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도전생기-151화 (151/774)

151화. 씨앗을 뿌리다 (1)

세상에는 두 가지의 인연이 존재한다. 바로 선연(善緣)과 악연(惡緣)이다.

선연은 말 그대로 좋은 인연이다. 간단히 말해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보면, 굳이 상대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자극이 된다는 점에선 선연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악연은 무엇인가.

‘바로 이게 악연이지.’

정자에 앉아 저 멀리서 걸어오는 서량을 보며, 홍여린은 생각했다.

‘실패의 찌꺼기로 점철된 더러운 악연.’

그리고 왠지 모를 아쉬움을 자아내는 악연이다.

“왔나?”

달리 인사말도 없었다. 정자로 올라온 서량은 제집이라도 된 양 편안하게 마주 앉았다.

홍여린은 문득 눈이 부신 것을 느꼈다.

새하얀 무복 위로 같은 색의 장포를 걸친 서량의 모습은 가히 귀공자라 불릴 만했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어깨와 등을 제멋대로 희롱하는데도 그리 보였다.

아니, 오히려 그런 자연스러움이 더욱 기품을 자아내고 있다고 할까.

저 큰 체격으로도 저만한 고귀함을 풍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단련된 육체만 보자면 백만대군을 호령하는 대장군을 연상케 하는데, 드러나는 분위기는 고고하기만 했다.

‘달라졌어.’

서량은 또 달라졌다.

주화입마에서 깨어난 후에도, 감찰사로 적사가에 왔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는 또다시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반면 나는…….’

자신 역시 달라졌다.

서량과는 달리 안 좋은 쪽으로.

왠지 모를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홍여린은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적사가주의 딸로 태어나 부족한 것 없는 삶을 살아왔다.

연마한 무공도 충분하여 마도 무림의 후기지수라 불리었고, 이 어린 나이에 환희원의 간부로 일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탄탄대로의 인생이라 할 수 있었다.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평생 분란 따위 모르고 편히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 번의 실수로 형제와 악연을 쌓았고, 한 번의 실수로 교주의 제자와 악연을 쌓았다. 이후에는 아버지까지 증오하며 살았다.

‘…….’

홍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침내 깨닫고야 만 것이다. 그 악연을, 실수를 누가 만들었는지.

교주의 제자로 발탁된 오라비를 질투하여 그를 음해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었다.

서량과의 관계는 나름 성공적이었지만 그가 주화입마에 걸린 후엔 상대를 열렬하게 증오했다.

뒷일을 수습하려 들지 않고 상대를 깎아내리기만 바빴다. 하물며 입마에서 깨어난 후, 괜한 자존심에 상황을 더 악화시켜 버리기도 했다.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도, 가내 마인들도 모두가 자신을 걱정했지만 정작 그 걱정을 불쾌해하여 거리를 둔 것은 자신이었다.

그렇다. 모든 책임은 결국 자신한테 있는 것이다. 설령 책임이 없었어도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봤어야 했다.

실수 없는 삶을 바랐다면, 승승장구하는 인생을 꿈꾸었다면 그랬어야만 했다.

“우냐?”

퍼뜩 놀란 홍여린이 서량을 바라보았다.

서량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사람 왔는데 갑자기 울고 난리야?”

“네?”

홍여린은 자신의 눈가를 매만졌다. 서량의 말마따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소매로 눈가를 훔친 홍여린이 허리를 폈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긴. 이제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제겐 충분히 긴 시간이었어요.”

“이해한다.”

가만히 서량을 주시하던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네요. 본가를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서량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구해 주기는 개뿔. 그냥 내 먹잇감을 가로챈 도둑놈들을 응징했을 뿐이다.”

“알아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분명히 선을 그어 두겠는데 나는 너희 가문을 구한 게 아니야. 알겠어?”

“…….”

“그리고 너희는 아직도 내 먹잇감이야. 그걸 잊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홍여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쉽게 넘길 수 없는 말이로군요.”

“쉽게 넘기지 않으면 어쩔 건데?”

“…….”

“신선폐의 해약은 당가가 갖고 있어.

아는지 모르겠지만 당씨 놈들은 하나같이 폐쇄적인 데다가 음침하기 짝이 없는 변태들이라 해약 따윈 만들어 주지 않을 거야.”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고로 현재 너희 가문은 멸문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다. 대부분의 마인들이 신선폐에 당해서 내공을 소실했으니까.”

홍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맞는 말이에요.”

“즉, 현재 너희 가문은 나를 막을 수 있는 그 어떠한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

“그 말도 맞아요.”

“인정이 빨라서 좋군.”

“그래서 왔어요.”

“음?”

“그래서 온 거라고요. 신선폐의 독무를 걷어 낸 건 당신이니까요. 당신이라면 본가의 마인들을 원래대로 되돌려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서량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남긴 말 때문에 온 게 아니라 원하는 게 있어서 오셨다?”

“맞…….”

“나가.”

홍여린의 눈이 흔들렸다.

“뭐라고 하셨죠?”

“꺼지라고. 나는 더 이상 너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

“…….”

“안 가냐?”

“……무례함은 여전하시네요.”

“무례? 그게 뭔데? 먹는 거냐?”

“갑자기 왜 이러는 거죠?”

“이유는 많지. 일단 넌 여전히 재수가 없어. 삼공자를 상대로 말투도 싸가지가 없지. 게다가 우리 과거를 봤을 때 얼굴 봐서 좋을 건 없는 사이잖아?”

“하지만 당신은 분명 나에게 말을…….”

“그래, 분명 네가 깨어나면 너에게 내 말을 전하라고 했다. 그리고 넌 이곳에 왔지.”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왔으면 괜한 자존심에 대화나 질질 끌게 할 개소리는 접으시란 말이다.

서로 봐서 좋을 거 하나 없는 사이에 이런저런 잡소리로 짜증만 잔뜩 얻어 가고 싶어?”

“……!”

“나한테 원하는 게 있어서 왔다고? 개소리하지 마라. 진짜 무언가를 원했다면 보름씩이나 지난 다음 여기 왔을 리가 없어.”

“…….”

“가문을 수습하고 싶지만 수습할 방법은 모르겠고, 주변 도움으로 어떻게든 정리만 마치고 꾸역꾸역 여기까지 온 거겠지.”

“나는…….”

“너는 시작부터 글러 먹었어. 넌 가문의 재건보다 너 자신의 자존심을 우선시하는 자다.

그러니까 마음에도 없는 개소리를 들먹이면서 있지도 않은 자존심을 채우려 들었겠지.”

서량은 차로 목을 축였다.

“하긴, 조금이라도 나아진 모습을 보여 줬다고 한들 내 마음이 바뀌진 않았겠지만.”

꾸욱.

홍여린이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면서 가느다랗게 핏물이 흘렀다.

“됐으니까 넌 이만 빠지고 같이 온 사람이나 빨리 나오라고 해라.”

순간 홍여린의 눈이 흔들렸다.

“알고 있었나요?”

“숨긴다고 숨겨질 마기(魔氣)가 아니지. 유연하고도 강단 넘치는 그 마기는 무척이나 인상 깊었어.”

서량이 홍여린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그곳을 향해 서량이 말했다.

“다 듣고 계신 거 아니까 이만 나오시지요.”

그때였다.

“일부러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어요.”

스르륵.

후원 입구에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림자의 정체는 중년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평범한 외모를 한 여인. 걸친 옷도 오랫동안 입었던 것인지 색이 제법 바래 있었다.

여러모로 눈에 띄지 않는 외양이었다. 조금 과하게 말하면 어느 시골 마을의 아낙이라 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누구도, 아니 천하의 어떤 사람도 그녀를 무시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삼공자님.”

“저야말로.”

고개를 든 여인의 눈이 흔들렸다. 서량의 변화를 한눈에 알아챈 것이다.

“엄청나군요. 마기는 일절 흘리지 않으면서도 남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싶었는데…….”

여인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공(大功)을 경하드립니다.”

“대공이라고 할 것까진 없습니다. 아직 한참 멀었어요.”

“겸양의 말씀이세요. 천하의 어떤 인재가 그 연배에 극마에 도달할 수 있겠어요.”

홍여린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진짜로요.”

“그만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 역시 사실이지요.”

“뭐, 그리 말씀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 계시지 말고 이만 올라오십시오, 가주님.”

마도칠가의 가주 중 유일한 여성이자 마도 무림을 넘어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거상(巨商).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상재(商材)와 그에 못지않은 무공으로, 가내 실력자들을 몰아내고 만장일치로 가주가 된 여장부.

당대 천보금가(千寶金家)의 가주 금란화(金瀾華)가 바로 그녀였다.

“그나저나 어쩌다가 이 팔푼이와 동행하게 되었습니까?”

서량의 말투가 웃겨서 금란화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홍여린이 옆에 있으니 대놓고 웃진 못했지만.

“적사가가 장악당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가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의리 있으시네.”

“같은 칠가니까요.”

“그래서 적사가를 수습하는 데에 도움을 주셨습니까?”

금란화가 고개를 저었다.

“도움을 줬다기보다는 거래를 했지요.”

“거래라…… 하기야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선의보다는 거래가 좋지요.”

“공자님이라면 이해해 주실 줄 알았답니다.”

금란화가 차로 목을 축였다. 홍여린이 손도 대지 않은 차였다.

“감찰은 다 끝나셨나요?”

“그렇습니다.”

“저는 공자님께서 감찰이 끝나는 대로 곧바로 귀교하실 줄 알았어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감찰 얘기를 하러 오신 것은 아니겠지요.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역시 시원시원하시네요.”

“먹잇감이 나 잡아 잡수라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못 말린다는 듯 금란화가 고개를 저었다.

“적사가를 날름 삼키신다고요?”

삼공자 앞에서, 하물며 극마에 이른 절대고수 앞에서 잘도 그런 말투를 뱉는다.

상대를 무시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상대가 이런 식의 대화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성격에 따라 유연하게 대화를 이끄는 것, 상인(商人)의 화술이었다.

“그렇습니다. 원래는 총관 놈이 살아 있었어야 했지요.”

“총관을 가주 대행으로 앉혀 놓을 생각이셨군요.”

“나름 똑똑해 보이더이다.”

“장 총관…… 무재도, 상재도 부족하지만 세력을 가꾸는 데엔 나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죠. 사람을 잘 보셨네요.”

“그런데 사라져 버렸죠.”

“심지어 적사가도 검궁 때문에 초토화가 되어 버렸고요.”

서량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적사가, 천보금가에서 후원해 주기로 하셨습니까?”

금란화가 미소를 지었다.

“눈치가 빠르세요.”

“뭘 믿고 그런 거래를 하셨습니까?”

금란화가 홍여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아이를 믿고요.”

서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금란화와 홍여린 사이에 무슨 거래가 있었는지 굳이 묻고 싶지 않았다.

“현재 적사가주는 공석입니다. 가주 대행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이 녀석뿐이군요.”

“네. 맞아요.”

“한데 어째 분위기를 보니 적사가를 날름 삼키려면 이 녀석이 아니라 가주님과 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금란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주 대행은 이 아이예요. 공자님 말마따나 적사가를 맡을 사람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 아이는 아직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 본 경험이 없죠.”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가주께서 대신 맡는 겁니까?”

“네.”

“이거 재미있어지는군요.”

금란화의 얼굴에 미약한 긴장이 스쳐 지나갔다.

찻잔을 전부 비운 서량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깨진 뱀고기나 씹어 보려 했더니, 잘하면 구첩반상까지 얻어먹게 되겠습니다그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