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북해에서 온 바람 (1)
신교 내원에서도 한참이나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거처.
통나무보다도 굵고 긴 대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이곳의 풍경은 가히 절경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자색의 대나무들은 언뜻 보면 기괴했지만, 또 달리 보면 묘한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이궁(二宮)을 제외한 신교 최대의 비역(秘域). 신교의 근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
신비로운 바람과 죽음의 숨결로 점철된 이곳을 마인들은 고죽림(孤竹林)이라 불렀다.
후우웅.
후덥지근한 남부의 바람도 빽빽한 대숲을 지나는 순간 서늘해졌다.
그 바람은 고슬고슬한 죽향(竹香)을 머금고 있었다. 맡으면 어떤 고민도 사라질 것 같은 청량한 냄새였다.
풍경도, 기후도, 냄새도 좋은 장소.
그러나 이곳에 있는 청년에겐 대숲의 선선한 바람도 뜨거운 열풍처럼 느껴졌다.
“생각보다 더 후덥지근하구나.”
조금 낮지만 울림이 없고 깔끔한 음성.
새하얀 피부에는 잡티 하나 없었고 콧날은 산봉우리처럼 오뚝 섰다. 흑백 또렷한 눈은 적당히 컸으며 날렵한 턱선과 붉은 입술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가히 미모(美貌)라는 수식어가 부족하지 않을 용모였다. 여성보다도 더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외모는 완벽하다는 수식어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나 피부처럼 하얀 백발이 이 청년의 분위기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살짝 튀어나온 목젖이 아니었다면 백이면 백 여성이라 오해할 만한 아름다움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더위를 참고 살까?”
청년이 평상에 손을 뻗었다.
스스스슥.
가느다란 손끝에서 번져 나온 반투명한 백색 안개가 주변 기온을 뚝 떨어트렸다. 어느새 평상 주변 땅에 옅은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후우, 살겠구나.”
그때, 한 줄기 목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다.
“아직 적응치 못한 모양이오.”
“오셨습니까.”
나타난 사내는 환갑을 훌쩍 넘긴 듯한 노인이었다.
노인답지 않은 우람한 체격, 굉장한 근육질의 소유자였다. 키도 청년보다 한 뼘은 더 컸다.
스스스.
청년은 노인의 손에 잡힌 괴생물체를 보며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근처에 또 있었나 봅니다.”
“어디에나 있지, 이놈들은.”
툭.
거대한 닭, 창부를 던지듯 내려놓은 노인이 손을 털었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별거 아니오. 적어도 옹기종기 모여 있진 않으니까.”
“선배님께서도 이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생활은 아니고 번을 섰을 뿐이오. 얼추 칠팔 년 했지.”
“대단하십니다. 어지간한 고수들도 몇 달 버티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그거야 죽림 안으로 들어갔을 때 얘기요. 여기처럼 좀 떨어져 있으면 그럭저럭 안전하오.”
청년은 물끄러미 창부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놈은 뭐냐는 뜻이었다.
노인이 씨익 웃었다.
“혹시나 해서 잡았소이다. 게다가 이놈, 삶아 먹으면 그 맛이 아주 일품이거든.”
“……아?”
“다른 조 애들은 몰랐을 거요. 전대 일 조원들은 이 맛을 잊지 못해서 언제 임무가 떨어지나 목을 빼고 기다리곤 했었소. 생긴 것답지 않게 천하일미외다.”
“목숨과 맞바꿀 맛이라니, 대단합니다.”
“소궁주도 한번 드셔 보시겠소?”
절대로 먹기 싫다는 말이 반사적으로 나올 뻔했다.
물끄러미 창부를 바라보던 청년이 헛기침을 해 댔다.
“도전을 거부할 수는 없지요. 한번 먹어 보겠습니다.”
“허헛! 백숙 먹는 걸 도전이라 하다니 소궁주도 제법 유쾌한 구석이 있소이다.”
부러진 창부의 목을 든 노인이 흥겨움이 묻어 나오는 기색으로 말했다.
“가슴살을 잘게 찢어서 양념과 함께 비벼 먹으면 그것도 제법 별미요. 차게 해야 더 맛있지. 소궁주도 이따 좀 도와주셔야 하오.”
“아, 예.”
단순히 삶아 먹는 걸 넘어 다채로운 요리를 시도했던 모양이었다.
생사가 걸린 임무에서 저런 생각을 하기도 쉽지 않다. 저 노인이야말로 진짜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평상 위, 무려 여섯 가지의 고기 요리들이 깔렸다.
접시 하나에 담긴 양만 해도 장정 둘이 달라붙어야 겨우 해치울 수준이다. 그런 양으로 무려 여섯 접시였다.
청년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요리가…… 많네요.”
“무슨 소리요? 소궁주 나이를 생각하시오. 난 그 나이 때 이만한 양으로 열 접시는 거뜬히 비웠소.”
괴물인데.
한 접시만 먹어도 위장이 못 버틸 것 같은데 어떻게 열 접시나 비웠다는 건지 모르겠다. 천마신교에는 괴물 같은 양반들만 산다더니 그 말이 틀리진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어떻소?”
청년의 얼굴에 솔직한 놀라움이 드러났다.
“정말 겉보기와는 다릅니다. 맛있는데요?”
“껄껄. 내 말했잖소. 실망하지 않을 거라니까.”
가늘게 찢은 고기를 국수 먹듯 빨아들이며 노인이 말했다.
“사실 내심 바라는 것도 있었소. 고죽림은 교내, 아니 천하 어디보다도 영기(靈氣)가 짙은 곳이오. 이런 곳에 서식하는 괴물이니 먹으면 몸에 좋지 않겠소?”
“일리가 있습니다.”
“허허, 많이 자시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을 텐데.”
우걱우걱 잘도 음식을 해치우는 두 사람.
한참 고기를 씹던 청년, 여강휘(呂康輝)가 말했다.
“전에 말씀드렸던 건 말입니다.”
“음?”
“신교의 삼공자요.”
“아, 삼공자.”
“예에. 삼공자에게서는 아직 답이 오지 않았습니까?”
노인, 전대 호법원 일 조장이자 전대 백팔마장까지 겸했던 희대의 고수 양정(楊貞)이 말했다.
“아직이외다. 듣기로 귀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니 주변이 제법 부산스러웠을 거요.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별수 없지요. 알겠습니다.”
양정은 의아했다.
“그간 묻지 않았소만 본교의 삼공자를 그리 보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여강휘가 멋쩍은 듯 웃었다.
“별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검궁과 붙었다기에 흥미가 동하여 담소나 나눌까 싶었지요.”
“음.”
“제가 나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질 못하니 모양새가 영 시원찮게 되었습니다.”
양정이 고개를 저었다.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니고, 한번 만날 수 있겠느냐 넌지시 물어본 건데 모양새고 자시고 할 게 무엇이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식겠소. 마저 자십시다.”
“예에.”
입 안 가득 고기를 쑤셔 넣은 여강휘.
그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당대 신교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차기 교주 후보라…….’
이곳까지 오며 호법들에게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한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고수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강했고, 신기할 정도로 자유로워 보였다.
외부에서 온 호위 대상자 앞에서 신교에서 나도는 소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절댈 만큼.
‘소문 그대로의 사람이라면 기대를 걸어 볼 만한데.’
본래는 교주와의 독대를 원했지만 이곳으로 오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애초에 교주와의 독대는 그로서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런 와중에 삼공자의 행보를 듣고는 생각을 바꾼 것이다.
“……뭐, 기대만큼이 아니라면 그때 노선을 바꿔도 되니까.”
“음? 방금 뭐라고 하셨소?”
“예? 아, 아닙니다. 드시지요. 가슴살 무친 거, 이거 아주 별민데요?”
“껄껄. 드실 줄 아는 분이외다.”
* * *
“북해빙궁(北海氷宮)의 소궁주요?”
“네.”
서량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특별 호위 대상잔지 뭔지 하는 인간이 설마 빙궁의 작은 주인이었을 줄이야.”
하긴 그 정도가 아니면 호법원이 내각의 고수들까지 동원해서 데려오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대범하게 혼자 왔다고요?”
“물론 수행원들은 있었지요. 다만 수행원들은 현재 호북에서 머물고 있어요. 입교가 허락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니까요.”
“허.”
북해빙궁.
새외사궁의 하나로 북방을 담당하는 유서 깊은 세력이다.
새외의 무인들은 어지간해서는 중원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중 빙궁은 특히 폐쇄적이라 같은 사궁의 무인들 중에도 빙궁을 그저 전설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재미있는 점은, 모습을 드러낸 적도 몇 번 없는 북해빙궁이 언제나 사궁의 수좌라 불린다는 것이다.
세력이 얼마인지, 궁주가 누구인지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 사실에는 동의했다. 단순히 부풀려진 소문인지, 실제로 그렇게 강한지는 아무도 몰랐다.
“빙궁의 작은 주인이 본교에 입성했다…… 이거 신기하군요.”
“신기하죠. 그 폐쇄적인 집단의 작은 주인이 본교에 올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아니,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이것들 봐라?’
수송대와 함께 출교했을 때, 그는 야수궁의 병력들과 부딪쳤다.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이후에는 검궁과도 부딪쳤다. 새외사궁 중 무려 두 곳과 전투를 벌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빙궁의 작은 주인이 신교에 들어왔단다.
“새외사궁 간의 사이가 안 좋아진 겁니까?”
“좋고 나빠질 사이 운운할 만큼 결속력 좋은 이들이 아닌걸요?”
“엥? 그치들 서로 친한 거 아니었어요?”
소연심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저 중원 세력들이 워낙 강세라서 저희들끼리 형식상 뭉친 것일 뿐, 서로 사이가 좋진 않다고 들었어요. 각 집단의 성격만 봐도 친하기가 어렵죠.”
“하긴 그도 그렇습니다.”
야수궁과 검궁만 해도 성격이 판이했다.
빙궁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하나 남은 천룡궁(天龍宮)은 오만하기로 악명 높았다. 거리도 한참이나 떨어진 만큼 사이가 좋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게 사이가 안 좋으면서도 빙궁의 힘은 인정한다…… 그만큼 강한 세력이란 말일 테지만.’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대단한 빙궁의 작은 주인이 왜 절 보자고 하는 겁니까?”
“그건 저도 모르죠. 다만…….”
“다만?”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긴 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교주님도 아니고 원로분들도 아니에요. 대공자도 아니고 각 조직의 수뇌부들도 아니죠. 소궁주는 그 모든 사람을 제치고 공자님을 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게 왜요?”
“왜라니요? 뭔가 뚜렷한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다른 사람은 다 제쳐 두고 공자님을 부를 이유가 없잖아요? 소궁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볼 기회가 생긴 거라고요.”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대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의미가 진하게 밴 표정이다. 소연심은 답답함에 가슴을 치고 싶었다.
“직책은 소궁주지만 궁주를 대행해서 온 사람이에요. 당연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는 게 중요하지 않겠어요?”
“아니, 그거야 알겠는데 말입니다.”
“그런데요?”
“그놈이 뭔 생각을 하는지는 놈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호법원이나 교주님이 알아보실 일 아닙니까? 애초에 그놈이 이곳에 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 이유를 공자님이 알아보셔야 한다니까요.”
“내 말은, 소궁주가 본교로 입교하기 전에 왜 입교하고 싶은지에 대한 이유를 말했을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상세히 대화를 나눠 봐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교주님이라고요.”
“…….”
“제 말이 틀렸습니까?”
“네.”
“트, 틀렸다고요? 왜요? 아니, 다 떠나서 그놈은 대체 왜 본교에 온 건데요?”
소연심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구경하러요.”
“……?”
“…….”
“제가 지금 뭘 잘못 들었나요? 구경하러 왔다고요?”
“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농언인가 싶어 서량은 물끄러미 소연심을 바라보았다.
“……진짜로?”
“그렇다니까요.”
“아니, 본교에 나들이하기 좋은 꽃길이라도 만들었답니까? 구경하겠답시고 찾아오게?”
“제 말이요.”
“교주님이 그 말 같지도 않은 입교 신청을 용인하셨다고요?”
“그러니까 본교에 들어올 수 있었겠죠. 처음에는 군사부도 몰랐어요, 특별 호위 대상자 건에 대해선.”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구경하러 온 걸 용인했으면서 고죽림에 처박아 둔 건 무슨 처사랍니까?”
“거야 저도 모르죠.”
“흐음…… 그 자식 그거 냄새가 나는데?”
“냄새가 나니까 교주님께서도 들이셨을 거라 생각해요.”
“그냥 머리채 잡고 탈탈 털어 보면 안 됩니까? 감히 구경해도 되냐는 개소리를 지껄였잖아요. 뺨을 있는 대로 후려쳐도 분이 안 풀리실 텐데, 교주님.”
“물론 그래도 되죠. 빙궁과 대판 싸워 보고 싶다면요.”
“교주님은 빙궁 따위 개의치도 않으실 것 같은데.”
“맞아요. 다만 좀 귀찮아는 하시겠죠?”
“…….”
“마실 나간다 생각하고 한번 가 보시는 게 어때요?”
서량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담소 몇 마디 나누는 게 어려운 건 아니지만.”
그의 얼굴에 귀찮음이 있는 대로 묻어 나왔다.
“시파, 또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도는걸.”
초감각은 안 울리는데 기분은 영 찝찝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