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귀환, 그리고 (2)
서량의 설명은 그다지 매끄럽지 못했다.
다소 두서없었고 툭툭 끊어지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이천상은 용케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적사가가 장악당했다는 말을 들었고, 놈들을 소탕한 뒤 적사가를 수습하고 오느라 늦었단 말이로군.”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렇죠.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자기가 생각해도 좀 허술한 설명이긴 했다.
가만히 서량을 보던 이천상이 병을 들었다.
“받아라.”
“예.”
잔을 받은 서량이 시원하게 술을 넘겼다.
이천상이 말했다.
“이제 제대로 들어 보도록 하지.”
“예?”
“겉으로 보이는 상황에 대한 열거 말고, 진짜 이유를 듣고 싶다고 했다.”
스스스.
이천상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일었다. 심경의 불편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기파였다.
‘역시 귀신처럼 아는군.’
하릴없이 술이나 푸는 사람이지만 이 괴물은 천하를 굽어보는 마안(魔眼)의 소유자다. 어설픈 거짓말 따위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서량이 말했다.
“사실 사고를 좀 쳤습니다.”
“사고.”
“예. 그런데 그게 제법 큰 사고라서요.”
“수습이라도 해 달라는 건가?”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제가 벌인 일은 제가 책임을 져야지요. 다만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사 해서요.”
“부탁이라.”
“예. 부탁이요.”
이천상의 눈에 흥미가 일었다. 이놈 입에서 이리 뻔뻔하게 부탁 좀 들어달란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들어나 보지.”
“얘기 끝나고 무공 좀 봐주십쇼.”
“무공?”
“예.”
“극마(極魔)에 이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굳이 내 도움이 필요치는 않을 터인데.”
역시나 이 양반은 자신이 극마에 올랐다는 걸 알고 있었다.
초절정고수만 되어도 상대가 극마에 올랐는지, 아닌지는 감으로 알 수 있다. 당연히 이천상은 서량을 마주하자마자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서량은 깨달았다. 이천상은 자신과 마주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
‘고구가 말했나.’
아니면 그냥 알아 버린 건가.
‘하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서량이 말했다.
“다소 어긋나는 부분이 많습니다. 수습이야 했지만 버린 것들도 상당히 많지요.”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봐주는 거야 어렵지는 않지. 한데 왜 얘기에 앞서 그런 부탁을 하는지를 모르겠군.”
“본격적으로 달려 보려고요.”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극마에 오른 서량조차 순간적으로 위축될 만큼 무시무시한 안광이었다.
“달려 보겠다…… 의미심장한 말이로군.”
“…….”
“너의 얘기를 들어 본 후 결정토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서량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이놈이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가 싶어, 이천상은 조금 놀랐다.
“이제 와 숨기는 건 의미가 없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한테는 꿈이 하나 있습니다.”
“꿈이라.”
“예, 꿈이요.”
“무슨 꿈이지?”
“의천맹과 철혈성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겁니다.”
이때만큼은 천하의 이천상도 놀라움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워? 그 두 곳을?”
“그렇습니다.”
“…….”
“…….”
“그렇군.”
이천상이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너와 적사가는 악연으로 얽혀 있는데 굳이 도움을 준 이유가 궁금했다.”
“…….”
“맹성을 공략하는 데 있어 병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없애 버려도 시원찮을 적사가를 되살리려 한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군.”
“그렇습니다.”
“왜지?”
“예?”
“의천맹과 철혈성은 분명 본교의 적이다. 하지만 넌 그간 그 두 집단을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
“나 몰래 외유를 나가기 전까지는 그러했지.”
서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천상이 잔을 비웠다.
“의천맹의 대장로를 만나고 나서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는가.”
역시 이 사람은 다 알고 있었어.
정일룡과 부딪쳤던 일은 애써 쉬쉬했었다. 굳이 이쪽에서 먼저 말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연한가.’
그 자리에는 수송대의 마인들과 호법원의 위사들이 있었다.
그가 정일룡이라고 확실하게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미 호법원에는 정일룡이 남하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었다.
상황을 유추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증오합니다.”
“증오.”
“예.”
서량은 말을 이으려 했다. 자신이 왜 두 곳을 증오하는지, 모든 것을 밝힐 순 없어도 증오의 깊이 정도는 설명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천상의 말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작은 불씨 하나가 온 산을 태우는 법. 사소한 증오가 어느새 활화산처럼 커지는 경우는 많다. 하물며 이유 없이 증오가 생기기도 하지.”
“…….”
“네가 왜 이제야 그 두 곳을 싫어하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겠다.”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하지만 독룡각주 건은 다소 무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가는…….”
“나는 적사가를 잘라 낼 작정이었다.”
서량은 깜짝 놀랐다.
“잘라 내요?”
“그렇다.”
“어…… 그냥 괘씸한 정도가 아니었나요?”
“조금 전에 말했다. 작은 불씨 하나가 온 산을 태우는 법이라고. 조직도 그렇다. 적사가는 본교의 앞날에 크나큰 지장을 줄 것이 분명한 가문이었어.”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녹슨 칼은 부러트려야 한다. 갈아서 다시 써 봤자 또다시 녹이 슬뿐이야.”
섬뜩한 말이었다. 그 말인즉, 한 번이라도 변심했다면 잘못을 빌어도 내친다는 뜻이 아닌가.
‘무섭구만.’
풍기는 분위기가 위압적일 뿐 생각보다 인간미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냉정해질 때는 천하 누구보다도 차가워질 수 있는 사람이 이천상이었다.
‘반대로, 그래서 나름의 인간미가 있는 것이지.’
한 번 내칠 땐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신(神)으로서 나름 챙겨 줄 만큼 챙겨 주는 이가 이천상이었다.
다만 신의 위상이 너무나 대단해서 말 한마디 쉽게 하는 자가 없을 뿐이다.
“검궁이 당가의 독을 들고 적사가를 점령했지. 하나 나는 검궁이 어떤 수단으로 적사가를 무너트릴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결과니까.”
적사가가 멸문이 된다는 결과.
순간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교주님 설마, 그걸 빌미로 정파 무림을 압박하려 하신 겁니까?”
“압박 정도로 마무리 짓기에는 적사가란 미끼를 지나치게 얕보는 처사지.”
“……?”
“한번 손봐 줄 생각이었다.”
소름끼치는 발언이었다.
이천상의 눈에 마기가 일렁였다.
“적어도 구파나 오대세가 중 세 곳을 적사가처럼 만들어 줄 생각이었지. 군사부에서 그에 따른 작전과 대응 방식을 완벽하게 세워 두고 있었다.”
“그랬……군요.”
그토록 살벌한 일을 저리 담담하게 말한다. 마음만 먹으면 당연히 그렇게 만들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렇게 되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순진하군.”
“예?”
“고작 몇 개의 문파들이 멸문하는 정도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열 배, 스무 배가 되어도 전고(戰鼓) 소리는 울리지 않아.”
“그럴 리가…….”
“반면, 단 하나의 문파가 박살이 나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전쟁이란 것이지.”
이천상이 잔을 들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죽었느냐가 아니다. 누가 죽었느냐지.”
“……!”
“시대의 중심에 서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많은 사람이 학살당했더라도 전쟁의 추는 격발되지 않는다.
그러나 중심에 선 자들 중 하나만 죽어도 천하가 뒤흔들리지.”
“그렇군요.”
“오히려 네가 감찰사로서 검궁에게 당했다면 그땐 진짜 전쟁의 북소리가 울려 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서량은 탄성을 질렀다.
“감찰사로서의 저는 교주님의 의지를 대행하고 있었으니까요.”
“정확하다. 의천맹의 대장로가 죽었어도 천하가 잠잠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놈은 진즉 퇴물이 되어 버렸어. 그 죽음에 별다른 가치가 없어진 것이지.”
무서운 사람이구나.
이천상은 무림이란 세상에 대해, 그 세상의 본질에 대해 무섭도록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움직일 수도, 큰일 앞에 흔들리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개미들이 치고받고 싸워 봐야 굴속의 호랑이에게는 하품밖에 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대화 속에서 느낀 바가 크다.
“얘기로 돌아가자면, 너는 적사가를 도움으로서 본교의 계획에 크나큰 차질을 주었다는 뜻이다.”
서량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그게 그렇게 되었군요.”
“그렇다.”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침묵이 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서량은 입을 닫았다. 굳이 꺼내 봐야 잡설에 불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보상.”
“교주님께서는 세 곳을 말씀하셨지요.”
“그렇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지만, 그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도록 판을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이천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화끈하기 짝이 없는 서량의 말에 흡족해하는 것 같기도,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한 미소였다.
“무슨 수로.”
서량이 얼굴이 냉랭해졌다.
“광마대를 시켜서 방령이라는 요망한 년을 보냈습니다. 형법당주를 통해 검궁의 소궁주도 보냈지요.”
“안다.”
“그 연놈들, 형법당에서 닦달 중입니까?”
“소궁주는 입이 무거워서 쉽지 않고 방령이란 아이는 제정신이 아니라서 치료 중이지.”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서량.
순간 그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의가 일었다.
“한 놈은 의천맹과 손을 잡은 것으로 보이고, 한 년은 철혈성과 연수한 비요왕의 제자입니다.”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검궁이 의천맹과 연수 관계에 있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령이란 계집이 비요왕의 제자인 것과 철혈성이 개입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거기에 전 당가의 독룡각주를 납치했습니다.”
“…….”
“독룡각주는 의천맹 소속, 소궁주 놈은 새외사궁 소속, 그리고 방령이란 년은 비요왕의 제자이니 곧 철혈성과 닿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모두 신교의 수중에 넣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군.”
“누가 죽느냐에 따라 천하의 판도가 달라진다고 하셨지요?”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그랬지.”
“이 세 사람, 그리고 지금 한창 빨빨거리고 있을 하오문을 이용해서 재미있는 판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자신 있게, 당당하게 말한다. 불꽃처럼 일렁이는 서량의 눈은 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천상의 얼굴에 다시 흥미가 감돌았다.
“말로는 무엇인들 못 할까. 다만 감찰사로서 너의 전과가 훌륭하니, 이번 한 번은 믿어 보겠다.”
“감사합니다.”
스르륵.
이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라.”
“예?”
“무공을 봐 달라 하지 않았느냐.”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어…… 그렇긴 했는데요. 얘기 더 안 들으셔도 됩니까?”
“더 이상의 대화는 잡설일 뿐이다. 네가 판을 만들어 보겠다 하였으니 결과만 확실히 내면 된다.”
이천상이 등을 돌렸다.
“모든 것은 결과로 말하라. 그때까지 본교의 행사를 어지럽힌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거참, 감사하기도 해라.
스르륵.
정자 너머 널찍한 공터에 두 사람이 마주 섰다.
후우우웅!
눈에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서 날아온 용린도가 둥둥 뜬 채로 서량의 코앞에 멈춰 섰다. 이천상의 허공섭물이었다.
꾸욱.
용린도를 쥔 서량의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방식은 전과 같다.”
이천상이 오른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