 대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허담이 퍼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만년화리(萬年火鯉)니, 독각교룡(獨角蛟龍)이니, 인면지주(人面蜘蛛)니 하는 것들이 실제로 존재할 거라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 신화나 전설, 허구의 이야기로 포장된 상상 속 영물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고죽림에서 주웠다고?”
“그렇소.”
“그럼 고죽림에는 저런 영물들이 득실거린다는 거야? 너 어떻게 거기서 살아남았냐?”
마동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과거의 한때를 떠올렸다.
고죽림의 심층부에서 영죽을 베어 와 영기를 취했을 때, 귀물들이 떼로 나타났었다.
고죽림 전역의 모든 귀물들이 몰려들기라도 한 것인지, 무력으로 진압 가능한 숫자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도주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서량의 신들린 무공 덕택에 무사히 숲을 빠져나왔을 때,
숲의 경계에서 연신 으르렁거리던 귀물들 앞에 금호가 다가갔다. 그러자 모든 귀물들이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기 바빴더랬다.
절정고수도 감당하기 힘든 수많은 귀물들이, 이제 새끼에 불과한 금호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정녕 그 자그맣던 금호가 고죽림 최고의 귀물이었단 말인가?’
모르겠다. 분석할 정보의 양이 너무 적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금호가 있는 한 공자님은 안전하다는 것이다. 적사가의 이가주를 단숨에 물어 죽인 금호는 그야말로 최고의 호위라 할 수 있었다.
“거봐, 기분 처진 거 맞네.”
마동필이 위홍련을 돌아보았다.
팔뚝에 붕대를 묶으며, 그녀가 말했다.
“호위무사로 너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존재가 나타나서 께름칙하냐?”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할 순 없겠지.”
“아서라. 경쟁을 하려거든 사람이랑 해. 영물이라도 저건 짐승이야, 짐승.”
“나는 나보다 더 어울리는 호위가 나타난 것 자체엔 불만이 없소. 어쨌거나 나의 바람은 공자님의 안전이니까.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공자님께서만 안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오.”
“근데 왜 똥 씹은 표정이야?”
마동필이 한숨을 쉬었다.
“다만 이제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요.”
입교 후 지금까지 호법, 호위로만 살아온 그였다. 금호의 존재는 대환영이지만 이젠 자신이 할 일이 없어진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위홍련은 그를 이해했다. 그냥 하던 대로 하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말이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서량의 눈이 뜨였다.
스르륵.
은은하게 번져 나오는 적색 안광이 서서히 침잠했다.
“끄응.”
마공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지만 여전히 머리는 무겁다.
적사가에서의 전투로 인해 흘린 피가 한 사발이었다. 게다가 복부의 상처도 컸다. 영죽의 존재를 깨닫고 치유 속도를 가속화했지만 충분히 중상이라 할 만한 상처였다.
슥.
금호가 서량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적절한 때에 도와줬다. 고마워.”
크릉.
“이놈 이거, 목소리도 걸걸해졌구만.”
금호의 머리를 몇 번 토닥여 준 서량이 마동필과 위홍련에게로 걸어왔다. 그러자 금호가 당연하다는 듯 그 뒤를 따랐다.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셨습니까.”
“그래. 넌 괜찮냐?”
“물론입니다.”
“위 대주는?”
위홍련이 자신의 팔뚝을 탁! 하고 쳤다.
“생생합니다.”
“다행이군.”
제 목덜미를 주무르며, 서량이 말했다.
“이런저런 할 얘기가 많지만 일단은 뒤로 미루도록 하자고.”
“예. 하면 지금 바로 거경가로 이동하시겠습니까?”
“그래야지.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어.”
“할 일이요?”
“응.”
서량의 안광에 은은한 살기가 어렸다.
살기 넘치는 눈이 향하는 곳은, 꽁꽁 묶인 방령을 짐짝처럼 처박아 둔 마차였다.
“확인해 봐야겠다. 저 망할 것이 왜 적사가에 기어 들어왔는지.”
그리고 비요왕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