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배움에는 때가 없다 (4)
“이상, 현재까지 올라온 특수감찰사의 감찰 내용입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요성이 짧게 읍했다.
“하면 저는 이만 물러…….”
“어떻게 생각하나?”
“예?”
“셋째의 일 처리, 총군사의 입장에선 어떠한가를 묻고 있네.”
호요성은 머리를 긁적였다.
“음…… 솔직히 잘하긴 했습니다.”
“그런가.”
“예. 다소 과격하긴 했으나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칠가의 수장들은 하나같이 상대를 찾기 힘든 용호(龍虎)들이 아닙니까? 감찰사의 무공도 강하긴 하지만, 단순히 힘으로만 처리했다면 이 정도의 결과를 낼 순 없지요.”
이천상이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호요성의 말에 동감한다는 것인지 그저 습관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왕 여쭈어보셨으니 말씀드리는 건데, 특히나 거경가의 병력을 쥐고 투왕가를 봉문시킨 게 놀라웠습니다.”
“그랬나.”
“예. 투왕가를 봉문시키라는 명령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봉문에 반대한다는 걸 빌미로 저희 쪽에서 강하게 몰아붙이는 걸 계획하고 있었지요.”
호요성의 눈빛이 어느새 진지해졌다.
“거경가주는 결코 만만한 위인이 아닙니다. 힘으로도, 설득으로도 짓누르기 힘든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을 설득해서 투왕가를 압박했다…… 적어도 이 일만큼은 찬사를 받아 마땅합니다.”
“듣자 하니 정작 거경가주는 투왕가에서 별 활약이 없었다고 하지 않았나.”
“예. 하지만 거경가주를 투입시킨 것 자체가 대단한 활약입니다. 거경가주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투왕가주가 반발했을 확률이 대폭 상승하니까요.”
술잔을 비운 이천상이 나른한 동작으로 태사의에 등을 묻었다.
“무공만이 아니라 기지(奇智)도 뛰어나다는 뜻이로군.”
호요성이 빙긋 웃었다.
“예.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요.”
“하지만 자네는 셋째를 단순히 좋은 인재라고만 생각하는 건 아닌 듯하군.”
미소 짓던 호요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긴 합니다.”
“위험하다고 생각하나?”
“굉장히요.”
“이유는?”
“목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목적이라?”
“예. 지금껏 헤아릴 수 없는 마인들이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성공한 자들도, 실패한 자들도 있었지요. 그들의 보고를 읽어 보면 임무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제각기 목적이 느껴집니다.”
“…….”
“오로지 임무의 성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 임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 임무보다 생존을 중요시하는 사람, 임무 도중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사람 등등 다들 저마다의 목적이 있지요.”
“셋째에겐 그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호요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당대 신교 최고의 두뇌라 불리는 제 눈에도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이니까.
‘어쩌면 당연한가.’
교주님도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삼공자의 진면목에 대해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고.
천공의 권좌에 앉아 세상을 굽어보는 마신조차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신안(神眼)을 피해 가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혜안(慧眼) 따위에 잡히지 않는 게 당연하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네.”
“예?”
“종잡을 수 없다는 건 자네가 녀석을 필요 이상으로 높게 평가한 것뿐이야.”
우우웅.
언제 따랐는지, 술이 가득 찰랑이는 잔이 둥실 떠올라 이천상의 손 위에 놓였다.
“녀석이 드디어 마음을 먹었어.”
“예?”
“그러지 않고서야 그리 적극적으로 움직였을 리가 없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알고 있지 않나? 감찰을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녀석이 겉돌았다는 걸.”
호요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삼공자는 누구보다도 놀라운 마인이었지만 신교에 잘 녹아들지는 않았다.
기억 상실에 걸려서? 상식을 파괴할 정도로 강해졌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삼공자는 신교라는 환경 자체를 어색해했다. 친분을 나눈 사람들과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격의가 없게 지냈지만, 아닌 사람과는 철저히 거리를 두는 사람이었다.
“본교에 제대로 녹아들지 않아 마인답지 않은 언행을 보이고, 마인답지 못한 사상에 젖어 있었지. 만약 내 제자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뇌옥에서 썩고 있었을 것이네.”
“하지만 본교에 녹아든다 해도 삼공자의 언행이 크게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맞아. 요(要)는, 신교의 바깥세상을 주시했던 녀석의 눈이 지금은 어디를 향하는가일세.”
입술을 달싹이던 호요성이 불쑥 물었다.
“대체 어떤 마음을 먹었다는 것인지요?”
“그건 모르네. 다만 본교에 겉돌았던 녀석이 이젠 제대로 활개쳐 볼 생각이란 것만 유추해 볼 뿐이야.”
“제가 보고서를 받고 임무자들의 목적을 들여다봤던 것처럼 교주님 역시 삼공자의 시선을 보고 계셨던 것이로군요.”
“그렇다네.”
말은 유추라고 했지만 확신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칠가의 감찰은 끝이 났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마검가를 마지막으로 감찰을 끝냈지요.”
“복귀한다는 연락은?”
호요성이 입맛을 다셨다.
“끝났으니 바로 복귀하겠지요. 사실 보고서에 언제 복귀하겠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이천상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가?”
“으흠? 교주님께서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걸 보니 뭔가 일이 터지긴 터질 모양입니다.”
“…….”
“제 언사가 좀 경망스러웠지요? 죄송합니다. 삼공자 때문에 하도 어지러워서…….”
“그놈들은 현재 움직임을 멈추었다고 했나?”
뜬금없는 물음이었지만 호요성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예. 호남 남서부 쪽인데 열흘 동안 제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곧 움직이겠군.”
“그럴 겁니다.”
호요성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답답함이 아닌 후련함이 느껴지는 한숨이었다.
“그래도 삼공자한테는 다행입니다. 여로에 지치기도 했을 텐데 쓸데없이 놈들과 부딪치지 않게 되어서요.”
“…….”
“사실 걱정이 많았습니다. 놈들과 부딪치면 제아무리 삼공자라도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일도 다 끝났으니 이제 돌아오기만 하면…….”
“…….”
“…….”
“…….”
“……그러면 되기는 한데.”
호요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교주님, 설마?”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지.”
호요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급으로 보내겠습니다. 우회해서 귀교하라고. 이미 칠가에 대한 감찰이 전부 끝난 상황에서 그놈들과 부딪칠 필요는 없습니다.”
“놔두게.”
뜻밖의 말에 호요성이 움찔했다.
재차 잔을 채운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마주치게 되면 싸우는 것이고, 길이 엇갈리면 별일 없이 귀환하겠지.”
“교주님. 삼공자는 현재 감찰사의 신분입니다.”
“문제라도 있나.”
“큰 문제입니다. 감찰사라는 직책은 교주님을 대행한다는 상징성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삼공자가 그쪽과 부딪치게 되면……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천상이 흐릿하게 웃었다.
물끄러미 그를 보던 호요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초에 그것을 원하시는군요.”
“딱히 원하지는 않네. 다만 그것이 운명이라면 피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호요성은 놀랐다. 이천상이 설마 운명이란 단어를 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주님. 그것은 운명이 아니라 단순한 방치가 아닐는지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호요성이 고개를 숙였다.
“형법당주의 출교 허가권을 발동시키겠습니다.”
“출교 허가는 군사부의 권한. 자네 뜻대로 하게.”
호요성은 새삼 느꼈다. 이천상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자신이 형법당주를 출교시키는 이유에 대해 알면서도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그것이 ‘운명’이란 것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러게.”
그렇게 호요성이 대전에서 나갔다.
잔을 비운 이천상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아직 모자라.”
의미를 알 수 없는 독백.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자네를 신뢰하네.”
재차 잔을 따르는 이천상의 얼굴 위로 마귀의 환상이 스쳐 지나갔다.
“결과를 두려워하지 말게, 호 군사.”
* * *
“휴우! 드디어 끝났네요.”
속이 다 후련한 듯 위홍련의 얼굴이 유독 밝았다.
“이런저런 일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잘 마쳤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자님.”
서량은 피식 웃었다.
“너한테 그런 말도 다 들어 보고, 확실히 약발이 좋긴 좋구나.”
“에헤이, 또 그러신다. 사람 섭섭하게 그리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잖아요, 진심에서.”
“안다. 너도 고생 많았어.”
“크하하!”
여느 대장부보다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 녀석이 정말 여자인지 의심스러웠다.
“동필이도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공자님.”
마동필은 여전히 깍듯했다. 그간의 세월을 생각하면 조금 풀어질 만도 한데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한데 공자님.”
“엉?”
“그…… 적사가에서 잡았던 인질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느 정도 조치는 취해 놨지만 며칠만 더 놔두면 고열로 위태로워질 겁니다.”
그대로 놔둘 바에야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고, 신교로 데려갈 생각이면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치료를 해 주는 게 낫다는 뜻이었다.
서량은 말없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마차는 빨랐고, 스치듯 사라지는 광경들은 위태로운 등불과 같았다.
그의 얼굴이 점점 진지해졌다.
‘힘드네, 제대로 마음을 먹는다는 건.’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깨달은 지금.
어떻게 나가야 할지는 알고 있지만, 그에 따른 구체적인 생각을 할 시간은 없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계획 없이 달렸다는 것이다.
‘일단 하나는 확실해.’
서량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교주가 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후계자는 되어야 한다.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서량의 입장에선 전혀 다른 문제였다.
후계자가 되면 교내 발언권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해진다. 그때부터 차기 교주가 되기 위한 후계 수업에 들어가며, 실제로 신교의 병력을 좌우할 수 있는 권한도 생긴다.
‘교주가 될 필요는 없어. 아니, 오히려 교주의 자리에 앉으면 제약이 생길 수도 있다.’
이천상의 발언이 귓가를 맴돌았다.
- 난 사람이다. 사람이지만 신으로 불리지. 그렇다면 나 역시 신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교주는 신이다. 신이기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신이기에 갖춰야 할 소양이란 것도 있다.
이천상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천하제일인이다. 그런 그조차 신이 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었다.
만마(萬魔) 위에 군림할 뿐 다스리진 않는 자.
서량은 그 자리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후계자가 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서량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먼 얘기야. 지금은 당장 내가 뭘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그렇다면?
“……일단 적사가부터 들르긴 해야겠군.”
마동필과 위홍련이 의아한 눈으로 서량을 바라보았다.
“홍련.”
“네? 아, 네!”
“지부부터 들러서 죄인을 치료해. 그리고 치료가 끝나면 먼저 신교로 가 있도록 해.”
“공자님은요?”
“나랑 동필이는 들러야 할 곳이 있어. 거경가주한테도 부탁해 놨으니 위험하진 않을 거야.”
“어딜 가시게요?”
“적사가.”
“에?!”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가 워낙 커서 키가 큰 서량이 일어나도 천장에 머리가 닿지 않았다.
그가 위홍련의 어깨를 두들겼다.
“내 제안을 수락해 줘서 고맙다. 본격적인 난장판은 내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도록 해.”
서량이 마동필에게 말했다.
“가자.”
덜컹! 파아악!
말릴 새도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곧바로 뛰쳐나가는데, 어느새 그가 떠난 자리에는 감찰 견장만이 떨어져 있었다.
마동필 역시 곧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위홍련이 외쳤다.
“공자님!!”
어느새 서량과 마동필, 그리고 금호는 저 멀리 사라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