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살수지왕의 이름을 버리다 (1)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굉음과 사방 수십 장을 뒤덮은 먼지구름.
그리고 부스러진 돌멩이들과 지진이라도 난 듯 갈라진 땅이 모두의 정신을 황폐하게 했다.
고구가 외쳤다.
“일 위장!”
“예, 당주님!”
“전 인원 보고토록!”
“모두 무사합니다!”
천만다행이었다. 뒤로 빠지라는 명령이 조금만 늦었어도 흑조위들의 삼분지 일 이상은 죽거나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위력적인 무공.
‘아니, 저것이 무공이기는 한 것인가?’
태풍이 불어닥쳐도 이런 위력이 나오긴 힘들 것이다.
외벽을 부수고 건물을 날리고 대지를 뒤흔드는데 그 영역권 안에 들어갔다면 초절정고수라도 살아남을 수 없었으리라.
‘도풍(刀風)…… 설마?!’
고구의 눈이 희미하게 떨려왔다.
“삼공자?”
파아악!
그가 재빨리 내원 입구로 향했다.
그러자 보이는 광경.
“……!”
고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원에서 외원으로 향하는 방향.
그 방향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져 사라진 채였다.
길이만 십여 장, 너비는 이십여 장에 달하는 도풍의 흔적은 산맥처럼 거대한 괴수가 앞발을 휘둘러 낸 상흔 같았다.
그 파괴의 현장 위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후우.”
퍼뜩 놀란 고구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참마도처럼 보이는 보병(寶兵)을 든 채 세 자루 칼의 호위를 받는 한 청년이 있었다.
이리저리 찢어진 하의. 상의는 거의 남아나질 않았다. 덕분에 차돌처럼 꽉 짜인 근육과 그 위를 뒤덮은 온갖 흉터들이 훤히 보였다.
그렇다. 그것은 흉터였다.
방금까지 생명이 꺼져 가던 사람의 몸에 불그죽죽한 흉터만 남은 것이다. 찢어져 벌어진 피부나 멍이 든 자국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스윽.
서량이 고구를 바라보았다.
다소 놀란 듯한 눈빛. 하지만 그 안에는 왠지 모를 초연함과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마기도.
‘초고속 재생!’
마의 극치를 이룬 자, 극마지경에 든 절대자들은 선천마기(先天魔氣)를 이용해 신체의 치유 속도를 극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극마에 든 자라도 상처를 저리 빨리 치유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극마지경으로 발돋움했다는 것!’
새로운 경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했을 때의 육체는 불가사의한 변화를 자아내는 법이다. 무(武)를 초월하는 경지라면 그 변화는 더욱 극심할 터.
육체의 재정립.
흉터가 남고 피와 때가 묻은 육체는 이전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그 안은 달랐다.
근질(筋質), 골격(骨格), 관절은 물론 오장육부까지 새로이 탈바꿈했다. 자연스럽게 이룬 탈태환골(奪胎換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법당주?”
고구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외쳤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신교불패(神敎不敗) 만마앙복(萬魔仰伏)! 신(臣) 형법당주 고구가 삼공자님을 뵙습니다!”
뒤이어 모든 흑조위들도 무릎을 꿇었다.
“삼공자님을 뵙습니다!”
그야말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마인들이 가장 기피하고 무서워한다는 신교의 형법당원들이 한 청년을 향해 열렬한 인사를 건넨다.
이 당연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뿌듯한 장면에, 마동필은 가슴 안쪽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서량은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읍한 자세 그대로 고구가 말했다.
“총군사가 저희를 파견했습니다. 연주 지부장에게 급히 연락을 받아 이곳까지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랬군.”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희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흑조위들이 함께 외쳤다.
“벌하여 주시옵소서!”
강력한 기파를 발산하는 초절정고수 고구.
그리고 절정의 역량을 자랑하는 흑조위 이백 명이 한데 입을 모아 벌을 달라 외친다.
그들의 목소리가, 행동이, 분위기가 서량을 누구보다도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남들 보는데 쪽팔려. 이만 일어들 나.”
지극히 서량다운 말투였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음에도 보여 주는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고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까지와는 달리 당당하게 일어서서 서량을 직시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강해지셨군요, 공자님.”
타인이 보는 앞이라 말투를 조심하는가?
그렇지 않다. 고구는 자신의 말투가 바뀌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만큼 서량이 보여 주는 존재감이 놀라웠다.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대종사(大宗師)의 경건함과 초월자의 위엄이 고구의 언행을 조심스럽게 만든 것이다.
서량이 고개를 돌려 자신이 만들어 낸 파괴의 현장을 바라보았다.
목강인은 그곳에 없었다. 그의 살점 한 조각은 물론 피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정한 위력의 육연지옥풍이 모든 것을 찢고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지.”
“운만으로는 그와 같은 경지를 구축할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공자님의 연배에요.”
고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서량의 말도 사실이었다.
그는 실로 운이 좋았다. 마침 자극이 필요한 시점에 분노를 들끓게 하는 상대를 만났고, 하필 그 상대가 자신과 동등 혹은 반 수 위의 강자였기 때문이다.
그 강자 덕분에 서량은 지금의 경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스르륵.
금호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머리를 비볐다.
이전보다 훨씬 커진 금호의 몸은 대호를 방불케 하였다. 특히나 몸통만큼 커다란 꼬리는 안 그래도 거대한 몸체를 더욱 커 보이게 했다.
“금호.”
크르릉.
이제는 목이 울리는 소리도 제법 낮아졌다. 마냥 신비롭고 성스럽게만 보였는데, 외양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지금은 무척이나 묵직하고 사나워 보였다.
무뚝뚝한 고구도 이때만큼은 신기함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짐승은……?”
“맞아.”
“어떻게 이리 커질 수가 있습니까?”
“몰라. 지가 크고 싶으니까 컸겠지.”
농담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서량은 진심이었다. 애초에 금호는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물이었다.
고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건 지금은 금호가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몸은 괜찮으십니까?”
“더할 나위 없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잠시 서량을 주시하던 고구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극마지경에 오른 것을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
“그래.”
“본교 후계자의 자리에 한층 더 가까워지셨군요.”
“당신이 그런 소리를 하니까 제법 웃기는군.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오해십니다.”
“오해?”
스륵.
어느새 서량이 고구의 코앞에 다가왔다.
고구의 눈을 들여다보는 마왕의 눈. 고구는 순간 고개를 돌려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 오해로군. 너는 나를 그다지 싫어하지 않아.”
“…….”
“하지만 좋아하지도 않는다. 심사가 무척 복잡해 보여.”
고구의 눈빛이 흔들렸다.
서량이 몸을 돌렸다.
“나를 어떻게 보건 상관없어. 당신에게는 딱히 관심도 없으니까.”
관심이 없단다.
말투가 가관이었다. 아무리 교주의 제자라도 형법당주에게 그런 말을 쉽게 던지긴 힘들 것이다.
평소라면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았을 고구가, 지금은 저 말에 흔들리고 있었다. 괜히 무시를 받은 것 같아서 순간 분이 차오를 뻔했던 것이다.
“일단은 뒷수습부터 하도록 하지.”
서량이 용린도를 중단으로 겨누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우우우우웅!!
용린도의 거대한 도신(刀身)에 시뻘건 마기가 어렸다.
절대적인 위압감을 자랑하는 구유마기였다. 선천마기로 진화한 그의 구유마공은 작정하고 풍기는 것만으로도 일대에 있는 모두의 몸을 강제로 굳게 했다.
스르륵.
마동필도, 종리산도 그리고 그 뒤에 선 거경가의 마인들도.
나아가 흑조위들도 무릎을 꿇었다. 저 강대한 마기를 대하자 자신들도 모르게 그리 행동한 것이다.
치이이이익!
마기가 실린 도신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그 빗방울들이 모조리 증발했다.
서량의 마안(魔眼)이 번뜩였다.
파라라락!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거대한 도풍을 만들고, 거대해진 도풍은 일대의 공기를 천공으로 쏘아 올렸다.
휘이이잉!!
소용돌이치며 올라가는 붉은 바람.
그 바람에는 잔존하던 신선폐와 칠보단혼산의 독기가 모조리 담겨 있었다. 구유마기에 잠식된 두 절독(絶毒)은 이제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다.
“됐군.”
보란 듯이 용린도를 어깨에 걸친 그가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스르르르.
허공에 떠올라 있던 칠야도와 유성쌍도가 그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사람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다.
“적사가의 마인들 중 정신을 차린 자가 없군. 모두 각 건물에 죽은 듯이 누워 있어.”
그가 내원 쪽을 바라보았다.
“강도 년도 쓰러졌고.”
서량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뭐 얘기를 하고 싶어도 할 사람이 없구만.”
그가 거경가주에게 다가갔다.
종리산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가주님.”
“……말씀하시오.”
말을 뱉어 놓고도 종리산은 왠지 모르게 어색함을 느꼈다. 상대에게 이런 말투를 들려주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잠시 근처 지부로 가서 몸을 추스를 생각입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이대로 거경가로 돌아가라는 게 아니라 함께 가자고 한다.
물끄러미 서량을 주시하던 종리산이 이내 뒤를 돌아 외쳤다.
“해왕위와 삼단은 가문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거경가의 마인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가주님.”
“가주의 명이다. 모두 돌아가서 대기하도록.”
냉정하기까지 한 말투에 마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의 마음이 확고한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종리산은 감이 좋은 남자였다. 왜 자신과 함께하자고 하는지는 몰라도, 가내 마인들을 끌고 가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알고 있는 것이다.
“가실까요?”
“알겠소.”
마동필이 서량에게 다가왔다.
“공자님.”
“고생했다.”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을요.”
“웃기는 소리. 네가 날 호위하면서 이 안까지 오지 않았다면 놈들을 없애지도, 내가 이렇게 강해질 수도 없었어. 너는 네가 해야 할 몫 이상의 일을 해냈다.”
마동필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서량이 고구에게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적사가를 점령한 놈들은 검궁의 졸개들이야. 다 죽어 버렸지만 한 놈은 살았지.”
“……?”
“검궁의 후계자, 소궁주를 살려 두었어.”
고구의 눈이 빛났다.
“잘되었군요.”
“놈을 데리고 교로 귀환해.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알겠습니다.”
서량이 종리산에게 말했다.
“거경가의 마인 몇을 남겨서 적사가의 여식이 깨어날 때쯤 제 말을 전해 주십시오.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오.”
“좋습니다.”
종리산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넨 서량이 몸을 돌렸다.
“가자.”
어디서 구해 왔는지, 마동필이 커다란 흑색 피풍의로 서량의 드러난 어깨를 감싸 주었다.
그렇게 서량과 마동필, 종리산과 금호가 적사가를 나섰다.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며 고구가 나직이 읊조렸다.
“이십 대 중반의 나이로 극마경을 깨우친 불세출의 천재라.”
고구의 얼굴에 언뜻 씁쓸함이 감돌았다.
“시작은 나와 비슷했을지 몰라도…… 나와는 너무도 다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