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씨앗을 뿌리다 (3)
“뭐라고?!”
상백(尙柏)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게 사실이냐?”
“그, 그렇습니다.”
“서신, 서신을 가져와라!”
수하에게서 전달받은 서신을 읽어 내려간 상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말 적살루(積殺樓)가 멸문해 버렸군.”
적살루는 중원 동남부에서 활동하는 살수조직이었다.
원체 악명 높은 살수조직이었지만 그들이 유명해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십여 년 전, 장강 이남에 출현했던 남부 최강의 암살자 사군(死君). 바로 그 사군을 배출해 낸 곳이 적살루였던 것이다.
사군의 명성을 바탕으로 조금씩 그 세를 늘린 적살루는 더 많은 살수들을 양성했고, 이후 남부 최고의 살수조직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이것이 적살루가 강호십대살수조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배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 년 전, 모종의 사건으로 적살루는 절반 이상의 살수들을 잃었다.
심지어 적살루의 간판 살수이자 남부 최강이라 불리던 사군마저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적살루는 여전히 십대살수조직 중 하나로 활동했다.
그간의 명성과 실적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던지라,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적살루가 하루아침에 멸문을 당했단다.
‘대체 왜?!’
상백은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개방(丐幇)이?’
적살루는 아직 하오문(下五門)을 위해서 해 줄 일이 많은 조직이었다.
그런 조직이 몰살을 당했다 하면, 하오문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개방의 거지들일 확률이 높았다.
“빌어먹을!”
쿵!
탁자를 치는 주먹에 격동이 깃들었다.
“놈들에게 쏟은 돈이 수십만 냥은 족히 되거늘…….”
그때였다.
“부, 부문주님!”
“또 뭐냐?!”
또 다른 수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건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상백이 서신을 빼앗아 펼쳤다.
“……!”
서신을 쥔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적살루에 이어 삼흑단(三黑團)까지?”
삼흑단 역시 장강 이남에서 활동하는 살수조직이었다. 멸문한 적살루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세를 구가하는 조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하오문이 삼흑단과는 거래하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상백은 기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장강 이남에서 가장 큰 성세를 구축하던 살수조직 두 군데가 멸문했다. 그렇다면 다른 곳은……?’
사흘 뒤, 또 다른 서신이 날아왔다.
“명부회(冥府會)도 멸문당했군. 그런데…….”
상백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른 세 군데는 서쪽으로 이동 중이야? 그것도 이렇게 대놓고?”
십대살수조직 중 장강 이남에 분포한 조직은 여섯.
그 중 세 군데는 몰살을 당했고 나머지 세 군데는 서쪽으로 이동 중이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때, 머리를 번뜩 스치고 지나간 기억.
‘……?!’
상백의 눈이 흔들렸다.
“여봐라!”
“예, 부문주님!”
“이 년 전, 추왕혈사(追王血事)에 참가한 살수조직의 명단을 가져와라. 빨리!”
잠시 후, 그의 앞에 문서 하나가 놓였다.
“……내 생각이 맞았구나.”
상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적살루, 삼흑단, 명부회. 이 세 조직은 추왕혈사에 몸을 담았던 살수조직들이었어.”
이 년 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추격전이 벌어졌다.
한 남자를 죽이기 위해 무려 의천맹과 철혈성이 연수하여 천라지망을 펼쳤던 대사건. 기어이 그를 잡아 죽였지만, 맹성의 피해도 굉장하다고 하였다.
그 사건을 아는 사람들은 추왕혈사라 불렀다.
왕(王)을 추적하다 벌어진 혈사. 그 왕은 당시 십대고수 중 일인으로 손꼽혔던 암살계의 제왕, 살왕(殺王)을 뜻했다.
‘굉장했었지.’
당시를 떠올리던 상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칠 주야 간의 추격전. 살왕의 손에 죽은 맹성(盟城) 측 고수의 숫자만 칠백에 가깝다고 했다.’
절대고수 한 명의 힘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를 증명한 일대혈사.
칠 주야 동안 칠백이면 하루에 족히 백 명은 죽였다는 소리다.
그것도 도주하는 판국에. 심지어 그 숫자에는 십대고수에 육박하는 고수들도 몇이나 끼어 있었다.
이 정도면 그냥 괴물이라고 봐야 한다. 천하십대고수 중 하나라 해도 믿기지 않는 전과였다.
사군이 죽은 이유도 당시 살왕에게 덤볐기 때문이었다. 시신의 흔적으로 보아 단 일도(一刀)에 당했을 거라 추측되고 있었다.
산중지왕(山中之王)인 범에게 덩치 큰 승냥이가 덤빈 꼴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지만.
‘하긴, 잠시나마 맹성(盟城)이 손을 잡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괴물이지.’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상백이 자신의 뺨을 찰싹찰싹 두들겼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상백의 눈에 은근한 두려움이 떠올랐다.
“추왕혈사에 참가한 조직이 멸문했다? 설마 의천맹과 철혈성이 나선 것인가?”
토사구팽이라도 저지르는 걸까? 지금에서야?
상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애초에 남부 쪽은 마교의 영향력이 강해. 그만한 병력을 파견해서 일을 치르기는 힘들겠지.”
차라리 죽은 살왕이 귀신이 되어 놈들을 죽였다는 게 더 개연성이 있겠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때, 문밖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문주님! 적오단주(赤汚團主)입니다!”
“들어와!”
덜컥 문을 열고 들어온 적오단주가 상백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이걸 보십시오.”
“빌어먹을. 서신의 내용을 확인하는 게 이렇게나 두려울 줄이야. 또 뭐야?”
상백이 서신을 펼쳤다.
그대로 그의 몸이 굳어졌다.
툭. 투둑.
서신 위로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이, 이게 정말이냐?”
“…….”
“왜 대답이 없어! 이게 사실이냐 물었다!”
“……그렇습니다. 적오단원들이 직접 확인한 사항입니다.”
상백의 떨리는 눈에 서신의 마지막을 장식한 한 글자가 들어왔다.
- 마(魔).
“마교가…… 저지른 짓이라고?”
그때였다.
“정확히는 내가 저지른 짓이지.”
깜짝 놀란 두 사람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헉!”
어느새 창가에는 한 청년이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참마도에 육박하는 거도를 옆에 세워 둔 청년은 무척이나 나른해 보였다.
“역시 하오문이군. 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고, 어느 뒷골목이나 시장통에 본진을 숨기고 있을 줄 알았는데.”
청년, 서량이 창틀을 매만졌다.
“이런 협곡에다가 본거지를 둘 줄이야. 출세했네, 하오문도.”
적오단주가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누, 누구냐!”
순간 상백이 손을 들어 적오단주를 막았다.
침을 꼴깍 삼킨 상백이 물었다.
“……대산(大山)에서 오신 분이오?”
“그래.”
적오단주는 깜짝 놀랐다.
대산이라 함은 십만대산을 뜻하고, 십만대산은 곧 천마신교의 본거지다. 즉, 저 청년은 마교 소속의 마인임이 분명했다.
상백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귀하의 성함을 알 수 있겠소?”
“못 알려 줄 것도 없지. 하지만 그 전에.”
서량이 엄지로 창밖을 가리켰다.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데 어떻게 할래? 난장 한 번 치고 얘기할까? 뭐, 그래도 상관은 없다만.”
상백이 외쳤다.
“적오단주는 문도들에게 상황 대기 명령을 전달해라! 당장!”
“예, 예!”
파악!
적오단주가 재빠르게 문을 나섰다.
서량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판단이 빨라서 좋군. 그래, 어렵사리 장만한 본거지를 쓸데없이 날려 버릴 필요는 없지.”
상백은 입술을 깨물었다.
본거지를 날려? 그 말은 저 청년 하나만 이곳에 온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여길 어떻게 찾아왔지?’
상백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서량이 적살루로 파견된 하오문도가 날린 전서응을 단신으로 추적해 왔다는 걸.
축지신보는 버렸지만 서량의 신법은 여전히 나는 새를 쫓을 만큼 빨랐던 것이다.
“신분을 밝혀 주시오.”
“서량.”
“……서량?”
마교에서 서량이란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나?
‘흡!’
상백이 허리를 숙였다.
“하오문의 부문주 상백이 신교의 삼공자를 뵙습니다.”
교주 제자들의 이름은 무림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상백은 서량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개방과 함께 천하 무림의 정보를 쥐고 흔든다는 하오문의 이인자다웠다.
서량이 말했다.
“차 한잔할 사이는 아니니 찾아온 용건만 간단하게 말하도록 하지.”
“말씀하시지요.”
상백의 태도는 무척이나 공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오문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천마신교에 비빌 수는 없다.
천하 각지에 정보망을 구축해 두었지만, 그들이 유일하게 정보원들을 심지 못한 곳이 천마신교의 영역이었다.
잘못 걸리면 나 하나 죽는 걸 넘어 하오문 전체가 절단 난다. 지금 그는 사신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 철혈성이랑 친하지?”
상백이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어떻게 그걸 아느냐 묻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습니다.”
섣부른 거짓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상백은 이 대화에서 사실만을 말하기로 다짐했다.
“그럴 거라 생각했어. 너희도 근본은 사파니까.”
서량이 씨익 웃었다.
“그래서 적살루하고도 친하고. 그렇지?”
오싹!
상백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상대의 반응을 본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협박이나 하자고 온 건 아니니까 그렇게 얼어붙어 있을 필요는 없어. 본론을 꺼내도록 하지.”
“…….”
“사천당가(四川唐家)에, 독에 정통한 수뇌부 중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자를 물색해 봐.”
“다, 당가를요?”
“왜? 불가능해?”
“불가능한 것은 아니오나…….”
“아하?”
서량이 품에서 전낭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
철컥!
전낭은 몹시 무거웠다. 분위기 때문에 차마 열어 볼 수는 없었지만 상상도 못 할 금액인 게 분명했다.
“선수금이다. 의뢰를 제대로 마치면 멋진 선물을 주지.”
“…….”
“기간은 닷새 안으로. 가능하겠나?”
상백이 전낭을 다탁 위에 올려 두었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그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 의뢰는 받을 수 없습니다.”
서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저, 저희가 건드리지 않는 몇몇 조직이 있습니다. 사천당가는 그중 하나로 지금껏 그들의 정보를 판 적은 없…….”
“그 조직에 본교도 끼어 있나?”
“예? 아, 예!”
“…….”
“…….”
“어떻게 할래? 의뢰 받을 거야, 말 거야?”
어찌나 씹어 댔던지 상백의 입술은 거의 너덜거리는 수준이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
당가 측 정보를 마교에 팔아넘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하오문은 그 길로 끝장이다. 어떤 면에선 마교보다도 더 지독하다고 알려진 곳이 사천당가 아니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하오문에 독인(毒人) 하나만 풀어 놔도 일대가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이봐.”
“예, 예?!”
“당가의 보복이 두려운가?”
“…….”
“두려운 모양이군.”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그는 당가는 무서우면서 우리는 무섭지 않냐는 말 따위 하지 않았다.
“철혈성이 지켜 주지는 않는 모양이지?”
“저희는…… 그저 철혈성에게…….”
“그렇지. 말이 연수지 잡부 취급받는다는 걸 모르지 않아.”
“…….”
“나한테 올래?”
상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요새 인재 영입을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닌가 싶긴 한데…… 사실 나한테 가장 부족한 게 정보력이거든.
교내에서야 상관없지만 바깥에서 활동하려면 이런저런 제약이 많을 것 같아서 말이야.”
“……!”
“적어도, 나조차 감당 못 할 적이 너희를 괴롭혔을 때 호통 한 번 못 치는 무능한 거래자가 되진 않겠다.”
서량이 손을 내밀었다.
“와라.”
순간 상백은 그 큼직한 손을 잡고 싶은 묘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부문주로서의 위치를 잊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허, 참. 의뢰도 안 된다, 연수도 싫다. 이거 너무 뻣뻣한 거 아닌가?”
“죄송합니다. 그러나 대산에서 오신 손님께 순간을 모면코자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이것이 바로 저의 뜻이니 바라옵건대 헤아려 주십시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군.’
나쁘지 않은 사내다. 호탕한 면은 없을지라도 책임감 하나는 확실한 위인이다.
“뭐, 알았다. 별수 없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
“그래도 당가 쪽 정보는 줬으면 좋겠는데. 자네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들고 왔거든.”
“……선물이요?”
“응, 선물.”
서량이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우우우웅!
순간 저 멀리서 두꺼운 책자 십여 권이 날아왔다. 상백의 눈이 흔들렸다.
‘허공섭물?! 이 젊은 나이에!’
서량이 창틀에 놓인 책자들을 툭툭 건드렸다.
“이게 뭘 것 같아?”
“……예?”
“적살루에서 가져온 거래 명부다. 그중에 너희 하오문도 끼어 있던데.”
“……!!”
“이거 의천맹 쪽에서 알면 개방이 앞장서서 너희를 싹 밀어 버리려고 하지 않을까?
사파의 정보단이 살수조직과 연수해서 뭔 짓을 했나…… 의천맹 놈들 상상력 풍부한 거 알지?”
상백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서량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루 빼서 나흘 준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