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핏빛 늪에서 악의 연꽃이 피다 (4)
쩌억.
서량을 베고 지나간 검광이 내원의 외벽을 수직으로 갈라 놓았다.
보는 이의 눈을 의심케 할 절대의 일검이다. 이 일검은 여느 검기(劍氣)와는 차원이 달랐다.
돌이 아니라 강철로 만들어진 벽이라도, 아니 만년한철로 만들어졌어도 베어졌을 것 같다. 세상 어떤 물질도, 존재도 이 일격을 막아 낼 수는 없을 듯하다.
모두가 이 무시무시한 검격에 경악하고 있을 때.
차르릉!
칠야도가 땅에 떨어졌다.
종리산의 눈이 커졌다.
“삼공자!!”
스르르륵.
반으로 갈라진 서량의 몸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목강인의 검격에 경악했던 모두는 다시 한번 놀랐다. 분명 반으로 쪼개졌는데, 그 쪼개진 몸이 연기처럼 흩어진 것이다.
그때,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끽소리도 못하고 죽을 뻔했군.”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어느새 서량이 삼 층 건물의 꼭대기에 서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강인의 눈이 빛났다.
“이형환위(移形換位).”
보법 최고의 경지 중 하나. 몸은 번개처럼 이동하지만 강한 진기의 흔적이 그림자를 남긴다.
보란 듯이 용린도를 어깨에 걸친 서량이 왼팔을 들었다. 광검의 일격을 미처 피하지 못한 왼팔이 피에 물들어 있었다.
“이제야 마음을 먹은 거냐?”
번쩍!
한 줄기 광검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서량이 서 있던 건물의 지붕 끄트머리가 예리하게 베어져 날아갔다.
쾅!
잘려 나간 지붕의 파편이 거센 충격음과 함께 목강인에게로 날아들었다. 참격을 피한 서량이 발로 차서 날린 것이다.
목강인이 왼손을 휘둘렀다.
퍼어어엉!
날아온 지붕 파편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었다.
후욱!
흩어지는 가루 너머, 석양을 가린 채 양손으로 용린도를 든 서량이 나타났다.
콰르르릉!
번뜩이는 귀안에 놀라움이 어렸다.
‘이놈은 정말이지…….’
귀안광검의 일초를 피한 것도 놀라웠다. 정확히는 상대의 보법이 이형환위에 도달했을 정도로 깨달음이 깊다는 데에 놀랐다.
하지만 이형환위는 아무나 펼칠 수 없는 기예인 만큼 내력 소모도 극심한 무공이었다. 진기의 흔적이라곤 해도 잔영을 남길 만큼의 속도를 구사하는데 내력이 남아돌겠는가.
한데도 두 번째 광검까지 피하더니만, 이전에 펼쳤던 도법보다 한층 강한 참격을 보여 준다.
‘대체 이놈의 내공은 얼마나 깊은 겐가?!’
더 놀랄 게 있나 싶었더니만, 여전히 불가사의한 능력을 보여 주는 상대.
퍼어어억!
목강인의 몸이 주춤했다. 약간의 빈틈을 놓치지 않은 서량이 각법을 후려친 것이다.
‘다시.’
검사의 마음은 명경지수를 유지해야 하는 법. 놀라움에 흔들렸던 자신을 반성하며 그가 재차 검을 휘둘렀다.
번쩍! 번쩍!
허공을 가르는 광검에 서량의 몸이 몇 번이나 움직였다.
허공에 떠 있음에도 발판이 있는 것처럼 퉁! 퉁! 소리를 내며 잘도 움직인다. 그 신들린 몸놀림에 좌중은 감탄조차 못 하고 입을 헤 벌릴 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접전이 오갔을까.
우우우우웅.
귀안광검에 깃든 빛이 조금, 아주 조금 약해졌다.
그 순간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파아아악!
빛살처럼 날아와 주먹을 휘두르는 서량.
도법이 아니라 권법이다. 제천기의 연환비폭권이 한 주먹으로 펼쳐졌다.
퍼버버버벅!
목강인의 소맷자락이 갈기갈기 찢겨 날아갔다.
연환비폭권은 두 주먹을 이용, 전신의 탄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후려치는 무공이다. 주먹 하나로 연환격을 펼치는 건 신체 구조상으로도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서량은 그걸 해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부우우웅!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목강인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번쩍!
하단에서 상단으로 솟구치는 귀신의 검.
스륵.
서량이 어느새 뒤로 물러났다.
광검이 쑤시고 들어올 때는 절대 마주하지 않고, 검을 거두면 폭풍과도 같은 공격을 쏟아 낸다.
목강인의 눈이 번뜩였다.
‘내공 소모를 노리고 있군.’
귀안광검은 내공 소모가 심한 무공이었다. 애초에 진기를 이만큼이나 집약시키는 것 자체가 평범한 무사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서량은 목강인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너의 방식이냐.’
마치 거대한 들소를 사냥하려는 맹수를 보는 것 같다. 위험한 뿔은 철저하게 피해 내면서, 어떻게든 목줄을 물어뜯어 죽이려 드는 포식자의 사냥 방식이다.
그는 상대의 노림수를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비무가 아니라 생사(生死)가 걸린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치이이이익!
광검에 이는 빛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속전속결로 끝내 주마.’
파아아악!
목강인이 신법을 펼쳤다.
삼 장 남짓한 거리, 보법으로 좁혀도 될 거리를 신법으로 좁힌다.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충분한 접근 방식이었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퍼엉!
목강인의 몸이 주춤했다. 서량이 내지른 장력을 피하지 않고 몸으로 버틴 것이다.
이를 악문 그가 광검을 들어 올렸다.
“이검(二劍), 광운(光雲).”
지이이이잉!
짧은 순간, 광검 주변으로 청록색 운무가 번졌다.
축지신보를 펼치려던 서량은 일순 당황했다. 사방으로 번진 운무에 이동 경로가 모조리 막힌 것이다.
목강인의 입에서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쇄혼(碎魂).”
후욱!
내리쳐진 광검에 대량의 공기가 빨려 들어갔다.
마치 마동필이 펼친 법왕검법의 비기처럼 보이는, 하지만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빛의 거검(巨劍)이 서량의 머리 위로 퍼부어졌다.
콰아앙!
귀안광검으로 펼쳐 내는 삼절귀영검, 그 두 번째 초식인 쇄혼은 초식명처럼 상대의 혼마저 잘게 부수겠다는 의지와 위력으로 꽉 차 있었다.
마동필의 눈이 경악으로 흔들렸다.
“공자님!”
훅!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를 뚫고 나타난 서량이 재빨리 목강인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헉헉!”
토해 내는 숨결이 무척이나 거칠었다. 피범벅이 된 그의 몸은 굉장히 위태로워 보였다.
목강인의 눈이 커졌다.
“그걸 견뎠단 말인가?”
후우우우웅!
용린도에 묵직한 도풍이 일었다.
“이번엔 위험했어. 진짜 죽을 뻔…… 우웨에엑!”
서량이 피를 토해 냈다. 전신에 그물처럼 그어진 검상으로 칠보단혼산이 스며들었던 것이다.
마동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종리산의 입술은 하도 씹어서 너덜거리고 있었다.
‘큰일 났다.’
차앙!
검을 빼 든 마동필이 서량에게 달려들려 할 때.
“크아압!”
콰앙!
강한 진각과 함께 전신 가득 구유마기가 일렁였다. 서서히 굳어지던 혈액이 다시 툭 하고 터져 나왔다.
“칠보단혼산이라…… 이거 좋은데?”
서량이 씨익 웃었다. 미소 짓는 그의 얼굴 위로 마귀의 환상이 스쳐 지나갔다.
무뚝뚝하기만 하던 목강인의 얼굴에도 비로소 경악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대체 넌 정체가…….”
“좋은 건 나눠 먹어야지!”
파아악!
용린도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목표는 당연히 목강인이었다.
터어엉!
용린도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광검의 빛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충분한 위력을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서량이 움직였다.
스르륵.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는 서량.
손에는 아무것도 쥐지 않았고 풍겨 내는 마기의 양도 미비하기만 하다.
목강인은 내심 의아해했다.
‘뭐지?’
달리 노림수가 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평범한 걸음걸이였다. 두 눈에 전투 의지는 확실히 보였지만 마기도, 살기도 이전만 못 했다. 아무렇게나 검을 휘둘러도 베여 죽을 것 같은 허점투성이의 자세였다.
‘자포자기인가?’
칠보단혼산에 중독된 몸으로도 거침없이 움직이는 놈이다. 자포자기 따위를 할 리가 없다.
그럼?
‘아니다. 이럴 때가 아냐.’
의아해할 필요 없다. 생사를 가르는 싸움에선 상대를 기다려 주는 것도, 쓸데없이 긴장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법이다.
그저 상대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
목강인이 힘차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였다.
‘……?’
땅을 박차야 할 발이 여전히 허공에 머물렀다. 목강인의 눈이 커졌다.
‘억!’
눈꺼풀이 점차 위로 올라가고, 이마에 주름이 잡히는 게 서서히 느껴졌다.
발을 내딛는 것도, 눈을 크게 뜨는 사소한 동작까지도 한없이 느려졌다. 사고의 속도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는데 시간만 느려진 것 같았다.
‘이게 뭐지?’
대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지?
우우우웅!
그때, 강렬한 도명과 함께 세 자루의 칼이 허공 높이 날아올랐다.
치리리링!
날아오른 칼들은 서로 미친 듯이 부딪치며 어느새 서량의 몸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저건?!’
칠야도, 그리고 유성쌍도.
그리고 튕겨 나갔던 용린도까지 날아와 서량의 몸 주변을 빙글빙글 돈다. 네 자루의 칼날이 한 사람의 몸을 호위하듯 도는 광경은 신비로움의 극치였다.
하지만.
치이이익!
몸을 도는 네 자루 칼에 마기가 실리니 그때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마치 죽어서도 한(恨)이 남아 귀천하지 못한 원혼들이 서량을 호위하는 듯했다.
어찌 되었건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목강인은 전신의 힘을 끌어모았다.
‘이이익!’
그러나 그의 수고는 헛것이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움직이지 않는 거냐!’
세상이 느려진 것도, 꿈속을 거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마음대로 움직이질 못하는 것인가!
“인화도법(靭禍刀法) 사장(四章).”
우우우웅!
서량의 목소리가 거대한 울림이 되어 목강인의 귀를 파고들었다. 차가운 비수로 귀를 쑤시는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입술을 깨물며 발에 힘을 주던 목강인.
‘……!’
푸스스스.
아직도 땅에 닿지 못한 발. 그 발밑에 깔려 있던 흙이 반 자 높이로 떠올라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사아아악.
땅에서 희뿌연 연기가 올라왔다. 용암처럼 뜨거운 화기(火氣)와 북해의 빙산보다도 차가운 한기(寒氣)가 부딪치며 만들어 낸 연기였다.
‘역장(力場)?’
이건 적사가의 정문에서 놈이 보여 줬던 무공인데?
‘헉!’
마침내 그는 깨달았다. 자신의 움직임이 남들과는 달리 왜 이렇게까지 통제되고 있는 건지.
‘허공섭물(虛空攝物)!!’
상대의 의지가, 살기가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그래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거기서 목강인은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상대가 자신의 광검을 피한 것은 자신의 힘이 떨어지길 바란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였어.’
종극무간도의 화기가, 혈규대홍련의 한기가, 그리고 두 음양기를 묶어 두는 지옥풍이 목강인이라는 한 사람을 역장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이 일격에 감히 대응조차 하지 못하도록.
마치 지옥 염왕(閻王)의 심판을 앞두고 포승에 묶인 죄인처럼 만들기 위해.
“어도(馭刀).”
치리링!
몸을 돌던 네 자루의 칼들이 모조리 목강인을 향해 겨누어졌다.
“…….”
잠시간의 적막.
서량의 입에서, 과거 철혈성의 철왕팔세를 몰살시킨 전설적인 무공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유혼비천(幽魂飛天).”
꺄아아아아악!!
적사가 일대를 뒤덮은 소름 돋는 울음소리.
크기가 다른 네 자루의 칼이 목강인을 향해 일시에 쏘아졌다.
퍼퍼퍼퍼펑!!
목강인이 선 자리가 순식간에 초토화가 되었다.
퍼어엉! 사악!
거대한 먼지를 일으킨 마병(魔兵)의 폭격.
그 폭격은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먼지구름을 뚫고 튕겨 나온 칼들이, 다시 목적지를 향해 겨누어지며 무서운 속도로 쏘아지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퍼퍼펑! 끼기기기긱!
찢어지는 굉음 뒤로 칼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귀신의 울음처럼 들려온다.
끼기기긱! 콰르릉!
모두의 얼굴이 공포와 환희로 젖어 들었다.
단순한 허공섭물과는 다른, 오로지 극마지경에 든 절대고수만이 펼칠 수 있다는 무신(武神)의 경지를 목도한 것이다.
“……이기어(以氣馭)?!”
콰르르릉!
마지막으로 울린 커다란 굉음과 함께 네 자루 칼들이 아무렇게나 튕겨 나왔다.
“허억! 허억!”
서량이 풀썩 무릎을 꿇었다.
창백해진 안색. 코와 입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공자님!”
마동필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툭.
발 앞에 떨어진 유성쌍도 두 자루를 주워 든 서량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쿨럭! 빌어먹을!”
고개를 쳐든 서량의 눈이 일그러졌다.
“역시 완벽하지 못했나.”
퍼져 올라가며 흐려지는 먼지구름 사이.
훅!
피투성이가 된 목강인이 귀신같은 얼굴을 하며 돌진해 왔다. 어디에 숨겨 두고 있었는지 한 자루 단검까지 손에 든 채였다.
파아악!
마동필이 말릴 새가 없었다. 서량 역시 목강인을 향해 마주 돌진했다.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미친 듯이 도검을 휘둘렀다.
푸화아악!
두 사람의 피가 스며들어 검붉어진 땅이 섬뜩한 늪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