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탐욕의 마수(魔手) (1)
“이것 참 민망하군요.”
“뭐가 그리 민망하시오?”
호요성이 입맛을 쩍 다셨다.
“제가 한번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번에도 바쁜 걸음을 해 주셨습니다그려.”
무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소한 것에 구애받지 맙시다.”
“커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호요성이 무담의 잔을 채워 주었다.
“굴송차 괜찮으십니까?”
“괜찮소.”
“요새는 향 좋은 찻잎을 구하기가 어려워서요.”
“괜찮소.”
자신의 잔까지 채운 호요성이 빙긋 웃었다.
“일부러 향을 좀 약하게 탔습니다. 제법 마실 만하실 겝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차를 마셨다.
맛이 약한 듯 입맛을 다시는 호요성과 달리 무담은 제법 놀란 듯했다. 물론 대단히 희미한 표정이었지만.
“찻잎 특유의 향이 워낙 강렬하거늘, 이렇게 타니 별 부담이 없소이다.”
“그렇습니까?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호요성이 허벅지를 탁탁 내리쳤다.
“사설이 긴 걸 별로 안 좋아하셨지요? 자, 그럼 오늘은 어쩐 일로 예까지 오셨습니까?”
무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호요성을 바라볼 뿐이었다.
호요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눈빛은 참…….”
“음?”
“에헴! 아닙니다.”
“총군사.”
“예, 말씀하십시오.”
“요새 통 쉬지를 못하시는 모양이오. 눈 밑이 시커멓소이다.”
호요성이 피부를 매만졌다.
“눈 밑만 시커먼 게 아니라 피부도 까칠해졌습니다. 정말이지 요샌 이 짓거리도 못 해 먹겠어요.”
“…….”
“아, 대호법 앞에서 제가 별말을 다 했군요.”
무담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오.”
“저도 그러고는 싶은데 말입니다. 이게 영 마음 같지가 않네요.”
뜨끈한 차를 그대로 비워 낸 호요성이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십니까?”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어서 왔소.”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이번 감찰사 일에 대해서요.”
호요성의 눈이 반짝였다.
“삼공자에 대해 궁금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정확히는 삼공자가 아니라 외부 감찰로 인해 벌어질 일이 궁금하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잠시 침묵하던 무담이 입을 열었다.
“일전 환희원에서 수송대를 보냈을 때, 야수궁의 무리들로 인해 곤욕을 치른 걸 기억하시오?”
“물론입니다. 잊기 힘든 사건이지요.”
“…….”
“한데 그게 왜요?”
“나보다는 총군사가 더 잘 알지 않소?”
무담의 눈이 깊어졌다.
“근래, 광동 북부 인근에 신원을 알 수 없는 고수들이 출현했소. 아직 제대로 된 추적조를 꾸리지 못해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정체가 무엇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소이다.”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모르고 있었소?”
“아니, 알고 있었습니다.”
“한데 어찌…….”
“다만 놀랐을 뿐입니다. 대호법께서는 분명 본교의 방벽이시지만 거기까지 신경을 쓰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 업무 소관도 아닌데 어찌 여기까지 와서 그걸 궁금해하느냔 말이었다.
듣기에 따라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말. 하지만 무담은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몰랐다면 모르되 알고 있는 이상 그 부분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소.”
“아신다 해도 그들에 대한 조사 및 섬멸은 군사부의 소관입니다만.”
“물론 그 또한 알고 있소.”
“그런데도 예까지 오셔서 저한테 물어보시는 이유는 하나겠군요.”
호요성의 눈이 빛났다.
“그 인근 지역에 특별 호위 대상자가 있습니까?”
무담은 새삼 호요성의 날카로움에 놀랐다.
거짓말을 못 하는 성정이라지만 표정도 거의 없는 무담이었다. 그런데도 호요성은 무담이 왜 여기에 왔는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렇소.”
호요성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인정이 너무 빠르신 거 아닙니까?’
역시나 대단한 사람이다. 웃는 얼굴을 방패 삼아 온갖 병장기를 휘둘러 대는 군사란 족속과는 다르다.
그래서 대단해 보였고, 그래서 경계심이 들었다.
사람이란 마음을 주는 대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법이니까. 호요성은 자신 역시 그런 범용한 위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현재 호법 일 조가 비밀리에 특별 호위 대상자에게 향하고 있소. 만에 하나를 위해 우리 역시 조치를 취해야만 하오.”
“걱정하시는 이유는 알겠습니다.”
호요성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확실하게 말씀드리지요. 그 의문의 고수들은 결코 특별 호위 대상자를 건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특별 호위 대상자는 그들의 목표가 아닙니다.”
“호위 대상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소?”
“모릅니다. 그건 철저히 호법원의 소관이니까요.”
“한데 어찌 그리 자신하시오?”
“의문의 고수들이 노리는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대체 그 고수들이 누구요?”
“거기까지.”
“……?”
“대호법께서도 꼭 알아야 할 일이었다면 진즉에 알려 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호요성이 다시 찻잔을 채우며 말했다.
“대호법의 불안감을 없애 드리기 위해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목표가 무엇인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정녕 그것을 원하신다면 지금 말씀드리지요.”
“…….”
“원하십니까?”
물끄러미 호요성을 보던 무담이 고개를 저었다.
“총군사의 말이 맞소. 괜한 불안감에 수선을 떨었소. 사과하오.”
“아닙니다. 특별 호위 대상자는 십 년에 한 번 나타나기도 힘들죠. 대호법께서 긴장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합니다.”
“민망할 따름이오.”
무담이 그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기분이오. 지금껏 이랬던 적이 없는데, 나도 나이를 먹었는지 중원 정세에 자꾸만 신경을 쓰게 되오.”
호요성의 눈이 깊어졌다.
‘나이가 드셔서 그런 게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고수의 감이다.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 지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무담은 맹수 중의 맹수였다.
그 죽지 않은 맹수의 감이 불길한 공기를 감지해 낸 것이다. 아무런 정보가 없어도, 평생을 신교를 위해 헌신해 온 노고수는 보이지 않는 전운(戰雲)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나아가 이 노호(老虎)는 알게 될 것이다. 아니, 이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전운을 끌고 온 사람이 누구인지.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의 중심에 누가 서 있는지.
“저도 잠시 쉴 겸 이런저런 담소나 나눠 보시죠. 차 한 잔 더 드시겠습니까?”
“좋소.”
* * *
가득현(嘉得賢)은 광마대 소속답지 않게 조용한 성격이었다.
눈치도 빠르고 세심한 부분이 있으며, 남들을 잘 챙겨 주기도 한다. 여러모로 광마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실제로 차광보다 강한 무공을 가진 그가 부대주가 아닌 이 조장이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람을 부리는 데에 능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조장이 되었다. 위홍련도 반대했지만 결국 가득현의 뜻을 꺾지 못했다.
무력이 곧 권력인 신교에서 보기 드문 마인.
하지만 실력 하나는 나무랄 데가 없다. 광마대의 실질적인 이인자는 차광이 아닌 가득현인 것이다.
그런 가득현도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강력한 기파에 한껏 기장할 수밖에 없었다.
‘강하다.’
지금껏 봐 왔던 마인들과는 다르다.
활화산처럼 혹은 폭풍처럼 기파를 발산해 내던 고수들과 달리 저 거한(巨漢)의 기파는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마치 심해를 유영하는 고래의 숨결 같다고 할까. 다가오면 올수록 몸에 힘이 들어가고 숨쉬기가 답답해졌다.
‘저 사람이 바로 거경가주 종리산.’
그런 종리산의 뒤로 푸른색 정복을 입은 고수 백여 명이 뒤따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굳은 얼굴에 덩치가 좋았고, 손에는 흑색 철창(鐵槍) 한 자루씩을 쥐고 있었다.
가득현의 눈이 굳어졌다.
‘말로만 듣던 해왕위(海王衛)로군.’
오직 가주의 명만을 듣는다는 거경가 최고의 호위 부대이자 최강의 무력 조직이다. 저들만 보내도 어지간한 중소문파는 반 시진도 안 되어서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증발할 것이다.
가문의 수뇌부는 가주 하나지만 데리고 온 병력은 무려 백 명이다. 일 조까지 있다면 모를까, 이 조만으로는 해왕위와의 결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힘들다.
잠시 후, 소향곡의 입구 십 장 밖에서 종리산이 멈춰섰다.
이미 광마대 이 조는 전원 일자 진을 친 상태였다.
가득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포권을 취했다.
“신교 본단 광마대, 이 조의 조장 가득현이라 합니다. 거경가주를 뵙습니다.”
종리산의 눈이 번뜩였다.
“제법이군.”
담담한 감상평이다.
초면인 사람을 앞에 두고 그리 말한다. 오만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누구도 그를 손가락질하지 못했다.
그는 그러한 강인함과 오만함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감찰 대리, 특수감찰사의 연락을 받고 왔다.”
“알고 있습니다.”
“안내해라.”
가득현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에 기별을 넣겠습니다.”
“기별?”
굵은 눈썹이 꿈틀거린다.
아주 작은 표정 변화. 그것만으로도 일대의 공기가 요동치는 것 같았다.
“여기 있지 않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불쾌하군.”
종리산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 가문의 수장을 불러냈다면 최소한의 예우는 지켜야 할 텐데.”
“…….”
“지금 어디에 있나?”
“저희 뒤에 있는 좁은 길로 들어가셨습니다. 저희에겐 이곳을 지키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지켜라.
누구도 이 안으로 들이지 말란 뜻이었다. 설혹 상대가 거경가주라 하더라도.
상관의 명령이라도 거경가주쯤 되는 거물 앞에서 함부로 할 말이 아니다. 조용하고 세심한 성격이라지만 가득현 역시 광마대의 일원, 마인으로서의 패기는 넘치도록 갖춘 자였다.
종리산의 눈이 가늘어졌다.
번쩍!
가득현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눈에 강렬한 마기가 스쳤다.
주르륵.
가득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종리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찰사에게 전해라. 아랫사람을 잘 둔 덕에 한 번은 참겠다고.”
상대의 실력과 배포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가득현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때였다.
“어이쿠, 무서워라. 이거 뭐 무서워서 감찰다운 감찰이나 되겠어?”
모두의 시선이 좁은 골짜기 안으로 쏠렸다. 그곳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안면을 사선으로 가로지른 흉터가 은근한 위압감을 자아낸다.
등 뒤에는 두 자루의 검을 찼는데, 한 자루는 검폭이 십 촌에 이를 정도로 넓은 기형검이었고 다른 한 자루는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장검이었다.
푸스스스.
그녀가 디딘 땅에서 흐릿한 흑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종리산의 얼굴에 은근한 놀라움이 깃들었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마기가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까? 싸가지 없는 댁의 태도를 우리도 한 번은 참아 줄까? 응?”
“…….”
“그런데 우리한텐 당신처럼 참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
“넌 누구냐?”
위홍련이 씨익 웃었다.
“천마신교 공인 최고의 미친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