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핏빛 늪에서 악의 연꽃이 피다 (3)
툭.
“…….”
이천상은 떨어진 꽃잎을 바라보았다.
이 경지에 이르기 전에도 유난을 떠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고고했고, 외로움에 사무쳐 괴로워해 본 적이 없었다.
왜일까? 오늘은 어쩐 일인지 판마정에 들고 싶었다. 가끔 오는 곳이긴 해도 오늘처럼 강한 유혹을 받은 적은 없었던 그였다.
그 유혹의 정체가 궁금했고 흥미로웠다. 왜 판마정이 자신을 부르는지 알고 싶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판마정은 교주의 절대마기(絶對魔氣)로 유지된다. 판마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상의 마음을 형상화하여 교주인 이천상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대상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 판마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인가?
바로 이천상의 마음이다.
푸스스스.
떨어진 꽃잎이 순식간에 늪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다. 그것은 늪이었다.
꽃이 만발해 있던 화원이 점차 핏빛 늪지대로 변해 갔다. 그리고 그 늪의 한가운데에서 시커먼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부처의 상징이라는 연꽃.
하지만 그 연꽃은 불길함과 흉악함으로 잔뜩 점철되어 있다. 가히 악불(惡佛)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건 무엇이지?’
자신의 마음을 형상화했으니, 저 연꽃은 자신의 마음 어딘가에 악심(惡心)이 들끓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야.’
아니다. 이천상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제대로 관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스스로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자가 신화(神化)의 경지를 구축할 순 없다.
‘내가 아니면?’
순간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오호.”
그가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
고죽림의 마진(魔陣)을 본 따 만든 판마정의 진. 그 판마정의 진과 연동하는 술가(術家)의 무형진(無形陣)이 그의 심장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고죽림의 마진보다는 수준이 낮기에 고죽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세밀히 들여다볼 순 없다. 하지만 고죽림주(孤竹林主)가 고죽림을 나왔을 때 그 요신(妖神)이 어딜 향하는지, 무슨 상태인지 정도는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저 핏빛 늪에서 핀 시커먼 연꽃은 바로 무형진, 유진도형(幽陣圖形)이 그려 주는 환상이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마(魔)가 개화하는구나.”
고죽림주 시랑은 셋째와 영기(靈氣)로 감응하고 있는바.
이천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실로 빠르군.”
나이 서른도 되기 전, 하물며 주화입마로 모든 것을 잃었던 청년이 벌써 극마(極魔)의 난관을 뚫으려 하고 있다. 불가(佛家)의 무공을 섞어 마중지벽의 강도를 낮췄다지만, 그렇다 해도 불가해한 성장 속도였다.
이천상이 손을 뻗었다.
우우우웅.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마기가 검은 연꽃으로 스며들었다.
스르르륵!
연꽃의 크기가 삽시간에 커졌다. 그 커다란 연대(蓮臺) 위, 형용할 수 없는 붉은 괴물이 아가리를 쩍 벌린 채 포효하고 있었다.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이쪽에서 마음먹고 힘을 실어 주면 저만한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건가.”
그는 셋째에게 말했다. 너에게 경애심을 갖고 있다고.
잠재력이 있어도 노력하지 않는 자는 경멸한다. 그러나 셋째는 본래 가진 잠재력 이상의 결과를 매 순간 보여 주고 있었다.
이천상은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앞으로 셋째가 어떤 모습을 보여 주든, 녀석에게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걸.
녀석은 더 이상 지켜보기만 할 대상이 아니었다. 저 원로원의 구대마존들처럼 함께 일을 해 나가도 될 거장이 된 것이다.
스르륵.
이천상이 손을 내렸다.
동시에 거대해진 연꽃도, 괴물도, 핏빛 늪지대도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두고 봐야겠지.”
하늘 아래, 삼라만상의 이치를 농락하는 유일무이한 천마(天魔).
이 경지에 올라오는 동안, 그의 예상은 단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보다 이날 이때까지 지켜 온 자신의 신념을 더 믿고 따랐다.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
성장하는 자신의 능력과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직관을 분리한다.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이천상은 그러했다.
이유인즉.
“이 마(魔)가 살아서 돌아올지, 세상에 묻혀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예상은 할 수 있지만 예지를 할 수는 없으니까.
이천상이 미소를 지었다. 의미를 알기 어려운 웃음이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겠느냐?”
* * *
칠야도가 빠르고 날카롭게 허공을 가름에, 공기가 반으로 갈라지는 듯한 환상이 일었다.
쩌어어엉!
도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사위를 휩쓸었다.
종리산이 외쳤다.
“물러나라!”
파바바박!
순식간에 십여 장을 물러나는 마인들.
검궁의 검사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검단주님! 부궁주님을 돕…….”
“뒤로 빠져라. 검풍(劍風)으로 독무를 밀어내지도 마라.”
“예?!”
유하검단주가 검으로 땅을 찍었다.
푸스스스!
내원으로 들어오는 칠보단혼산의 독무를 끊임없이 밀어내던 검사들의 검풍이 씻은 듯 사라졌다.
검사들의 얼굴에 당황이 번졌다. 내원 앞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충격파 때문에 단혼산의 독무가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단주님!”
칠보단혼산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는 몸에 탈이 없다. 그러나 상처가 나는 순간, 상처를 타고 독기가 체내로 유입된다.
그렇게 되면 끝이다. 당장 죽진 않더라도 극독에 중독되어 전투 불능 상황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유하검단주, 장국(張菊)이 냉정하게 말했다.
“우리가 독기를 밀어내면 그 독기는 부궁주님께 돌아간다. 혹시라도 부궁주님께서 상처를 입게 되시면 전세가 급속도로 기울게 된다.”
“그러나 부궁주님께서는 결코…….”
“패하실 리는 없다. 그러나 상대도 만만치 않아.”
장국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저들이 이곳까지 밀고 들어온 지금, 이 싸움은 부궁주님과 마교 감찰사 간의 승부로 결정된다.”
“…….”
“경거망동하지 말고 부궁주님을 믿어라.”
검사들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 부궁주 목강인은 검궁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검의 명인이었다. 궁주보다는 약하지만, 궁주 이상으로 검리(劍理)를 깨우친 타고난 검인(劍人)이었던 것이다.
유하검단의 검사들도, 한참 뒤에 대기하고 있는 보검단의 검사들도 모두 자세를 바로 했다.
검궁의 검사는 천하무적. 그 믿음이 흔들려선 안 되는 것이다.
반면 거경가는 달랐다.
“퇴로를 열어 혹시 모를 사태에서의 도주를 대비하라.”
해왕위들의 눈이 흔들렸다.
“가주님.”
가주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해왕위들이 당황하여 되묻는다. 평소 종리산이 얼마나 의리 있고 진중한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종리산이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 역시 일전을 불사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보다 더 큰 대의가 있어.”
해왕위들은 그 대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가주인 종리산의 마음도 편치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리산의 주먹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기시오.’
아무도 모르게 이를 악무는 종리산.
‘우리를 비겁자로 만들지 마시오.’
그는 서량의 말을 떠올렸다.
- 신선폐와 칠보단혼산의 조합이면 극마지경에 이른 고수가 아닌 이상 누구에게나 사지(死地)입니다. 이런 곳에서 죽는 것은 개죽음에 불과하죠.
- …….
-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모릅니다만, 혹시나 그곳에서 제가 당하게 되면 미련 없이 병력을 빼십시오.
- 그럴 수 없소.
- 그러셔야 합니다. 이유인즉, 거경가는 신교의 임무를 받아서 온 게 아니라 제 개인적인 부탁으로 이곳에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 임무든 부탁이든 같은 마인이 당했다는 걸 알았는데 꽁무니를 뺄 수는 없소.
- 꽁무니 빼셔야 됩니다. 그래야 훗날 놈들에게 한 방 먹일 기회라도 생기지요.
- …….
- 물론 전 당하지 않을 겁니다. 이기지도 못할 싸움에 나설 만큼 맹한 놈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약속해 주십시오.
종리산은 약속했다. 종리산이라는 개인이 아닌, 마도 무림의 한 기둥을 담당하는 거경가주로서 약속했다.
그래서 더욱 바랐다. 서량이 이기기를.
죽음보다도 치욕적이고 영겁보다도 길 것이 분명한 복수의 시간을 인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기시오.”
불안함이 실린 종리산의 혼잣말은 커다란 굉음에 묻혀 버렸다.
콰르릉!
비산하는 충격파보다 귀청을 떨어 울리는 굉음이 훨씬 더 위협적이다.
목강인이 이를 갈았다.
“네놈이 정녕!”
“왜? 아까는 그렇게 싸우고 싶어 했잖아!”
사각!
예리한 도격에 목강인의 소매가 잘려 나갔다.
불같은 마기를 피워 올리는 서량이 끔찍한 마기(魔氣)와 소름 끼치는 살기(殺氣)로 범벅이 된 눈을 치켜뜨며 쌍도를 휘둘러 갔다.
“움찔움찔 뒷걸음질만 치지 말고 제대로 들어와 봐!”
칠야도로 좌수 소매를 쳐 내고, 그 위로 용린도를 내리친다.
쿠구궁!
목강인의 목에 핏대가 섰다.
수십 근 중도(重刀)에 파격적인 마기까지 실렸다. 그 무자비한 강격에 용린도를 막은 장검이 부러질 듯 떨려 왔다.
‘강하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정말이지 엄청난 힘이었다. 깊은 내력으로 자아내는 힘이 아니라 그냥 타고난 힘이 강했다.
게다가 그 힘을 절묘하게 조율해서 휘두르는 도법은 얼마나 수준이 높은 것인가.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 지고한 무리(武理)가 깃들어 있어 받아 내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놈…….’
퍼퍼퍼펑!
쏟아지는 맹공을 모조리 쳐 내는 목강인.
찰나의 시간조차 아까운 이 접전 속에서 그는 서량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다른 건 일절 생각하고 있지 않아.’
불꽃 같다. 그리고 번개 같다.
마기로 잔뜩 물든 상대의 눈은 오로지 파괴 의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뒤가 어떻게 되든, 눈앞에 보이는 적부터 박살을 내겠다는 살의만이 번득였다.
왠지 모를 씁쓸함에 목강인이 눈을 감았다.
쩌어어엉!
갑작스레 커진 반탄력. 서량이 튕기듯 후방으로 물러났다.
“좋다.”
번쩍!
재차 눈을 뜬 목강인의 눈에 무시무시한 귀기가 서렸다.
“판은 네가 만들었지만, 이 도박에서 승리하는 자는 내가 될 것이다.”
“해 봐, 인마!”
퍼어엉!
재차 달려드는 서량은 이전보다 더 강렬한 마기를 발산해 내고 있었다.
대량의 독기로 인해 혈맥이 다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폭발적인 감정으로 달아오른 마기가 빠른 속도로 몸을 치료하고 있었다.
목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콰아앙!
“큭!”
서량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용린도와 칠야도를 교차해서 겨우 막아 냈지만, 두 팔이 희미하게 떨려 왔다.
치이이이익.
장검에서 피어오르는 청록색의 귀기.
그 기괴한 기운이 검신(劍身)을 모조리 뒤덮었다.
쩌저저정!
서량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검신을 뒤덮은 청록색 귀기는 여전했지만, 그 빛에 가려져 형체가 사라진 검신이 수백 조각으로 부서진 것을 깨달은 것이다.
빛의 검, 귀기의 검.
목강인 최고의 무공인 귀안광검(鬼眼光劍)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일검(一劍), 광성(光成).”
우우우우웅!
빛의 검신(劍身)이 파장을 일으키며 공기 중으로 번져 나갔다.
순간 모두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워졌다. 저 광검을 만든 순간, 누구도 목강인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무참(撫斬).”
번쩍!
청록색 거대한 검광(劍光)이 서량을 세로로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