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북해에서 온 바람 (2)
“헛? 공자님.”
“어, 왔냐.”
“예에. 출타하시는지요?”
“어어, 갈 데가 있어.”
“저도 같이…….”
“됐으니까 넌 내가 준 검보(劍譜)로 수련이나 해. 몸에 붙이려면 시간 좀 걸릴 거야.”
“아…… 예.”
후다닥 대문을 나서는 서량은 큼직한 죽립(竹笠)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마동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렇게 얼굴을 가리고 계시지?”
그때, 뒤에서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끄러우니까 그러셨겠지요.”
서량의 행동이 평소와 달랐기에 소연심의 존재도 몰랐다.
“환희원주님을 뵙습니다.”
“그렇게 각 잡고 인사할 필요 없어요, 마 호위.”
“아닙니다. 한데 어인 일로……?”
“설득 좀 하려고 왔다가 시원하게 몸 좀 풀었죠.”
“설득이라니요?”
“특별 호위 대상자요.”
“아!”
“일 조장이 저에게도 넌지시 말을 건네더군요. 차 한 잔 얻어 마신 값도 치를 겸 해서 왔죠.”
마동필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비무를 하셨습니까?”
“네.”
마동필이 부럽다는 듯 소연심을 바라보았다.
한 걸음 떼는 것도 힘든 것 같았다. 번져 나오는 마기가 몹시 불안정했다.
“꽤 격렬하게 주고받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래, 그런 정도가 아니었지.
‘역시 대단해.’
소연심은 조금 전의 대무(對武)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극마에 올라서일까? 아니면 타고난 것일까. 대체 그런 감각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녀는 천마벽력권을 대성한 희대의 권법가였다. 교내에서 그녀보다 강한 사람은 많지만, 그녀보다 권법의 이해도가 높은 사람은 다섯을 넘지 않았다.
‘아직은 입문에 불과하지만 극의(極意)로 뻗어 나가는 길목을 훤히 꿰뚫고 있어.’
벽력권의 극의는 일타제신(一打制身), 이격멸적(二擊滅敵)에 있다. 한 주먹에 적을 제압하고 두 주먹에 없애 버린다는 뜻으로 적을 해하는 데 있어 삼권(三拳) 이상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벽력권의 어떤 초식을 써도 마찬가지다. 지극히 패도적이고 강맹하지만 마도의 무공답지 않게 일단 제압부터 시킨 후 죽일지 살릴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교주님께서 알려 주셨을 리는 없고.’
교주님의 성격을 알아서가 아니라 삼공자의 동작에서 알아챌 수 있었다.
‘한 합, 한 합을 교환할 때마다 초식이 무서운 속도로 몸에 붙고 있어. 이런 식이면 대성을 이루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야.’
소연심의 눈가에 언뜻 부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천재는 다르구나.”
“아닐 겁니다.”
“으응?”
소연심이 마동필을 바라보았다.
마동필이 담담하게 말했다.
“공자님을 생각하신 것 아닙니까?”
“맞아요.”
“예.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소연심의 눈이 반짝였다.
“공자님과 가장 가까이 붙어 있었던 사람은 마 호위죠. 한데 마 호위는 공자님이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 무서운 성장세를 쭉 지켜봤잖아요?”
“어디까지를 재능으로 국한해야 할지부터 따져 봐야겠지요. 그 기준이 어찌 되었든 공자님께서는 분명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십니다. 그러나 감히 장담컨대, 하늘이 내린 무재는 아니십니다.”
소연심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모시는 사람을 저리 평가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천재가 아니라면 저 젊은 나이에 극마에 오르지 못했을 텐데요.”
“공자님을 보면서 느낍니다. 재능은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치지만,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라는 걸요.”
“그만큼 노력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건가요?”
“노력은 기본입니다.”
“그럼요?”
마동필이 대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량은 진즉에 사라졌지만 마치 그가 남긴 잔영을 바라보는 듯 마동필의 눈빛은 깊은 감명으로 꽉 차 있었다.
“삶 그 자체를 무(武)와 동화시키는 것. 나와 무도(武道)를 떼어 놓지 않는 것. 말하자면 무(武)의 화신(化神)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군요. 무림인 대부분이 삶과 무(武)를 동화시켜요. 그러지 않고선 강해질 수 없으니까.”
“수저를 드는 동작 하나에도 무의 이치를 담아내려 노력하진 않잖습니까.”
“……!”
“그 또한 노력으로 일구어 낸 공자님만의 방법이겠지요.”
“마 호위의 말은, 같은 노력을 해도 효율적으로 하라는 뜻인가요?”
마동필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연심의 말에 동의하긴 하지만 공자님에게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공자님의 불가해한 성장 속도에 재능은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건 안다.
“바쁘십니까?”
“네?”
“바쁘지 않으시다면 저와도 비무를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소연심의 얼굴에 놀라움이 피어났다. 적어도 그녀가 봐 온 마동필은 먼저 비무를 제안할 성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저야 언제나 바쁘죠. 아마 군사부 다음으로 바쁜 조직이 환희원일 걸요?”
“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뭐…….”
소연심이 미소를 지었다.
“하루 정도는 농땡이 쳐도 괜찮겠죠.”
“감사합니다.”
소연심이 연무장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 전에 밥부터 먹고 하죠. 내공 없이 백타(白打)를 주고받는데도 이렇게 지치네요. 나도 나이를 먹었나 봐요.”
* * *
“호오?”
서신을 받은 양정이 여강휘를 보며 웃었다.
“삼공자가 소궁주의 요청을 승낙했다고 하오.”
“아, 그렇습니까?”
여강휘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양정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십수 일을 보았는데도 저 아름다운 얼굴에 새삼 놀라게 된다.
“정말 신기하오.”
“예?”
“어떻게 사내의 얼굴이 그리 아름다울 수 있는지 모르겠소.”
말을 한 직후 양정은 아차 했다.
“미안하오. 이런 얘기 별로 좋아하진 않을 텐데.”
“아닙니다. 어찌 되었든 잘생겼다는 말인데요. 오히려 기분이 좋습니다.”
“허허.”
양정이 평상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어떻게, 이 늙은이가 자리 좀 피해 드리리까?”
“아,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요.”
“알다시피 나와 저 대숲 근처에서 은신하고 있는 이 조원들은 소궁주의 호위를 맡았소. 좀 떨어져 주기야 하겠지만 일정 거리는 유지해야 함을 이해해 주시길.”
“물론입니다.”
양정이 몸을 돌렸다.
“소궁주.”
“예?”
“굳이 이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며칠 봐 온 사이니, 노파심에 몇 마디 하고 싶소.”
“어떤……?”
“조심하시오.”
여전히 등을 돌려 걸어가며, 양정이 말을 이었다.
“과거 삼공자는 폭군이라 불릴 정도로 거친 사람이었소. 내 직접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소문의 절반만 사실이더라도 대하기 쉬운 사람은 아니외다.”
“아…… 그렇군요.”
여강휘가 고개를 숙였다.
“걱정 감사드립니다.”
“하면 근래 교내에서 삼공자가 어찌 불리는 줄 아시오?”
“……?”
“마군(魔君).”
“……!”
“평화의 시기가 지속되어 오면서 본교의 마인들 역시 어느 정도 호전성을 잃었소. 은퇴한 우리들, 구(舊) 마인들과는 다르지. 그러나 우리의 후배들 역시 마(魔)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이오. 그들도 내면에는 우리 못지않은, 어쩌면 우리 이상의 광기를 간직하고 있지.”
걸음을 멈춘 양정이 여강휘를 힐끔거렸다.
여강휘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져 있었다.
“그런 그들이 삼공자를 마(魔)의 군주라 부르고 있소. 화려한 수식어 따위는 붙지도 않았지. 마군이란 두 글자에는 그러한 젊은 마인들의 동경심이 묻어 나오고 있소.”
“…….”
“소궁주의 속내가 따로 있음을 모르지 않소. 나도 굳이 그걸 알고 싶진 않아. 그러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불필요한 언사로 그를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그 말은 끝으로 양정은 대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강휘의 눈이 깊어졌다.
‘마군이라…….’
그는 이곳까지 자신을 호위해 준 노고수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 대단하구만. 그 나이에 칠가의 수장들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무공을 연성했어? 그놈 완전 괴물인데?
- 어허, 이 사람아. 말조심하게. 교주님의 제자분 아니신가.
- 커험.
- 무공을 완전히 소실했다고 들었는데, 이 년 만에 그리 성장했다면 보통 대단한 분이 아니야.
- 무공도 무공이지만 결단력이 더 돋보이지. 칠가의 수장들을 상대로 담판을 짓는다…… 감찰사 견장을 달았다곤 해도 보통 배포론 힘들지.
- 어? 담판? 그건 또 뭔 소리래?
- 귀 닫고 사는 버릇은 여전히 안 고쳤구먼. 이번에 교주님께서 삼공자를 특수감찰사로 발탁하여 보냈지 않은가.
- 오호? 대공자나 이공자를 놔두고?
- 그러게나 말일세. 한데 삼공자가 칠가주들을 제대로 눌러 버린 모양이야. 투왕마가는 봉문까지 시켜 버렸다고 하더군.
- 키야, 호탕하군.
마도칠가에 대해서는 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신교의 손발이 되어 마도 무림에 크나큰 버팀목이 된 무가(武家)들이 아닌가.
그런 가문의 수장들을 상대로 그 어린 나이에 감찰까지 감행했단다. 어느 노고수의 말마따나 보통 배포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공은 노력해서 쌓을 수 있지만 배포는 타고나야 하는 법이라고 했어.’
여강휘의 눈이 반짝였다.
‘더더욱 흥미로운걸.’
당대 천마 이천상은 대공자를 제외하곤 한 번도 제자에게 공무를 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교주가 이공자를 건너뛰고 삼공자에게 공무를 주었다면, 삼공자의 능력이 그만큼 특출나다는 뜻이다.
‘능력만 출중하면 괜찮아.’
여강휘가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찌 되었든 신교 측에도 좋은 일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후우.”
심호흡을 한 여강휘가 평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사라라락.
댓잎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왠지 평소보다 바람이 더 강하게 부는 듯했다. 댓줄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렸다.
사박.
여강휘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사박사박.
바닥에 떨어진 댓잎을 밟으며 다가오는 한 사람.
‘왔구나.’
두근두근.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인기척을 지우지도, 존재감을 드러내지도 않아.’
일정한 걸음걸이와 보폭을 보면 제대로 단련된 무인인 게 틀림없다. 소문으로 듣던 삼공자가 분명한 것 같았다.
여강휘의 몸에서 무형의 기가 일어났다.
스슥.
바람에 흘러가듯 움직인 기가 다가오는 한 사람의 몸을 더듬으려 하였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강자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티이이이잉!
‘흡!’
흘려 보낸 기가 무서운 속도로 튕겨 나왔다.
‘은막기공(隱幕奇功)의 유음기(柔陰氣)가 통하지 않아.’
사물에 스며들 정도로 부드럽고 섬세한 기운이 유음기였다. 작정하고 쏘아 보내면 초절정고수도 유음기를 알아채기 힘들다.
그런 유음기가 접근조차 못 해 보고 튕겨 나온 것이다. 상대가 무섭도록 단련된 고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척.
마침내 걸음이 멈추었다.
여강휘가 눈을 떴다.
스스스스.
자연스레 퍼져 나가는 한기가 반경 삼 장 거리의 땅을 서리로 덮었다.
푸스스스.
동시에 불그스름한 열기가 서리를 빠른 속도로 지워 나갔다.
“죽어도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가끔은 이곳의 바람이 그리울 때가 있었지.”
육 척을 훌쩍 넘긴 키에 당당하기 짝이 없는 체격.
죽립으로 코 위를 가렸지만 얼핏 봐도 이립이 채 안 되는 청년임이 분명했다.
“좋은 바람 좀 쐴 테니 그 얼음장 같은 기운은 다시 심어 주시길.”
스르르륵.
여강휘에게서 풍겨 나오던 한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공자십니까?”
“그렇소.”
청년이 죽립을 벗었다.
순간 여강휘는 저도 모르게 풉! 소리를 내며 웃어 버렸다.
청년,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짙게 멍이 든 눈가가 아직도 아픈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시시한 이유로 불렀으면 재미없을 줄 아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