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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158화 (158/774)

158화. 귀환, 그리고 (4)

잔을 따르는 술병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음.”

항상 넘칠 듯 말 듯 하게 따라도 한 번을 쏟은 적 없던 술을 오늘은 조금 흘렸다.

병을 놓은 이천상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바닥에는 한 줄기 도상(刀傷)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 깊진 않지만 얕지도 않은 상처. 바로 서량의 일격을 막았을 때 생긴 상흔이었다.

“마도(魔刀)가 되려는 사도(死刀)라.”

과거 셋째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었을 때.

그때 녀석은 자신의 소매를 잘라 냈다. 아무리 진심이 아니었다지만 거기까지 닿은 고수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한데 어느 순간 극마에 오르더니 자신의 손에 도상까지 만들어 놓았다.

이전과는 달리 이천상은 진심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건 아니지만 서량의 일도는 제법 위협적이라 손을 들어 막을 수밖에 없었다.

‘군림마황기(君臨魔皇氣)를 뚫다니, 제법이야.’

군림마황기는 의심할 나위 없는 천하제일마공이다.

이 세상에 어느 하나 절대(絶對)란 말을 붙이기 어렵다지만 군림마황기는 다르다.

초대천마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 마공은 칠대천마 대(代)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서량이 창안한 구유마공 역시 대단했지만 군림마황기에는 구유마공에 없는 역사가 있었다.

수준은 엇비슷할지 몰라도, 무학의 방대함으로는 구유마공도 군림마황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무공도 익힌 사람의 역량에 따라 그 차원이 달라지는 법.

이천상의 깨달음으로 구현되는 군림마황기를 뚫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서량은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희한한 녀석이군.’

잔을 넘긴 이천상의 얼굴에 짙은 흥미가 어렸다.

‘실력은 십(十)인데 항상 십이(十二)의 힘을 보여 준단 말이지.’

가끔 그런 이들이 있다. 역량 이상의 결과를 선보이는 자들이.

그것은 단순한 무재(武才)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판단력, 의지력, 창의력, 실행력 등등 모든 요소가 극에 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모자라.’

이천상 스스로도 서량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량의 발치에도 따라오지 못하니까.

다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 역시 서량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명화(名畵)에 아쉬운 구석을 하나 발견했을 때, 그게 유독 크게 보이는 것과 비슷했다.

‘선봉장으로는 차고 넘치지만 한 단체의 수장이 될 만한 그릇은 아니야.’

이천상이 잔을 채웠다. 도상을 입은 손은 여전히 잘게 떨리고 있었다.

‘넓힐 수 있겠느냐.’

아직 후계자가 정해진 건 아니다. 근래 셋째가 유독 폭발적인 성장을 보여 주었지만 다른 아이들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기대가 된다. 삭막한 사막처럼 변해 버린 이 가슴을, 한 줄기 폭풍이 되어 뒤흔들어 준 놈은 오랜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릇을 넓힐 수 없다면, 후계 싸움에서 승리한다 한들 넌 교주가 될 수 없다.’

차라리 강하기만 하고 빈구석이 넘치는 녀석이라면 차기 교주로 낙점했을 것이다.

여하간 재미있게 됐다. 다시 교로 돌아온 서량이 어떤 행보를 보여 줄지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그때, 대전의 문이 울렸다.

“교주님. 총군사입니다.”

“드시게.”

문이 열리고 호요성이 들어왔다.

“총군사가 교주님을 뵙습니다.”

“어인 일이신가.”

“여쭤볼 게 좀 있어서요.”

호요성이 의아한 얼굴로 문서 하나를 들어 올렸다

“마경각(魔經閣)의 출입 허가가 떨어져서요. 혹시 교주님께서 내리신 것입니까?”

“그렇다네.”

“오? 누가 또 공(功)을 세운 모양이로군요. 혹 호법원주입니까?”

“다 알지 않나.”

호들갑을 떨던 호요성이 씨익 웃었다.

“역시 삼공자로군요.”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삼공자가 이번에 큰일을 해내긴 했습니다.”

검궁과 부딪치는 걸 결사반대했던 호요성이었다.

한데 서량은 그들과 부딪쳐 살아남은 건 물론 검궁의 무리까지 싹 쓸어 버렸다 하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는군.”

“사실 그렇습니다.”

“자네가 짠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망쳐 놓은 훼방꾼 아니던가.”

“그런 작전이야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는 것보다는 낫거든요.”

교주 앞에서도 반대 의견을 장난스럽게 얘기한다.

이런 모습이 이천상에게 더욱 신뢰를 줄 것임을 호요성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굳이 이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아도 자신에 대한 이천상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것도.

“한데 마경각에는 어쩐 일로 보내 주시는 겁니까? 제가 알기로 삼공자는 충분히 대단한 마공을 익히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부족한 게 있다고 떼를 쓰더군. 그래서 보내 줬네.”

떼를 썼다고 보내 줬단다. 이천상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말에 호요성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삼공자, 당신은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극도로 말수가 없던 이천상이 요새는 제법 대화라는 것을 한다. 그게 서량이 입마에서 깨어난 이후부터라는 걸 호요성은 알고 있었다.

“삼공자에게도 부족한 게 있었군요.”

“모든 사람에겐 부족한 게 하나씩 있기 마련이지.”

“교주님께도요?”

이천상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 아이’는 어떻게 하고 있나?”

“오공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현재 철마방 건을 마무리 짓고 돌아오는 중이고요.”

호요성이 눈을 찡긋거렸다.

“손님을 말씀하시는 거면, 현재 내원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기후가 맞지 않을 텐데.”

“딱 그 부분만 문제입니다. 뭐, 알아서 적응하겠지요.”

“제법 사고를 치는 아이라고 들었네만.”

“한 번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있는데 그런 성격은 아니더군요.”

“그런가.”

“그렇습니다. 다만…….”

호요성의 눈이 반짝였다. 뭔가 재미있는 일을 발견했을 때 보여 주는 눈빛이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뭔가를 갖고 있었습니다.”

* * *

“워어…….”

서량은 혀를 내둘렀다.

“어마어마하구만.”

마경각은 천마신교 내원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최대의 비급 보관소였다.

십대마공(十大魔功) 등 상위의 마학들이 비치된 비고와는 또 달랐다. 이곳에는 마공 비급뿐만이 아니라 수를 헤아리기 힘든 경전들도 비치되어 있었다.

소림사의 장경각과 거의 흡사하다고 볼 수 있었다.

비급보다 불경(佛經)이 훨씬 많은 장경각과 달리, 파순경전(波旬經典)보다 마공 비급이 더 많다는 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랄까.

‘근데 이거…….’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너무 닮았잖아?’

그는 실제로 장경각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각내 깊숙한 곳까지 들러 보지는 못했고 소림의 대표 무공들을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안의 구조가 어떤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소림사와 판박이야.’

장경각보다 훨씬 넓고 책장의 수도 많다. 그러나 구조 자체는 거의 똑같았다.

‘신기하구만.’

그러고 보니 마경각이라는 이름도 장경각과 비슷하지 않은가.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두 집단 사이에 뭔가 관계가 있나?’

의천맹과 철혈성이 발호하기 전, 천마신교의 최대 숙적은 소림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소림사는 부처를 모시고 천마신교는 파순을 모신다.

부처의 깨달음을 마지막까지 방해했다는 욕계(欲界)의 마신(魔神)이 바로 마라, 파순이 아니던가.

집단의 힘으로는 소림사가 천마신교에 비빌 수 없다. 그러나 천마신교의 중원 침공을 막기 위한 선두에는 언제나 소림사가 앞장서 있었다.

“……뭐, 상관없겠지.”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좋은 보법이라도 하나 건졌으면 좋겠는데.”

축지신보와 경신술을 버렸으니 구유마공에 어울리는 것들을 새로 구해야만 했다.

사실 극마에 이르렀다면 보법과 신법을 연마하지 않아도 된다. 폭발적인 마기를 이용,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어지간한 고수라면 죄다 가능한 일이다.

다만 체력과 기의 효율, 그리고 새로운 경지를 위한다면 보법과 신법이 필요했다.

‘더해서 쓸 만한 백타술(白打術)도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

서량이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눈이 유독 날카로웠다.

‘마경각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열두 시진, 정확하게 하루다.’

마경각에 둘러쳐진 진법은 열두 시진마다 스스로 변화한다. 만약 열두 시진이 지나면 출구가 바뀌어, 밖에서 열어 줄 때까지 나갈 수가 없다.

까짓거 며칠 기다리면 된다 싶을 수도 있지만, 이곳은 교주의 허가가 나지 않으면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비지(飛地)다.

교주가 직접 나서지 않는 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하릴없이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전에 쓸 만한 걸 구해야 해.’

그는 마경각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백팔마도학(百八魔道學)이란 푯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백팔마도학은 천마신교를 대표하는 무공들이었다. 신교십대마공 역시 백팔마도학에 속해 있었다.

실제 십대마공은 백팔마도학에서도 최상위권에 드는 무공이다. 그 외에 위력적인 외가무공(外家武功)들도 백팔마도학에 속해 있었다.

책장을 둘러보는 서량의 눈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수준 높은 무공이라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야.’

요(要)는 자신의 몸과 마공에 어울리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책자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이건 권법이군.”

책자에는 철상괴마권(鐵霜怪魔拳)이라는 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흐음, 괜찮은데?”

파괴력 넘치는 무공인 줄 알았는데 무척이나 섬세하고 부드러운 권법이었다. 치밀하게 짜인 투로가 빠르고 경쾌한 제천기의 살법과 비슷했다.

“괜찮지만 내게 어울리진 않아.”

극마에 오르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필요 없다. 지금의 그에겐 쾌속하고 섬세한 무공보다는 강하고 묵직한 무공이 필요했다.

그는 다음 비급을 꺼내 들었다.

“혈강수(血罡手)? 이건 유명한 건데?”

오륙십 년 전쯤인가?

사파의 명문인 흑사검문(黑邪劍門)이라는 대문파가 한 명의 광인(狂人)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사건이 있었다.

세인들은 그 광인을 혈수신마(血手神魔)라 불렀더랬다.

그 혈수신마의 독문무공이 바로 혈강수였다.

십대마공과는 달리 신교의 정통 마공은 아니지만, 워낙 위력적인 무공이라 어떻게든 빼앗아 구해 놓은 모양이었다.

비급을 훑어본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뭐 미친 무공이구만?”

언뜻 보아도 파괴력이 엄청나다. 단순 파괴력으론 신교 최상위권 마공들보다 한 수 위였다.

하지만 구결이 너무 엉망진창이었다. 게다가 파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상단전까지 건드리는데, 이러니 익힌 사람이 광기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강하기만 하면 뭐 하나? 이성을 상실해 버리는데.

그렇다고 구결을 정리해서 위력만 살리기엔 기반이 튼튼하지 못했다. 힘을 얻기 위해 생명을 깎는, 어떻게 보면 진정한 의미의 마공이라 볼 수 있겠다.

‘파괴력 하나는 절륜하구먼. 탐이 나긴 하는데…….’

서량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내가 뜯어고치는 데에 능해도 이건 안 되겠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외워는 둘까……?

서량은 혈강수의 구결들을 후다닥 머리에 집어넣었다. 당장에 쓸 수도, 아니 평생 쓸 일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호기심이 동했다.

다행히 극마에 오르며 상단전이 이전보다 더 활성화가 되었다. 상단전의 발달로 둔재가 천재가 되지는 못하지만 기억력과 해석력 등은 발전한다.

구결도 엄청나게 길거나 심오한 편이 아니라서 반 시진 만에 혈강수의 구결을 몽땅 외울 수 있었다.

“이게 나중에 도움이나 되면 좋을 텐데. 괜히 반 시진 날려 먹은 거 아닌지 몰라.”

그렇게 다시 한번 백팔마도학을 살펴보는 그.

한 시진이 지났고, 두 시진이 지났다. 어느새 그는 백팔마도학의 절반 가까이를 탐독했다.

서량은 나직이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역시 여기에는 없…… 엥?”

불그죽죽한 비급 한 권을 꺼내 든 서량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오호? 요것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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