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탐욕의 마수(魔手) (4)
종리산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그야말로 극단적인 선택지다. 투왕마가를 봉문시키는데 도우러 가지 않는다면 역심을 품었다고 생각하겠다니, 이게 대체 무슨 논리란 말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날 시험하려 드는 게요?”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내가 판단합니다. 가주께서는 내 질문에 대한 답만 내놓으면 됩니다.”
“이런 부당한……!”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본교에 탄원서라도 올려 보시겠습니까?”
“뭣이?!”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귀 가문을 위해서라도 탄원서는 올리지 않는 게 좋을 듯하군요.”
미소가 가득하던 서량의 얼굴이 어느새 무표정하게 변했다.
“그 탄원서가 자살 성명서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거든요.”
“……나를 핍박하려는 것이오?”
“핍박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저는 교주님의 의지를 대행하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따르지 않겠다 한 것은 교주님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이익!”
스륵.
서량이 용린도를 뽑아 들고는 척 하니 어깨에 걸쳤다.
“대화가 엄한 곳으로 새어 버렸습니다만, 감찰사 입장에선 반드시 확인해야겠군요.”
“…….”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가주는 역심을 품었습니까?”
“……그렇지 않소.”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군요. 금일 밤, 술시(戌時)에 투왕마가로 출발할 겁니다. 가문에 연락을 취해 모을 수 있는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투왕마가 인근으로 집결시켜 주십시오.”
“나는 역심을 품지 않았소. 하지만 투왕의 가문을 봉문시키는 일에 동참하지도 않겠소.”
“그렇습니까?”
“그렇소.”
“그것이 거경가주, 귀하의 선택입니까?”
종리산의 눈에 힘이 가득 깃들었다.
“그렇소. 투왕마가는 칠가의 하나. 우리 모두가 신교 산하 조직이라지만 수백 년간의 인연을…….”
“위 대주.”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위홍련을 부르는 서량.
위홍련이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시지요.”
“본교에 서신을 보내도록. 현 시간부로 거경가를 반역 가문으로 선포한다고.”
순간 일대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위홍련 역시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 외에 달리 적으실 내용은 없습니까?”
“거경가를 대신할 병력을 신속하게 투입해 달라고 요청해. 또한 반역 가문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진압할 부대와 고수를 하산시키라고 전해. 지급(至急)으로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종리산이 버럭 소리쳤다.
“이보시오!”
서량이 몸을 돌렸다.
“금일 밤에 출발할 것이다. 그때까지 모두 휴식을 취하도록.”
완벽한 무시였다.
종리산은, 그리고 해왕위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쿠르르릉!!
그들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기파에 일대의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나는 감찰사를 존중했소.”
서량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종리산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나의 존중을 지나치게 가벼운 것으로 폄하하는군.”
“이 기파, 이 살기. 전투 의지로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그렇다!”
쉬이이익! 터어엉!
어디선가 날아온 한 자루 장창(長槍)이 종리산의 손에 잡혔다. 화려하게 치장된 은색 장창은 언뜻 보아도 굉장한 마병(魔兵)처럼 보였다.
“나는 네놈을 존중했고 신교를 존경했다! 하지만 넌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본가를 반역자의 가문으로 만들었어! 무슨 말을 해도 귀 기울이지 않고 본가를 매도할 생각임이 분명해!”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이건 또 예상외의 대답이다. 재차 열변을 토하려던 종리산이 순간 주춤했다.
“뭐라고?”
“맞다고 했습니다. 가주가 투왕마가를 봉문하는 데에 한 손 거들지 않는다면, 저는 무조건 귀가를 반역의 가문으로 선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요사스러운……!”
“하면 아닙니까?”
“무슨 개소리냐!”
서량이 차갑게 말했다.
“진심으로 역심을 품지 않았느냐 묻는 것입니다.”
“내 말하지 않았느냐! 난 한순간도 신교에……!”
“신교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생각 자체가 역심 아닙니까?”
순간 종리산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찌나 놀랐는지 발산하는 기파가 제멋대로 출렁였다. 그 격한 변화에 모두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량이 말을 이었다. 종리산의 말투가 변한 것처럼, 그의 말투 역시 처음과 달라져 있었다.
“당신은 본교를 너무 우습게 봤군. 왜 첫 감찰 대상 가문이 적사가인지, 그다음이 귀가인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나? 단 한 순간이라도 그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지 못한 건가?”
“……!”
“정말 본교가 당신 가문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나?”
종리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신은 적사가주와 달라. 사람이 다르니 자연 천성도 다르고 사상도 다르다. 하지만 목적은 적사가와 같지. 당신 가문 역시 적사가처럼 본교에서 떨어져 나가려고 하고 있어.”
“…….”
“그러나 당신이 취한 행동을 보고 최소한 한 번의 기회는 주고 싶었다. 굳이 대놓고 말하지 않은 것 자체가 당신을, 그리고 귀 가문을 배려한 거야.”
순간 종리산은 깨달았다.
왜 이 애송이 감찰사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자신을 몰아붙였는지, 극단적인 선택지를 던져 놓고 어서 선택하라 종용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귀 가문에 대한 나만의 감찰 방식이었다. 문서 쪼가리 몇 장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야. 진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다. 설령 역심을 품고 있었더라도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고뇌하는지를 알고 싶었다.”
위홍련은 나직이 탄성을 내뱉었다.
‘그럼 그때의 그 말씀이?’
형산으로 오는 도중, 위홍련은 물었다. 거경가가 허위 장부를 가져오면 어쩔 테냐고. 그걸로 제대로 된 감찰이 가능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때 서량은 이리 답했다.
“그냥 감찰의 범위를 확장한 것뿐이야.”
그렇다. 애초에 거경가를 감찰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건 장부 따위가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과거처럼 여전히 신교에 충성을 다하고 있느냐다. 감찰사인 서량은 거경가를 왜 주시해야 하는지 사전에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주를 불러낸 것이다.
거경가 안에서 이런 짓을 벌였다간 이쪽이 위험해질 테니까.
“허위 장부를 가져왔다면 그 즉시 반역 가문으로 선포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 독립의 마음은 있되 최소한 본교를 속이려 들진 않겠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
“그 마음을 알았기에 다시 한번 기회를 준 거야. 하지만 당신은 뻔뻔하게도 역심을 품지 않았다 피력하면서 나의 부당함을 부르짖는군.”
“…….”
“그렇게 억울한가?”
“……!”
“그렇게 싸우고 싶나?”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정녕 그것을 바란다면, 좋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너를 사로잡아 본교로 호송시키겠다. 더 이상의 자비를 바라진 말아라.”
콰앙!
용린도를 재차 땅에 꽂은 서량이 외쳤다.
“위 대주!”
파바바바박!
광마대가 순식간에 좌우로 퍼져 해왕위를 포위했다.
본래의 해왕위라면 광마대가 움직이자마자 반응했어야 옳다. 하지만 이 압도적인 분위기에 그들은 움직여야 할 때를 놓쳤다.
아니, 그들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심으로 싸우게 되면, 정말 반역 가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는 것을.
화아아악!
서량의 몸에서 강력한 기파가 터져 나왔다.
종리산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상대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건 막연하게 생각했던 수준을 한참이나 웃도는 경지였다.
화르르르륵! 파지지직!
천공을 향해 쏘아 올라가는 붉은 마기.
마기를 발산하는 서량의 몸 주변으로 화려한 번갯불이 번뜩였다. 적사가에서 싸웠을 때보다 훨씬 위험천만해 보이는 암뢰였다.
동시에 저 멀리서 무시무시한 포효가 들려왔다.
카아아앙!!
호랑이나 사자의 포효와는 다른.
그보다 훨씬 날카롭지만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위엄을 지닌 신수(神獸)의 울음소리다.
콰아앙!
종리산과 해왕위 전원은 경악했다.
어느새 서량의 옆에 나타난 황금빛 거대한 여우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우의 주둥이엔 혓바닥이 축 늘어진 대호가 물려 있어 더욱 섬뜩했다.
피범벅이 된 주둥이. 시퍼런 안광을 빛내는 금호의 존재감은 서량에 필적했다.
우우우웅.
용린도에 심상치 않은 바람이 깃들었다.
서량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떨리는 눈으로 서량을 직시하는 종리산.
상대의 실력에 놀랐고, 느닷없이 나타난 괴수의 존재에 경악했다.
하지만 그 순간, 종리산은 생각했다.
‘반역의 가문이라…….’
독립을 원하는 것이 과연 반역인가? 부당하기 짝이 없는 신교와의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정녕 그리도 잘못된 것이었나?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잘못되지 않았지만.
‘다만.’
종리산은 눈을 감았다. 은빛 마창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서량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할 말이 없다면 이만…….”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하셨소?”
“무슨 말이냐.”
“내가 독립을 꿈꾼다는 것을, 신교에서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했잖소.”
처음으로 외부인에게 자신의 목적을 고백하는 그였다.
“다 알고 있었음에도 감찰사를 보냈다…….”
종리산은 탄식했다.
“차라리 귀하의 말대로 이유 따위 따지지 말고 병력을 보내 쓸어 버렸으면 되었을 것을.”
“…….”
“이미 당신을 보낸 것 자체가, 교주님께서 내게 기회를 주신 것이었군.”
서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서량을 보던 종리산이 창을 놓았다.
티이잉!
장창이 아무렇게나 바닥을 굴렀다.
서량이 물었다.
“순순히 포박에 응하겠다는 뜻인가?”
“아무도 모르오.”
“음?”
“신교에서 독립하겠다. 나는 분명 그것을 원했고, 그러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소.”
종리산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은 없소.”
“그래서?”
“나 하나로 끝냅시다.”
“…….”
“그 부덕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상에 물든 것은 오로지 나 하나요. 본가의 어떤 마인도 그것을 모르고 있소.”
“…….”
“지금 이 자리에서 내 목을 베시오. 그리고 본가를 살려 주시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종리산은 한숨을 쉬었다.
“내 목숨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걸 알고 있소. 다만 인정에 호소하는 것뿐이니 내 말을 불쾌하게 생각지 말고…….”
“다시 한번 묻습니다.”
“……?”
“투왕마가를 봉문시키러 가는 길입니다. 저희에게는 병력이 부족하지요.”
“…….”
“저희에게 손을 빌려주시겠습니까?”
“갑자기 왜 또…….”
순간 종리산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군.’
자신의 목숨이 가벼워서가 아니다. 아마 자신을 죽이기 싫어서도 아닐 것이다.
어차피 감찰사를 돕지 않으면 감찰사는 신교에 지원 요청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되면 종리산을 죽인 이유에 대해 신교에 설명해야 한다.
당연히 신교는 거경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가문을 살릴 방법은 하나다.
“……감찰사를 도와 신교를 향한 나의 충정을 증명하리다.”
서량이 칼을 내렸다.
그러곤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가주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감찰 업무에 도움이 된 귀 가문의 호의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오. 오히려 내가 영광이외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보여 주던 냉랭한 조소가 아닌, 진심 어린 호의가 엿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무섭고, 그래서 더욱 신뢰가 간다.
“감찰사의 견장을 차고는 있지만 아직 경험이 미천하여 실수가 잦습니다. 가는 길 내내 많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
“고생하셨습니다. 출발 전까지 쉬시지요.”
* * *
사흘 후.
일행이 투왕마가의 영역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