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핏빛 늪에서 악의 연꽃이 피다 (2)
적사가의 대문, 즉 정문은 서방(西方)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그 외에 북문과 남문이 있어 가내 마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동쪽에는 큰 야산을 끼고 있어서 달리 문을 만들지 않았다.
홍여린이 도주했던 곳이 바로 동쪽의 야산이었다. 문이 없으니 거대한 담을 필사적으로 넘어 야산으로 향한 것이다.
그곳은 적사가에서 가장 단단하게 보호받는 곳임과 동시에 유일무이한 퇴로이기도 했다. 서량 역시 가주실 후원에서 그곳을 눈여겨본 바가 있었다.
홍여린과 해왕위 몇을 동쪽으로 보낸 종리산은 서방의 정문과 가장 가까운 북문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쿠르르릉!
저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과격한 굉음에 종리산의 눈이 흔들렸다.
‘강하다.’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정문에서 부딪치고 있는 두 초고수의 무공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불가사의하구나.”
처음 삼공자를 보았을 때 그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삼공자의 실력은 자신과 비교해서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극히 미세한 실력 차가 있긴 했지만, 거의 없다 봐도 무방할 정도의 차이였다.
한데 지금은 어떤가?
투왕마가의 가주와 싸우고 나서 뭔가 단초를 잡는가 싶더니, 다른 칠가를 돌고 온 지금에 와서는 어느새 자신을 뛰어넘어 버렸다.
‘어찌 저리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단 말인가?’
피를 토하는 수련으로도 성장하지 못하는 게 고수의 세계라면, 밥을 먹거나 잠을 자다가도 성장하는 것 또한 고수의 세계다.
당연히 후자의 경우는 천운이 따라야만 가능한 일이다. 일상 속에서 매 순간 깨달음을 얻는다면 강호는 절대고수들이 우글거리는 무신(武神)들의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진짜 재능이란 것인가?’
종리산은 착잡함을 느꼈다.
그 착잡함은 자신에게 없는 재능을 가진 자에게 느끼는 박탈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같은 제자라도 수준이 달라.’
자신의 아들.
현재 천마의 제자로 들어가 있는 아들을 떠올린 그는, 제 아들이 결코 저만한 재능의 소유자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종리산은 탄식했다.
‘진정 하늘이 점지해 준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인지.’
교주가 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설령 둔재(鈍才)였다 해도 그는 아들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는 혈육에게 주는 정(情)을 재능으로 척도 삼지 않았다.
다만 아직은 혈기 왕성한 아들놈이 겪을 성장통이 걱정되었다. 녀석의 성격상 어떻게든 이겨 보려 할 것이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절망감 역시 클 것이다.
‘세상은 넓다. 무공의 강함 만큼이나 마음의 강함도 중요하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때, 저 멀리서 야수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아아앙!
무시무시한 포효였다. 얼마나 매서운 포효였는지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종리산의 눈빛이 돌변했다.
마침내 신호가 온 것이다.
쿠웅!
해룡창으로 땅을 찍은 그가 마해진기(魔海眞氣)를 방출했다.
화아아아악!
사방으로 번져 나가는 강력한 마기.
종리산을 시작으로 적사가를 포위하고 있던 삼백의 마인들이 모조리 기파를 터트렸다. 거경가의 정예들이 발산해 낸 마기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적사가를 심해로 가라앉은 외딴섬처럼 만들어 버렸다.
잠시 후.
퍼어어엉!
공기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종리산의 눈이 깊어졌다.
‘뚫었군.’
대단하다. 얼핏 느끼기로 현재의 삼공자보다 반 수 위의 상대임이 분명한데 용케도 외원을 뚫었구나 싶었다.
후우우우웅!
저 멀리, 외원 인근에서 회색빛 운무가 하늘로 뭉게뭉게 치솟았다.
종리산의 얼굴이 굳어졌다.
“신선폐.”
스스스.
하늘로 올라간 운무가 서서히 옅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때였다.
번쩍!
종리산의 고개가 돌아갔다.
‘남쪽.’
황금빛 마기가 치솟는다 싶더니 어느새 외원 남쪽에서도 회색빛 운무가 치솟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다시 번쩍거리는 광채와 함께 훅 하고 끼쳐 드는 기파가 있었다.
‘여기, 북쪽.’
순식간에 외원을 가로지른 누군가가 종리산이 대기하고 있는 북쪽에 도달했다.
스스스.
또다시 치솟는 신선폐의 운무.
그야말로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이다. 신들린 속도로 움직이며 외원에 깔린 신선폐의 운무를 걷어 내니, 어느새 적사가의 외원 절반이 정화(淨化)되었다.
그리고.
부우우웅! 파지지직!
하늘 높은 곳에서 거대한 황금빛 검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동시에 시뻘건 번갯불이 승천하듯 솟구쳤다.
와르르르!
동시에 저 멀리 동쪽 야산에서 무시무시한 야수기(野獸氣)를 뿌리는 영물이 외벽을 부수고 들어섰다. 홍여린을 태운 금호가 비로소 움직인 것이다.
‘칠보단혼산까지 흩어 냈구나.’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종리산이 외쳤다.
“진입!”
콰아앙! 콰아아앙!
귀를 울리는 굉음과 함게 북문과 남문이 부서지며, 거경가의 정예 마인들이 적사가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 * *
“커헉!”
서량의 낯빛이 시커멓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속화된 무애공의 정화진결이 그의 체내로 침투한 칠보단혼산을 해독하고, 남은 탁기를 내력화(內力化)시켰다.
‘젠장, 죽겠구만.’
무애공의 사 단계, 정화진결에 다다르면 공기 중의 탁기를 모조리 씻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타고난 원정지기(原精之氣)가 강해도 반경 수십 장씩을 정화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한 일을 서량은 구유마공의 힘을 이용해 가능케 만들었다.
덕분에 속이 뒤집힌 진 오래였다.
‘신선폐는 의외로 쉬웠지만…….’
신선폐가 내공을 흐트러트리는 원리는 간단하다. 지류인 세맥으로 침투한 산공독이 본류인 하단전(下丹田)으로 거슬러 올라가 기(氣)의 결속을 풀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호흡을 멈추는 정도로는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모공(毛孔)을 닫아도 기(氣)는 끊임없이 육체와 순환하기 때문에, 피부에 닿기만 해도 독이 침투될 수밖에 없다.
다행이라면 정화진결은 하단전이 아닌 상단전(上丹田)을 중심으로 중단전(中丹田)에서 운용하기 때문에 진기가 흩어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칠보단혼산은 다르다.
주르륵.
중독에서는 벗어났지만 독기가 침투하고 남은 파괴의 흔적까지 낫게 하진 못했다. 토혈은 멈추었지만 코피는 계속 흘렀다.
‘상처 조금만 나도 죽어 나가겠군.’
칠보단혼산은 호흡이 아닌 상처를 통해 침투, 혈액을 응고시키는 응혈독(凝血毒)의 일종이다.
내공은 체내 신경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반응 속도를 올리기 때문에 어지간한 신경독(神經毒)은 견뎌 낼 수 있다. 반면 응혈독은 혈액을 응고시키는 독기를 모조리 뽑아내야 하므로 훨씬 까다롭다.
그래서 무인에겐 신경독보다도 응혈독이 위험하다. 전투 중이라면 더더욱.
거경가의 병력을 대기시킨 이유였다.
“동필이 몸 어때?!”
“괜찮습니다!”
무애공의 중심인 서량과 함께 이동하던 그였다. 어떠한 독기도 마동필을 건드리지 못했다.
서량이 외쳤다.
“박살을 내 버려라!”
휘리리리릭!
묵왕검을 멋들어지게 회전시킨 마동필이 검첨에 금강야차마기를 모았다.
사아아악!
내원으로 통하는 문 너머에서 무시무시한 예기가 피어올랐다. 내원에 집결한 검궁의 검사들이 피워 내는 기운이었다.
앞에는 검궁의 정예들, 뒤에선 목강인이 접근해 오고 있고, 사방 건물에는 내공을 소실한 적사가의 마인들이 포박당해 있다.
그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마동필의 무공이 빛을 발했다.
“염라검장(閻羅劍將).”
치이이이익!
묵왕검에서 누런 연기가 넘실거리며 퍼져 나갔다.
흘러나오는 연기는 철옹성과 같은 검무(劍霧)요,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광기 어린 살의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마동필, 지금껏 실전에서 단 한 번도 펼쳐 보지 못한 법왕검법 전반부의 절초를 꺼내 든다.
쿠구구궁!
마동필의 동공이 황금빛 찬란한 광채를 내뿜었다.
분노의 형상을 한 황금빛 명왕(明王)이 염라의 장수가 되어 돌이킬 수 없는 판결을 내렸다.
“참수종판(斬首終判).”
번쩍!
하늘 높은 곳에서 쏘아져 내려온 반투명한 거검(巨劍)이 죄인의 목을 치는 칼이 되어 떨어졌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내원의 입구가 박살 났다.
검법의 역량을 한참이나 초월한 위력이었다. 극에 이른 검기로 절단력을 극대화하는 원래의 참수종판이 아니었다.
뭉클!
여기저기 흐르던 칠보단혼산의 독기가 부서진 내원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잘했어!”
상체를 수그린 그가 구유마공을 꺼내 들었다.
파지지지직!
무애공의 자리에 지옥의 기운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허억!’
서량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잔존하는 칠보단혼산의 독기가 혈액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문제 될 게 없었다.
화르르륵!
극상의 마기로 날뛰는 독기를 완벽하게 태워 버렸다. 상처 입은 혈맥까지 정상화시키진 못했지만 전투를 이행하기엔 충분한 상태였다.
콰아아앙!
야산 앞 외벽이 박살 났다.
퍼엉! 콰르릉!
남문과 북문도 통째로 무너졌다. 금호를 시작으로 거경가의 병력이 일제히 치고 들어온 것이다.
서량이 다시 한번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드디어 판이 깔렸다.
여전히 이쪽이 불리하지만 싸움이 벌어지면 상대측 전력도 괴멸적인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신선폐를 걷어 냈으니 양측 모두 곳곳에 도사린 칠보단혼산의 독무에 노출된 셈이다.
말하자면 동패구상, 이판사판이다. 다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상대는 절대 함부로 싸움을 걸 수 없을 것이다.
치이이이익!
칠보단혼산의 독무를 피해서 오느라 한발 늦은 목강인은 그제야 상대의 노림수를 깨달았다.
“기가 막히는군.”
무표정하기만 했던 목강인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무식한 짓을 벌이다니, 네놈 정말 마교의 감찰사가 맞나?”
“무식해도 효과만 좋으면 상책(上策)이다.”
자중해야 할 땐 소심할 정도로 몸을 사리고, 치고 나가야 할 땐 과격하단 말을 들을 만큼 힘을 쏟아붓는다.
말 그대로 중간이 없다. 하지만 이 극단적인 성격이 적들에게 통하는 이유는 서량의 기지가 뛰어나고 무공이 대단하기 때문이었다.
“신선폐는 어떻게 해독했지?”
“별거 아니던데? 나한테는 신선폐보다 칠보단혼산이 더 골치야.”
“…….”
물끄러미 서량을 바라보던 목강인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우와아아아!
북쪽과 남쪽에서 거경가의 마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순간, 길을 돌아가지 않고 모든 장애물을 부수며 직선으로 달려온 것이다.
쿠웅!
서량이 용린도로 땅을 찍었다.
“싸움이란 변수가 많고 불공평해야 흥이 오르는 법.”
“…….”
“염통이 쫄깃쫄깃하지?”
오히려 이런 말을 들으면 더더욱 경거망동할 수 없다. 이 또한 상대가 노리는 심리전의 일환이 아닌가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보던 목강인.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희도 죽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나?”
“이쯤에서 마무리 짓도록 하지.”
“뭔 소리야?”
탁!
목강인이 납검했다.
“이대로 물러나자는 얘기다. 공멸할 바에야…….”
“지랄하고 있네.”
모두가 놀란 눈으로 서량을 바라보았다.
서량의 눈빛이 용암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침 재미있어졌는데 물러나긴 어딜 물러나?”
“너…….”
“내가 말했지? 단 한 놈도 도망칠 생각 말라고.”
티이이잉! 푸욱!
등허리에 차고 있던 유성쌍도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더니 이내 서량이 선 땅 앞에 박혔다.
스르릉.
다시 한번 칠야도를 뽑고, 등 뒤에서 용린도를 꺼내 든 서량.
천마병창에 든 이후, 실전에 임하는 데 있어 처음으로 네 자루의 칼을 전부 뽑아 든 것이다.
“난 너희를 모조리 작살 내러 온 거지 적당히 타협하러 온 게 아니야.”
“그렇게 죽고 싶으냐?”
“아니.”
번쩍!
축지의 신보로 움직인 서량이 용린과 칠야를 휘둘렀다.
“죽이고 싶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도검을 휘둘렀다.
콰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