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핏빛 늪에서 악의 연꽃이 피다 (5)
쩌저저정! 서걱!
단검이 베고 지나간 서량의 가슴에 깊은 검상이 드러났다.
푸화악!
올려 친 홍도가 단검을 튕기고, 드러난 어깨를 청도가 갈랐다.
퍼어억!
목강인의 입에서 울컥 피가 배어 나왔다. 올려 친 슬격(膝擊)에 복부를 맞았다. 내력의 방패는 건재했지만 내상이 심해서 그조차도 큰 충격이 되었다.
빠각!
검사라고 날붙이만 쓰진 않는다. 좌수 수도(手刀) 일격, 서량의 어깨에도 검상이 새겨졌다.
극심한 내공 소모로 두 사람 모두 파괴력 넘치는 무공을 구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둘 다 극의를 향해 나아가는 무인들, 내공이 없다고 실력까지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짧은 거리에서 휘몰아치는 도검의 경력은 이전보다 훨씬 살벌해 보였다.
쩌정! 따아앙!
날카로운 일격이다. 짧은 단검을 휘둘렀는데 그보다 긴 청도가 좌측으로 홱 젖혀졌다.
투우웅!
서량이 울컥 피를 토했다. 목강인의 장타(掌打)에 가슴을 가격당한 것이다.
서걱!
목강인 역시 후속타를 날리지 못했다. 그 짧은 순간, 장타를 내친 오른팔을 홍도가 베어 버린 것이다.
두 사람의 싸움은 그런 식이었다. 어느 한쪽이 우위를 점한다 싶으면 절묘한 반격으로 역전시키고, 드디어 끝이 나는가 싶으면 생각지도 못한 기술로 상황을 다시 반전시킨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살벌한 싸움. 흘린 피가 한 바가지였지만, 둘은 그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놈.’
목강인의 귀안에 당황이 깃들었다.
‘도대체 이놈 정체가 뭐지?!’
신분이 아닌 인간 본질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냥 쇄혼도 아니고 귀안광검으로 펼쳐 낸 쇄혼이었다. 광검쇄혼(光劍碎魂)이라면 천하십대고수라도 쉽사리 받아 내지 못할 무공이라 그는 자신하고 있었다.
그 절대의 검격 속에서 용케 살아남았구나 싶었더니, 칠보단혼산의 독기도 물리쳤다.
거기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치상(治傷)에 특화가 된 양생술이나 해독(解毒)에 능한 독공(毒功)을 익혔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무공만큼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쪽짜리지만 분명 어검술이었다.’
어검(馭劍), 혹은 어검(御劍).
마음으로 검을 다스려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는 지고한 경지다. 조화지경, 극마지경에 든 초월자들이나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천외천의 경지인 것이다.
‘완벽하진 않았어. 그러나 무공 자체의 수준은…….’
귀안광검은 검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지인 어검과 심검(心劍)에 이르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놈의 반쪽짜리 어검술은 귀안광검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귀안광검보다 훨씬 수준 높은 깨달음이 필요한 초식을 구사했다.
‘인화도법이라고 했던가.’
어검술을 초식에 결부시켜 파괴력을 극대화한 것이라면 이건 보통 무공이 아니다. 한 세대에 하나 나오기도 힘든 극상승의 도법임이 분명했다.
‘설마 마교주의 후계자?!’
이립(而立)도 안 된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상승의 경지. 검궁의 부궁주인 자신과 박빙을 이루는 전투 경험을 보면, 마교의 후계자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그때, 서량이 발을 올려 쳤다.
한 걸음 물러서 거리를 벌리려던 목강인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냥 공격이 아니라 발등에 흙더미를 얹어 휘두른 일격이었기 때문이다.
파사사삭!
그의 얼굴이 흙범벅이 되었다. 돌조각에 긁힌 볼 여기저기에 핏방울이 맺혔다.
제아무리 목강인이라고 해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으로 인정한 상대가 이리 치졸한 수작을 부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크합!”
번쩍!
번개처럼 단검을 휘둘러 후속타를 막아 가는 목강인.
쩌어엉!
단숨에 다리를 베어 내려던 서량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단검의 검신은 짧았지만, 그 검신에 어린 기(氣)는 삼 척 장검보다도 길었다.
‘빌어먹을.’
제대로 일격을 먹일 수 있는 기회였다. 그 기회가 목강인의 본능 때문에 막혔다.
‘더 이상은 안 돼.’
고죽림에서 취한 고순도의 영기(靈氣)를 조화지경의 깨달음으로 마기화한 것이 현재 서량의 내공이었다.
그 효율은 여타 고수들의 내공과 수준을 달리한다. 그래서 인화도법처럼 내공 소모가 심한 무공을 연달아 쓰고도 멀쩡한 것이다.
그러나 유혼비천은 다르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불리해.’
유혼비천의 어도술(馭刀術)은 마지막 초식을 제외한 인화도법 최강의 초식이었다.
이기어도술을 접목한 초식인 만큼 절대적인 위력을 자랑하며 지옥풍과 무극도, 대홍련의 연환삼장을 몰아 쓰는 것보다 더 많은 내공을 요구한다.
불행하게도 지금의 그는 유혼비천을 온전히 쓸 수가 없었다. 깨달음은 충분했지만 마공이, 육신이, 내공이 그 힘을 담을 정도로 선천화(先天化)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목강인을 죽였어야 했다. 죽이진 못했더라도 최소한 전투 불능 상태로는 만들었어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다.
‘속전속결!’
이전에 목강인의 다짐을 이제는 서량이 하게 된다.
그가 땅을 박차며 홍도를 던졌다.
피이이잉!
이름 그대로 유성처럼 쏘아지는 칼날이다. 목강인이 상체를 수그렸다.
사악!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홍도가 돌벽에 박혔다.
목강인이 이를 갈았다.
“치졸한 놈! 그렇게 안 보았…….”
빠각!
그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회전하며 접근한 서량이 팔꿈치로 안면을 가격한 것이다.
목강인이라고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안면을 강타당한 동시에 단검으로 서량의 옆구리를 찔렀다.
푹!
날카로운 통증에 머리털이 삐죽 선다.
천만다행히도 단검에 내공이 실리지 않았다. 안면에 일격을 허용하며 내력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빠각!
목강인이 서량의 옆구리에 박아 넣었던 단검을 놓쳤다. 오른팔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터어엉!
상단으로 튕겨 나간 왼손이 청도를 놓쳤다. 서량의 왼팔이 부러져 버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발을 내질렀다.
퍼어억!
거센 충돌과 함께 서량과 목강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로 쓰러졌다. 뼈가 부러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숨통이 턱 막히는 공격이었다.
“쿨럭! 이놈!”
목강인이 쓰러진 상태에서 용케 일어나 달려 나갔다. 광검을 만들어 낼 만큼 고밀도로 농축되었던 진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귀신과도 같은 안광은 여전했다.
서량은 이를 악물었다.
‘염병.’
이거 좆 됐는데?
목강인의 육체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탄탄했다. 공격의 횟수는 비슷했지만 타격을 받아 내는 내구력이 달랐다.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야.’
완전한 조화, 치우침 없는 균형.
내공의 수준, 무공의 수준, 그리고 육체의 수준이 완벽하게 일치되어 있다.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반면 서량은 달랐다.
정기신(精氣神)은 일체화가 되어 있되 그의 육신과 내공이 깨달음을 쫓아가지 못했다. 깨달음은 이미 한참 전에 극마지경에 도달해 있었지만, 육신과 내공은 그러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氣)와 체(體)가 끊임없이 깨달음을 쫓아가고 있기에 빠른 성장이 가능했지만 불균형은 여전하다. 깨달음이 낮아도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일치된 목강인보다 불안정한 것이다.
쐐애애액!
어느새 접근해 온 목강인이 서량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서량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젠장! 이걸 허용하면 진짜 죽겠…….’
퍼어엉!
“어억?!”
서량을 향해 발을 휘두르던 목강인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발등부터 정강이 전체가 얼얼하다. 코앞에서 폭발한 경력 때문이었다.
목강인은 당황했다.
‘아직도 그런 힘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반면 서량도 당황했다.
“뭐, 뭐야?”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저 일격을 받아칠 수 있는 제천기의 살법뿐이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무공은 폭산경이었다. 이전, 적사가주 홍관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던 폭산경과 강벽수의 합작이 떠올랐다.
그 수법이 불안정하게나마 튀어 나갔다. 의식하지도 못한 채.
“이게 뭔…… 컥!”
퍼억!
서량이 땅을 굴렀다. 재차 다가온 목강인에게 일격을 허용한 것이다.
하지만 서량은 죽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재빨리 일어서서 엉거주춤 자세를 잡는 서량의 몸에서 마기가 재차 불타오르고 있었다.
목강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괴물 같은 놈.”
설마하니 자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 정도로 서량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절대 살려 둬선 안 될 놈이로구나.”
우우우웅!!
순식간에 전신을 뒤덮은 청록색 귀기.
목강인이라는 검사로서가 아닌, 검궁의 부궁주로서 그는 상대를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립도 안 된 나이에 저 정도 수준이라면, 향후 오 년 뒤에는 두말할 것 없이 천하제일인이다.
그리고 그 천하제일인은 자신을, 검궁을 노리는 화살이 되어 쏘아질 것이다.
“죽어라!”
파아아악!
최소한의 힘을 남겨 둔 채 싸우는 것은 무인의 기본이다.
지금 목강인은 그 무인의 기본 상식마저도 저버렸다. 상대가 단순한 적이 아닌 미래의 재앙이 될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서량의 얼굴에 급박함이 묻어 나왔다.
‘이런 쌍!’
빠르다.
극심한 내공 소모에 이은 무차별 육박전으로 있던 내공마저 소모한 상태다. 저 미친놈의 질주를 막을 길이 없었다.
더하여 피할 힘도, 그리고 받아칠 힘도 없었다.
‘죽는다.’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진짜 죽어.’
사아아악.
저 멀리서 마동필이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종리산의 눈빛이 체념으로 물든 것도 보였다.
그리고 내원 안쪽에 대기하고 있던 검궁 측 검사들의 환희 어린 얼굴도 보였다.
‘……진짜 이렇게 가는 거야?’
꽤 오랜만에 느껴 본 죽음의 위협.
그 위협 속에서, 서량은 새삼스레 생각했다.
‘너 이렇게 무른 놈 아니었잖아?’
상대와 싸울 때, 혹은 죽이기 위해 나설 때.
승리를 바라고 성공적인 살인의 완수를 바랐다. 목적이 그것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우선시하던 것은 자신의 안위였다.
내가 죽으면 이겨도, 죽여도 의미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생존이며, 내가 살아야 다음 기회라는 것도 생기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러했다. 살수로 살았던 이전 생에서도, 그리고 천마신교에 들어와서도 그러했다. 자신의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눈이 뒤집혀서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만 돌진하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경계했던, 그리고 가장 기피했던 이들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대체 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목강인의 눈이 보였다.
귀광(鬼光)을 뿜는 눈빛은 살해 의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익숙한 눈빛…….’
순간 서량은 떠올렸다.
- 하지만 내가 점찍은 먹잇감 앞에선 빈말이라도 참아 달라 말하지 마라.
과거 사공자인 홍위문을 박살 내려던 때, 형법당 흑조위를 상대로 했던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중요한 건 내 먹잇감을 엄한 놈이 가로챘다는 거지.
- 다른 건 다 참아도 중간에서 내 먹잇감 채 가는 놈들은 절대 봐주지 않거든.
서량은 의아했다.
‘내가 언제부터 그런 놈이었는데?’
보신(保身)이 먼저 아니었어? 생존이 먼저 아니었어?
나는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한 놈이었는데?
츠츠츠!
텅 빈 단전이 붉은 운무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개방되고 확장되는 마기.
구유마공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때, 울림 깊은 목소리 하나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본모습을 외면하지 마.”
우우우우웅!!
서량의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섬뜩하기 짝이 없는 안광 속, 알 수 없는 평온함이 깃들었다.
퍼어어억!
목강인의 수도가 그의 몸을 사선으로 그었다.
울컥 피를 토해 내는 서량. 쏟아지는 핏물과 함께 그가 작게 읊조렸다.
“……금호.”
콰아앙!
내원 후방, 외벽을 부순 황금빛 광채가 가주실의 후원과 건물을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