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늪에 빠져도 숨은 쉴 수 있다 (4)
“공자님?”
“왜.”
“아, 앞에 계시는구나. 길이 넓네요?”
“그렇지.”
“근데 여기 왜 이렇게 어둡죠?”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렇…… 악! 야, 마 씨! 내 발 밟지 마!”
“미안하오.”
“아니 젠장, 뭔 길이 이렇게 어둡대? 내공을 써도 흐릿하기만 하잖아? 공기의 흐름도 이건 뭐…….”
“수선 떨 것 없어.”
“저도 그러고 싶지만 하나도 안 보이는 걸 어떡합니까.”
“눈이 안 보이면 귀로, 귀가 안 들리면 코로, 코로 안 맡아지면 촉감에 의지해. 광마대주씩이나 됐으면서 감각이 왜 그렇게 무뎌?”
“말처럼 쉬워야 말이죠. 저는 일단 박살 내고 아작 내자는 주의지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쪽이 아니란 말이에요.”
“단련을 게을리한 변명치고는 너무 조잡한데?”
“마 씨도 똑같을걸요. 그렇지, 마 씨? 아까 내 발 밟았잖아.”
“…….”
“죽일.”
농담처럼 말을 주고받았지만 두 사람은 내심 깜짝 놀랐다.
서량 말마따나 눈이 안 보인다고 길도 제대로 못 걸을 만큼 어설프게 단련하지 않았다. 한데도 두 사람은 이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감조차 못 잡고 있었다.
앞장서 걷는 서량이 아니었다면 분명 헤맸을 것이다. 길이 하나인지, 둘인지도 모르니 평생 갇혔을 가능성도 있다.
‘당연한가.’
동굴의 입구에서부터 설치된 암향진(暗香陣)은 입진(入陣)한 사람의 감각을 극도로 떨어트린다.
내공의 유무나 깨달음의 정도로 이겨 낼 수 있는 진이 아니었다. 서량이 가진 초감각이 아니면 육감(六感)이 뛰어난 사람도 쉬이 뚫지 못한다.
“이제 다 왔다.”
“길기도 기네요.”
“별로 안 길어. 이제 반 각밖에 걷지 않았다.”
“네?! 거의 이각은 걸은 것 같은데요?”
그 역시 암향진의 영향이었다. 감각의 오차를 증폭시키니 시간의 괴리도 크게 느끼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곳은 어떻게 알고 계셨대요?”
서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딸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쿠구궁!
돌과 돌이 긁히는 소리가 상당히 묵직했다. 조금씩 새어 나오는 빛살에 두 사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 왔다.”
담담하게 돌문 안으로 들어선 서량.
두 사람도 눈을 떴다.
“……!!”
위홍련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위홍련보다는 나았지만 마동필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여긴 도대체?!”
천장에 무수히 박힌 야명주는 그 개수만 오십이 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장방형(長方形)으로 된 동굴 내부 곳곳에는 십여 개의 책장과 이십여 개의 작은 선반, 그리고 사람 몸통보다 큰 나무통 다섯 개가 구비되어 있었다.
쪼르르르.
천장에서 졸졸 떨어지는 물은 언뜻 보기에도 무척 맑았다. 구조가 어떻게 된 건지, 가느다란 물줄기가 고인 작은 웅덩이는 넘치지 않고 연신 찰랑이고 있었다.
서량의 얼굴에 아련함이 깃들었다.
‘얼마 만인지.’
호남 최대의 안가, 형산 소향곡의 비밀 거처는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잘 만들어진 안가였다.
방대한 의학 서적과 영약은 물론, 신병이기 서너 자루도 보관되어 있다. 곳곳에 박힌 피습주(避濕珠) 덕분에 항상 적절한 습도가 유지되어 무언가를 보관하기에도 최적이다.
맑은 웅덩이 덕분에 식수 걱정도 없고, 나무통에 가득 쌓인 벽곡단(辟穀丹) 덕에 식량 문제도 해결된다.
편안한 환경은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몇 년은 살 수 있는 장소.
스르륵.
벽을 쓸자 약간의 돌가루가 흩어져 내렸다.
떨어지는 물의 양을 생각하면 돌가루가 튀면 안 되었다. 피습주는 여전히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듯했다.
돌가루를 손에 쥔 서량이 주먹을 꾹 쥐었다.
‘여기서 내가 취할 것은 따로 없어. 하지만…….’
그가 두 사람을 힐끔 바라보았다.
“와아! 여기 뭐야?!”
“세상에.”
“저거 설마 비급인가!”
“의학 서적 같소만.”
“젠장.”
“그보다 이곳 환경 자체가 놀랍…….”
“으아아아! 저 야명주 좀 봐! 하나만 갖다 팔아도 이천 냥은 받겠다!”
두 사람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세인들이 마귀 소굴이라 부르는 천마신교 소속이었지만 놀라는 얼굴은 어떤 사람보다 활기찼다.
한참 놀라던 위홍련은 이내 불신 어린 눈으로 서량을 바라보았다.
서량의 얼굴에 찝찝함이 드러났다.
“왜 그렇게 봐?”
“도대체 이런 장소는 어떻게 알고 계셨대요?”
“그냥저냥 알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딱 봐도 무진장 공들여서 만든 장손데. 살수들의 안가도 이렇게 거창하게는 안 꾸민다고요.”
……괜히 움찔할 뻔했군.
“저 나무통에 있는 거, 저거 벽곡단이죠?”
“그렇지.”
“한 통에 저 정도 양이면…… 세상에, 오 년은 너끈히 버틸 양이네요.”
“눈썰미가 좋구만.”
위홍련은 혀를 내둘렀다.
“대체 어떤 조심성 많은 인간이 이런 장소를 만들었대? 저 책장에 꽂힌 게 의학 서적이 아니라 비급이었으면 말 그대로 기연지처(奇緣之處)가 따로 없잖아요! 물론 지금만도 엄청 대단하지만요.”
“기연이라…….”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기연이라기보다는 그냥 도피처지”
“도피처라뇨? 선대 고수가 후대를 위해 만들어 놓은 기연지처가 아니고요?”
그럴 거면 의학 서적은 왜 구비해 놨겠냐.
의술에도 나름대로 정통한 그였지만 명의(名醫)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저 서적들은 혹시 몰라 구해 놓은 책들로, 유명한 의방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명저(名著)들이었다.
적어도 살수에게는 무공 비급보다도 귀한 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마동필이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혹, 본교의 수뇌부들이 드나들 수 있는 안가입니까?”
“대충 그런 거지.”
둘러대는 듯한 말이었지만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신교에는 적이 많다. 지금이야 잠잠하지만, 혹시라도 중원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긴급 조치를 취해야 할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보통은 근처 지부로 가서 해결하지만 그러지 못할 땐 따로 피난처가 필요할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오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량은 추억에 젖어 들고 있었다.
‘고생 많이 했다, 진짜.’
중원에 퍼진 안가 중 절반은 의천맹이 만들었지만, 절반은 그가 만든 것이었다. 이 안가들을 만들기 위해 쏟은 정성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헤아릴 수 없는 암살의 세월, 중요 인사들을 죽이고선 그들이 가진 보물을 몇 개씩 슬쩍했더랬다. 그 보물 중 대부분을 안가에 가져다 놓았다.
천하제일의 암살자면서 왜 그런 주접을 떨었느냐 물을 수 있지만 서량에겐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실제 그 좋은 실력으로도 수십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었다.
‘역시 사람은 준비성이 좋아야 해.’
이런 식으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공자님.”
“엉?”
위홍련이 침을 꼴깍 삼켰다.
어느새 책장 뒤로 돌아간 그녀가 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더러운 천이 둘려 있었지만, 그 안에 잠재된 신기(神氣)는 숨겨지지 않았다.
“이거 뭐죠?”
신교에서 만든 도피처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참 함부로 만지는구나 싶었다.
서량이 지나가듯 툭 말했다.
“월영신검(月影神劍).”
“크헉! 이, 이게 그 전설의 월영신검이라고요?”
“어.”
월영신검은 백 년 전 천하삼대검수 중 하나로 손꼽혔던 검존(劍尊)의 애병이었다.
무림에 검존이라 불린 고수들이야 많았지만 백 년 전의 검존이 유명한 이유는 그가 낭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사문도 없고 기연도 없이, 오로지 몸으로 부딪쳐 최강의 검객 소리를 들은 입지전적인 인물이 그였다.
“내 생에 월영신검을 보게 되다니…….”
“말이 신검이지 막상 보면 별것도 아니야. 동필이가 가진 묵왕검이 만 배는 더 좋을걸?”
“그래도요!”
“그 자리에다가 짱박아 놔. 너한테 어울리는 검도 아니니까.”
위홍련은 아쉬운 표정으로 책장 뒤에 검을 놓았다. 서량 말마따나 직선적이고 파괴적인 강검(强劍)을 구사하는 그녀에게 월영신검은 너무 섬세했다.
“어? 그럼 이거는요?”
아쉬움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또 다른 검을 하나 꺼내 들었다.
서량은 보지도 않고 말했다.
“청천검(晴天劍)이야.”
“와아.”
“와는 무슨 와야. 월영신검보다 수준 낮은 검인데.”
“검은 그럴지 몰라도 이걸 쥐고 휘두른 사람은 검존만큼 유명하잖아요.”
그 말에도 어폐가 있었다. 명검대협(明劍大俠)은 분명 초절정고수지만 검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다만 무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그는 무림에서 손에 꼽힐 만큼 유명한 이였다. 이유인즉, 강호에 출도한 후 그가 벌인 선행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신교의 교도면서 정파 놈한테 감탄하는 거야?”
“감탄하면 안 됩니까? 사실은 사실인데요, 뭐. 사람이 그렇게 남 위해서 살기도 쉽지 않아요.”
서량이 콧방귀를 퍽퍽 뀌었다.
“남을 위해서 살긴 개뿔. 후무(後無)는 몰라도 전무(全無)하다는 표현은 그럭저럭 어울릴 인간쓰레기였지.”
“네?”
“그놈 때문에 파탄 난 가정만 수천이야. 마음에 안 드는 놈은 꼭 기억해 뒀다가 아무도 모르게 토막을 쳐 대는 살인마에, 여자는 밥 먹듯이 강간하고 어린애를 산 채로 태워 죽이기를 즐겼던 최악의 미친놈이었지.”
“……!”
“애들 비명이 그렇게 짜릿했다나 뭐라나.”
위홍련과 마동필이 입을 떡 벌렸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다니까. 어떤 의미로는 정말 감탄스러운 놈이긴 해.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본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그 어려운 걸 놈은 해냈지.”
위홍련이 인상을 찡그리며 청천검을 땅에 던졌다.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짓이야.”
“괜히 기분 나쁘잖아요. 그런 미친놈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요.”
“너도 미쳤다는 소리 많이 듣잖아? 새삼스럽게 뭘.”
“그런 놈이랑 절 비교하지 마세요!”
“알았으니까 주워. 검을 쥐고 휘두른 놈이 죽일 놈인 거지, 검이 무슨 죄냐?”
“쳇.”
투덜거리며 검을 주워 든 그녀가 흐트러진 천을 대충 묶어다가 본래 자리에 놓았다.
“생각해 보니까 진짜 불쌍하네요.”
“누가?”
“살왕이요.”
순간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왜?”
“명검대협을 암살했다고 오만 욕을 다 처먹었잖아요. 알고 보니 세상을 위해 구국의 결단을 내린 협객이었구만.”
“…….”
“하긴 명검대협이 아니더라도 엄청 많은 사람을 죽여 댔으니까 욕먹어도 싸긴 하죠.”
임무가 떨어지면 적이 기르는 개새끼 한 마리 살려 두지 않는 게 광마대다. 적어도 그녀가 살왕을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하지만 서량은 그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욕먹어도 싸지.’
예전에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생각도 했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이었다고 자위도 해 보았다.
다 부질없는 변명이다.
참작의 여지는 있되 그가 저지른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명검대협 같은 쓰레기들도 많이 죽였지만,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도 암살했던 게 자신이었다.
청천검이 죄가 없으니, 일개 검이었던 그 역시 죄가 없는가?
아니다. 그에게는 큰 죄가 하나 있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자신만의 인생을 거머쥐려 하지 않은 죄.
‘목숨을 걸긴 했지만 결심은 어중간했지. 만약 제대로 결심했다면 그때 난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래, 그렇지.
이제야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달은, 남들보다 한참이나 느린 거북이 같은 놈이지. 영혼만 늙은 어린애에 불과해.
“……그래서 최소한, 착하게는 못 살더라도 제대로는 살아 보려고 하는 거지.”
“네?”
서량은 선반에 놓인 영약 중 가장 좋은 것을 하나 집었다. 본래라면 무공을 회복시키기 위해 자신이 취하려던 영약이었다.
그가 적당히 솟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위홍련.”
갑작스레 이름을 부른다.
이년, 저년 해 댈 때도 있었고 위 대주 혹은 광마대주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름 석 자로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작은 변화에서 오는 진지함을 읽었을까.
상기되었던 위홍련의 얼굴도 살짝 굳어졌다.
“네, 말씀하세요.”
“긴말 않겠어.”
“…….”
“너, 내 사람 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