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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150화 (150/774)

150화. 살수지왕의 이름을 버리다 (4)

“교주님. 형법당주가 알현을 청하옵니다.”

“들라 하라.”

쿠구궁!

대전의 문이 열리고 고구가 들어섰다.

이천상은 평소 앉는 태사의가 아니라 창가 옆 작은 다탁에 앉아 있었다.

다탁이지만 잔은 술잔이다. 뜨겁게 데운 것인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고구가 절을 올렸다.

“형법당주가 교주님을 알현하옵니다.”

“앞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고구가 이천상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천상이 또 하나의 잔을 꺼내 맞은편에 놓았다.

“한잔하지.”

“……예.”

고구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의 잔을 채워 주며 이천상이 말했다.

“추가 보고할 것이 있는가?”

“더 상세히 보고 드리고자 알현을 청하였사옵니다.”

“그러게.”

고구는 자신이 본 광경, 사태의 흐름을 세세하게 말했다.

이천상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군.”

잠시 말이 없던 고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삼공자 서량이 극마지경에 도달했습니다.”

“역시 그렇군.”

고구의 눈이 흔들렸다.

‘역시 그렇다고?’

교주님께선 이미 짐작하고 계셨던 것일까?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했다.

“열흘 전, 판마정이 나를 불렀다.”

“……!”

고구의 주먹이 절로 꽉 쥐어졌다. 하얗게 변한 주먹 위로 식은땀이 맺혔다.

“그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녀석이 극마지경에 오를 준비가 되었다는 걸.”

“……그러셨습니까.”

이천상이 자신의 심장을 두들겼다.

“유진도형이 말해 주었다.”

두근.

“성능이 좋더군.”

두근두근.

“그 손재주는 여전하더냐?”

고구는 대답하지 못했다. 교주의 질문에는 반드시 대답해야 함에도 그러질 못했다.

잔을 비운 이천상이 말을 이었다.

“형법당의 뇌옥에 들른 적이 있다. 형법당 지하가 요새화되어 있더군.”

“미천한 재주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너의 재능을 충분히 잘 활용하고 있다. 내가 널 아끼는 이유다.”

고구의 턱에 굵은 힘줄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도 잠시.

“명심하겠습니다.”

“마셔라.”

고구가 잔을 비웠다.

이천상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이만 가 보도록.”

일어난 고구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대전을 나섰다.

이천상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 하늘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북쪽에서 밀려오는 먹구름이 십만대산으로 접근한 것이다.

“재능이 닿지 않는 곳을 바라보며 아쉬워하지 마라.”

이천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제자야.”

* * *

연주지부 후원에는 작은 대숲이 있었다.

연무장으로 쓰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지만, 머리를 식히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다. 고죽림만큼 청아한 맛은 없어도 이곳의 대숲 역시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그 대숲 한가운데.

눈을 감고 선 서량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꾸욱.

서량이 눈을 떴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용린도가 들려 있었다.

“음.”

그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 그래도 용린도는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해.”

스르륵.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쥐고 있는 듯, 용린도가 천천히 한 바퀴 돌더니만 땅에 푹 하고 박혔다.

‘마공의 점검은 끝났다.’

극마지경에 오른 후 구유마공은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했다.

본래 존재하던 다섯 개의 지옥문은 이제 세 개로 줄어 있었다.

앞의 귀문식과 지문식은 극마를 향한 길목에 불과한 것, 목적지에 도달했으니 그 문을 다시 열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다음까지야.’

새로운 지옥문의 시작. 구유마공 지옥개문 중 세 번째 문.

그 문을 완전히 열어젖혔을 때, 비로소 생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극마, 혹은 조화경에 올랐다 하여 그 안에 있는 고수들이 모두 비슷한 실력인 게 아니다.

절정고수들 사이에도 수준 차이가 있듯, 초절정고수에게도 수준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경지가 깊으면 깊을수록 거리가 벌어진다.

전생의 서량, 즉 천하진은 천하제일살수임이 분명했지만 단순 무공으로는 십대고수 중에서도 하위권, 좋게 봐도 중하위권이었다.

다만 구사하는 무공 자체가 워낙 대단한 절기들이라 조금이나마 차이를 줄일 수 있었던 것뿐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서량은 극마에 올랐다 할지라도 십대고수와 비비긴 힘든 수준이다. 마찬가지로 구대마존과도 차이가 있다.

‘늦진 않을 거야. 지금처럼 꾸준히 노력한다면.’

꾸욱.

주먹을 쥔 서량의 눈빛이 깊어졌다.

‘문제는.’

파아아앙!

허공을 향해 내지른 일권.

내공을 싣지 않았는데도 무지막지한 풍압이 느껴졌다. 바닥에 깔린 댓잎들이 허공 높이 떠올라 그가 내지른 주먹 너머에서 맴돌았다.

꿈틀거리는 근육. 그 속에 맥동하는 강력한 힘.

서량은 맥이 풀린다는 듯 툴툴거렸다.

“섬세함은 다 어디로 가 버린 거냐.”

암영기를 마공으로 바꾼 뒤, 이천상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게 지금의 구유마공이다.

신공과 마공은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당연히 힘을 받아 펼쳐 내는 외가무공(外家武功)의 성질도 다른 법이다.

그러나 내공심법이나 펼치는 사람의 성격과 습관, 경험 등에 따라서도 외가무공은 그 흐름이 달라진다.

섬세하고 은밀했던 제천기가 마공을 익힌 후 파괴적이고 흉포하게 변했다.

하지만 쌓인 경험으로 인해, 파괴력 넘치게 변한 와중에도 부드러운 흐름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한데 지금은 다르다.

“너무 강해.”

주먹 한 번만 뻗어 봐도 알 수 있었다. 각자가 다른 무공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연환식으로도 쓸 수 있었던 제천기가 뚝뚝 끊어질 것이 분명했다.

‘이거 괜찮을까?’

마공이 종용한다. 새로운 변화를.

이전 살왕으로서 살았을 때와는 달랐다. 경험으로 다져진 내 마음이 아닌 마공 자체가 무리(武理)를 바꾸라고 말하는 것이다.

스윽.

한 걸음 앞으로 내민 발.

서량의 몸이 움직였다.

파아악!

눈 깜짝할 새에 대나무 수십 그루를 찍고 돌아온 서량.

가히 신들린 속도였다. 구천축지신보(九天縮地神步)의 위력은 여전했다.

“여전하지만 이것도 역시…….”

서량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변했다.

“대체 무슨 일이람.”

보법의 구결에 따라 구사하면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속도가 나온다. 아니, 마기가 선천에 도달하여 마음먹으면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다.

하지만 마기와 구결이 상충한다.

전신의 근육조차 이 움직임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 거부감을 지워 내기 위해 찰나의 시간을 더 소모해야 하고, 그로 인해 펼치는 시간은 반 박자 느려진다.

충분히 펼칠 순 있지만, 몸에는 맞지 않는다. 제천기보다 거부 반응이 훨씬 더 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나.’

은밀하든 파괴적이든 제천기는 상대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살법(殺法)이다. 그렇기에 마공으로 구사해도 기와 구결이 상충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천축지신보는 다르다.

축지신보의 무의(武意)는 빠른 침투와 도주에 있었다. 그걸 전투용으로 써먹는 서량의 창의력이 대단했을 뿐, 애초에 정면 승부에 적합한 보법이 아니었다.

제천기와 축지신보의 조합.

살수에겐 최고의 무공이지만 마인에게 어울리는 무공은 아니다. 정확히는 ‘마인이 된 서량’에게 어울리는 무공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이거 완전히 새로 파야 하는 거야?”

하체가 몸의 중심이라면 그 하체로 펼치는 보법은 무(武)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껏 서량이 그리 날뛰어도 체력이 줄지 않은 까닭은 하체가 탄탄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연환기에 능한 것도 지구력이 좋아서였고, 그 좋은 지구력 역시 튼튼한 하체가 밑바탕이 된다.

스슥.

서량이 자신의 허벅지를 만졌다.

극마에 오르며 재정립된 근육. 두텁고도 길쭉하게 뻗은 그의 허벅지는 폭발적인 힘과 강한 지구력 모두를 구사할 수 있도록 연마되어 있었다.

‘이전의 몸과 달라.’

서량의 안색이 굳어졌다.

‘정말 괜찮나? 이 무공들을 버려도?’

수십 년간 함께해 온 무공들이었다. 그 무공들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어야 한다니 덜컥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걱정이 되는 만큼이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사실.

‘난 이렇게 불안해하고 있는데 왜 몸뚱이는 새로운 무공을 원하고 있…….’

순간 서량은 탄성을 질렀다.

“내가 완전히 잘못 보고 있었어.”

살수에 특화된 무공, 살수로서의 경험, 살수로 단련된 육체.

조화경을 뚫은 후에도 암영기, 제천기, 축지신보를 자연스레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삶 자체가 암살과 생존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르다.

마도 무림 최고라 불리어도 부족함이 없을 마공에 살수 시절 익혔던 무공이 붙었다. 살수로서의 경험도 충만하지만 정면 승부의 경험도 못지않다.

하물며 지금의 육체는 살수의 육체가 아니라 강격(强擊)에 능한 마인의 육체였다.

‘정기신(精氣神)은 하나. 심신기(心身氣)도 하나.’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몸이 원한다는 것은, 결국 내 마음도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 기가 하나다.

나아가 무공도 그의 몸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육체가, 마공이 이리 변모한 것은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 파괴 본능이 자라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괴 본능……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그 순간 나의 심신(心身)은 일치되었다는 것.’

돌고 도는 성장.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키며 어느새 하나가 되었으니, 그 모든 것이 종합된 개체가 바로 서량이란 사람인 것이다.

우우우웅.

그의 몸에서 짙은 마기가 번져 나왔다.

부드럽게 스며드는 깨달음의 순간, 그는 머리에서 축지신보의 구결을 몽땅 지워 버렸다.

나아가 폭산경(爆山勁) 등 필요한 초식 서너 가지를 제외한 제천기의 구결까지도.

‘잊자.’

스르륵.

그의 머리에서 희끄무레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의지가 일자 기가 일고, 기가 일자 마음이 확장된다. 잊자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그는 축지신보의 구결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마치 한 번도 그것을 접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별수 없어.’

언젠가 두 무공의 구결들이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무공들은 오히려 없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래도 서량은 아쉬움을 느꼈다.

“내 과거와 이별하는구나.”

제천기, 구천축지신보.

지금껏 그의 생존을 보장하고 적의 목숨을 취했던 강력한 무기들.

암영기 역시 구유마공으로 변해 버렸다. 그나마 남은 것이라곤 구유인화도법 하나뿐인데, 애초에 인화도법은 살수질을 하면서는 써 본 적이 없던 무공이었다.

그나마 천라지망이 펼쳐졌을 때, 그리고 도주를 위해 시간을 벌 때 두어 번 써 본 게 전부다.

더군다나 구유인화도법은 애초에 파괴에 목적을 둔 무공. 다른 세 가지 무공과는 태생부터가 다르다.

즉, 그를 살수지왕으로 만들어 준 모든 무공들이 손을 떠나 버린 것이다.

“아쉽지만…….”

동시에 기대도 된다.

사라져 버린 살법과 보법. 그 두 가지를 새로운 것으로 채워야 할 것이다.

더욱 강력한, 더욱 흉포한.

지금의 그에게 걸맞은 수준 높은 신(新) 무학으로 채워야만 한다.

서량이 남쪽을 바라보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머나먼 곳, 바로 천마신교라는 마룡이 똬리를 튼 십만대산을 향해.

“일 하나만 처리하고 돌아가야겠군.”

극마에 오른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는 살수지왕이라는 과거와 완전히 이별할 수 있었다.

* * *

“공자님.”

“알아.”

한참 멀리서 다가오는 익숙한 기운.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도 년만 올 줄 알았더니만 의외의 인물도 같이 오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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