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배움에는 때가 없다 (3)
병력을 동원하여 내원을 쳐라. 저항하는 자는 죽여도 좋다.
그 뜬금없는 명령에 종리산은 당황했다. 아무리 상대가 예의 없게 나왔기로서니 내원을 공격하라는 명을 내리다니?
하지만 위홍련은 당황하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삐이이익!
내공이 실린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동시에 저 멀리서 무시무시한 마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광마 이 조가 피워 내는 위험천만한 기운이었다.
충격에 숨을 헐떡이던 조양이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이……!”
빠각!
간신히 몸을 일으켰던 조양이 그대로 쓰러졌다. 호포검의 묵직한 검갑에 맞은 그는 반나절이 지나도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파아악!
위홍련이 몸을 날렸다.
소향곡에서 영약을 취하고 전신의 세맥을 뚫은 그녀의 무공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섬세함은 다소 떨어졌을지언정 뿜어내는 기파는 훨씬 강렬해졌다.
차아아앙!
뽑혀 나온 호포검, 고대의 흉병(凶兵)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발산했다.
검까지 뽑은 이상 사태를 평화롭게 해결하기엔 늦었다. 종리산은 창으로 땅을 내리찍었다.
쿠웅! 번쩍!
은빛 장창, 해룡창(海龍槍)에서 시퍼런 마기가 솟구쳤다. 하늘이라도 찢어발길 듯한 기세에 앞서 달려 나가던 위홍련의 신형마저 흔들렸다.
종리산이 특유의 굵은 목소리로 외쳤다.
“해왕(海王)! 삼단(三團)에 명을 전달토록 하라!”
쿠르르릉!
해일처럼 일어나는 기세에 그가 딛고 선 땅 주변으로 실금이 번졌다. 그 기세가 고스란히 실린 목소리는 투왕가의 바깥에서 대기 중인 해왕위에게 전달되었다.
마동필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대단하다.’
마검가주를 보고, 그리고 적사가주의 무공을 보고 칠가 수장들의 수준을 알았다.
종리산은 그간 봐 왔던 수장들과 또 달랐다. 경지는 엇비슷했지만 기질이 완전히 다르다고나 할까. 그가 작정하고 마공을 개방하니 숨쉬기가 답답해질 정도였다.
“여긴 마 호위에게 맡기겠네.”
파아앙!
스치듯 한 마디를 던진 종리산이 신법을 펼쳐 사라졌다. 내원으로 다가오는 투왕가의 병력을 막으려는 것이다.
마동필은 저도 모르게 묵왕검을 꾹 쥐었다.
종리산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는 이곳을 지켜야 한다. 저 멀리서 공자님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계시니까.
한데 기분이 묘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칠가의 수장이 자신에게 이곳을 맡긴다고 한다. 호법원 삼 조장 때는 받아 보지 못했던 신뢰였다.
‘단순히 직위가 달라져서가 아니야.’
종리산 역시 마동필의 수준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껏 검 한 번 뽑아 본 적 없지만 마동필은 칠가의 수장이 보기에도 신뢰할 만한 실력자였던 것이다.
마동필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공자님.’
콰아아앙!
귀를 울리는 폭음과 함께 튕겨 나간 것은 조광이었다.
일그러진 표정에 낭패감이 가득했다. 머리카락은 산발했고 하의 곳곳이 찢어지거나 그을렸다. 한 가문의 수장이라고 보기엔 너무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훅!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를 뚫고 나타난 서량.
양손으로 용린도를 쥔 그의 눈이 시린 살기를 뿜어냈다.
번쩍! 콰르릉!
피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다. 속도도 속도지만 찍어 누르는 도압(刀壓)에 육신을 자유로이 놀리기가 어려웠다.
혼신의 힘을 다해 도세(刀勢)에서 재차 빠져나온 조광.
“당장 멈추지 못하겠느냐!”
서량은 대답 없이 왼손을 툭 내질렀다. 마치 날벌레를 털어 내는 듯한 가벼운 동작이었다.
뭘 하려는 건지 짐작이 안 가 반격을 준비하던 조광은 이내 소스라치게 놀랐다.
퍼어엉!
조광이 허우적거리며 십여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암경(暗勁)?!’
분명 암경은 암경인데 평범한 암경과는 차원이 달랐다. 보통의 암경보다 배는 더 은밀했고 격공장(隔空掌)의 수법으로 쏘아지는 속도 역시 훨씬 빨랐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이 말도 안 되는 폭발력이다. 본능적으로 내력의 방벽을 세우지 않았다면 오장육부 중 하나는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왜?”
파악!
짧지 않은 거리를 삼 보(三步)만에 따라잡은 서량의 주먹이 조광의 가슴팍을 노렸다.
“싸움이 좋다면서?”
퍼엉!
조광의 신형이 흔들렸다.
“그래서 같이 어울려 주겠다잖아!”
“이 자식이!”
퍼버버벅!
서량의 좌측 소맷자락이 터져 나갔다. 전광석화 같은 조광의 권력(拳力)을 막은 대가였다.
‘흡!’
피이이잉!
팽이처럼 몸을 돌린 서량이 암룡각을 구사했다.
암룡각은 짧고 빠르게 후려치는 단타가 아니라 용이 꿈틀거리듯 웅장하고 무겁게 타격하는 기예였다.
반응 속도가 유독 빠른 조광에게 쓸 법한 무공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암룡각의 묵직한 일격을, 어쩐 일인지 조광은 피할 수가 없었다.
퍼어어억!
조광의 눈에 벌겋게 핏발이 섰다.
각법을 막아 낸 양팔에서 짜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타격이 워낙 묵직해서 충격이 진하게 남았다. 상체 전반이 흔들릴 정도였다.
‘이 천둥벌거숭이가!’
스르륵.
몰래 풀숲을 기는 뱀처럼, 혹은 소리 없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낮은 자세로 조광의 면전에 도달한 서량이 용린도를 올려 쳤다.
푸화아악!
비로소 조광의 몸에 도상(刀傷)이 새겨졌다. 좌측 하복부에서 어깨까지 이어진 도상은 생각보다 더 깊었다.
물론 조광이라고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타다다다닥! 빠각!
번개처럼 빠른 십이연각(十二連脚)이 서량의 육신을 타격했다. 절반은 용린도의 도배로 튕겨 냈지만, 나머지 절반은 제대로 맞았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서량.
곧바로 치고 들어가려던 조광은 순간적으로 치미는 핏물에 허리를 숙였다.
“우웨에엑!”
쏟아 내는 핏물의 양이 예사롭지 않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타격이 주는 통증에 미소가 자꾸 일그러지려 했지만.
“방심하면 안 되지. 목숨이 걸린 싸움인데.”
“이……!”
조광의 옆구리에 어느새 작은 구멍 하나가 뚫려 있었다. 십이연각을 구사할 때 보인 잠깐의 틈, 그 틈을 노리고 쏘아 낸 서량의 지풍이 만든 흔적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지풍이 아니었다. 시간이 없어 십분지 일도 담아내지 못했지만, 폭산경의 묘리를 실은 지풍이었던 것이다.
고급의 무리(武理)를 담아낸 만큼 지풍의 속도는 느렸다. 서량의 말마따나 방심하지 않았다면 허용하지 않았을 공격이었다.
결국 조광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입에 담아 본 적 없는 유치한 욕설을 내뱉었다.
“이 치사한 놈!”
“싸움에 치사하고 말고가 어디 있나?”
“닥쳐라! 본가 내원에서 그런 사태를 일으키고도 네놈이 무사할 줄 알았느냐?!”
“어.”
“뭐, 뭐라고?”
콰르릉!
서량의 몸이 붉은 마기로 휩싸여 보이지 않았다.
구유마공의 마관상천지문식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순간 뿜어지는 마기의 방출량이 배로 늘어나 버리니 황당하기도 할 것이다.
“상부에서는 너희 가문을 봉문(封門)시키라고 하였다.”
“……?!”
“투왕마가의 혈기는 마도 무림에서 모르는 자가 없지. 봉문의 지시를 거부한 투왕마가가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고 보고하면 그만이야.”
조광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설마하니 이 애송이 감찰사 입에서 봉문이란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보, 봉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궁금한가?”
철컥!
용린도를 고쳐 쥔 서량.
휘이이이이잉!
다시 한번 몰아치는 칼바람에 놀랍게도 짙은 한기가 묻어 나왔다. 이 장인 종극무간도를 건너뛰고 삼 장인 혈규대홍련으로 넘어간 것이다.
“얌전히 대화를 나눴으면 궁금증을 풀어 줬을 텐데, 아쉽군.”
“이놈! 당장 설명하지 못하겠느냐!”
“시끄러워!”
번쩍!
순간 조광의 눈이 흔들렸다.
‘사라졌……?’
천하십대고수, 그리고 구대마존을 제외하곤 자신보다 경신술이 빠른 자가 없다고 자부하던 그였다.
하지만 그 자부심이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평정심이 흔들렸다손 치더라도 상대의 움직임을 놓쳐 버리다니?!
화아아악!
우측 상단부에서 뿜어지는 거센 한기.
조광의 오른팔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투왕마가가 자랑하는 관산벽뢰(貫山劈雷)란 권법이었다.
콰드드드득!
그의 오른팔에 서리가 맺혔다. 하지만 관산벽뢰의 힘도 만만치 않아서 한빙 지옥의 폭풍도 금세 힘을 잃었다.
‘……?!’
조광의 눈이 흔들렸다.
‘왜 공격이 들어오지 않지?’
이름 모를 이 도법은 조금 전에 한 번 받아 본 적이 있다. 지금껏 겪어 본 적 없던 화력 다음으로 몰아치던 빙설의 도풍, 빈틈을 쑤시고 피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얼음 파편이 되어 죽었을 것이다.
한데 공격이 없다.
지독한 한기는 그대로인데 그 한기와 함께 몰아쳐야 할 도풍이 없었다.
오싹!
조광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맨손이 된 서량이 그의 왼팔을 잡아채고 있었다. 우측 상방으로 이동한 그가, 용린도만 남긴 채 다시 한번 축지(縮地)의 보법을 펼쳐 냈던 것이다.
우두둑!
팔꿈치가 역으로 꺾이려는 것을 오로지 힘으로 버텼다.
투왕마가의 마공은 다른 무공보다 신체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체구는 남들보다 작아 보일지라도 덩치가 산만 한 자들보다 훨씬 강한 근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반응 속도가 빨랐고, 빠른 만큼 단순함을 추구했다. 극도로 빠르고 충분히 강한 무공에 굳이 변화를 줄 필요는 없으니까.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으아압!”
콰드드득!
“크악!”
하지만 그런 괴력도 서량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서량은 내공 없이 바늘 하나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법(殺法)의 대가다. 힘이 박빙이라면 인체의 구조와 신경 반응 체계에 대해 훨씬 잘 이해하고 있는 서량을 당해 낼 수가 없다.
퍼억!
발길질 한 방까지 맞은 조광은 뒤로 벌러덩 쓰러져 버렸다.
휘리릭! 터엉!
허공에서 떨어지던 용린도가 어느새 서량의 손에 잡혔다.
그때, 저 멀리서 마인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시작된 모양이군.”
조광이 이를 갈았다. 부러진 팔과 그곳으로 침투한 경력 때문에 그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설명해라! 대체 왜 본가를 봉문한다는 것이냐?!”
더 이상 싸움이 중요하지 않게 된 그다. 수백 년간 이어 온 가문이 최초로 봉문 사태를 맞이한단다. 싸움박질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궁금한가?”
“이노옴!”
“궁금하면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라. 전원 그 자리에서 대기하라고.”
“뭣이?!”
서량이 자신의 좌측 어깨를 두들겼다. 신교감찰장(神敎監察長)이란 글자가 새겨진 견장이 채워진 곳이었다.
“봉문은 봉문이고 감찰은 감찰이다. 나는 아직 너희 가문을 제대로 감찰하지 못했다. 봉문지령(封門之令)은 감찰이 모두 끝난 후 행하도록 할 것이다.”
조광이 입을 떡 벌렸다.
“알고는 있겠지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말해 주자면, 감찰을 거부할 경우 그 일은 그대로 교주님께 전해진다.”
“……!”
“그리되면 너희 가문이 어떻게 될지는 잘 알고 있겠지?”
우우우우웅.
용린도에 이는 적광(赤光)이 짙어졌다. 마기가 과하게 집약된 용린도 주변으로 붉은 아지랑이가 들끓어 올랐다.
“적사가도 그랬고, 거경가도 그랬다. 나는 그들에게 선택지를 줬어. 하니 너희 가문에게도 선택지를 주겠다.”
서량이 차갑게 말했다.
“봉문(封門)이냐, 멸문(滅門)이냐?”
“…….”
“지금 이 자리에서 선택해라.”
조광은 선택했다.
* * *
투왕가를 나오며, 서량은 말했다.
“가주님.”
“말씀하시오.”
“저는 남은 네 가문을 더 돌아야 합니다.”
“…….”
“다른 곳을 전부 돌고 나면, 그때 저와 한 군데만 더 같이 가 주실 수 있습니까?”
“어딜 말이오?”
“적사가입니다.”
“……!”
서량의 눈이 한껏 깊어졌다.
“이번 특수감찰의 포문을 연 곳이라면, 칠가 감찰의 마무리를 지을 장소로 제격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