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실몽당이 (2)
“음?”
밤새 수련을 한 후 바깥바람을 쐬러 나온 관평의 눈에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여인 한 명이 보였다.
경국지색의 미모, 그러나 표정 없는 얼굴에서 관평 이상의 차가움이 엿보였다. 흔들림 없는 걸음과 은은하게 번져 나오는 마기가 칼날처럼 예리하다.
“서윤아.”
주서윤이 관평을 돌아보았다.
관평이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만나는구나.”
“네.”
천마신교는 그 넓이가 엄청나서, 교주의 제자들끼리도 작정하고 만나려 하지 않는 이상 마주치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신교 생활을 십 년 넘게 해 온 마인들 중에는 서로 안면조차 트지 못한 사이도 있었다.
“대관회의 때 이후로 처음인가?”
“네.”
“잘 지냈느냐.”
“네.”
여전한 단답이다. 관평은 미소를 지었다.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기파가 놀랍구나. 그새 또 놀랍도록 성장했어.”
“감사합니다.”
“하하, 좀 천천히 나아가거라. 곧 있으면 나도 따라잡히겠다.”
주서윤은 힐끔 관평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어울리는 무심한 눈빛.
“오라버니께서도 수련을 열심히 하셨군요.”
“오? 그래 보이느냐?”
대관회의 직후 얻은 크나큰 깨달음에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관평이었다. 익힌 무공이 원체 은밀하여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 역시 그 연배에 어울리지 않는 뛰어난 무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음?”
“아니에요.”
관평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고개를 돌린 주서윤의 얼굴, 워낙 표정이 없어서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는 주서윤에게서 언뜻 실망의 기색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거대 문파의 수장 못지않은 무력을 쌓은 그였다. 누군가에게 경탄을 일으킬 만한 무력임에 틀림이 없으나 주서윤에게는 모자라 보이는 듯했다.
‘흠.’
관평이 물었다.
“그나저나 이른 아침부터 어딜 가느냐?”
주서윤이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말이 없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뗐다.
“오라버니.”
“말하거라.”
“저는 대권에 미련이 없습니다.”
“……!”
느닷없는 폭탄선언이었다. 관평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니 제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그저…….”
“그럼.”
고개를 숙인 주서윤이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관평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대권에 미련이 없다고?’
지금껏 마주쳐도 별 대화가 없던 사이다. 이제야 몇 마디 대화를 나눠 보나 싶었거늘, 갑작스레 하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멀어져 가는 주서윤을 보던 관평.
잠시 후, 제환이 나타났다.
“공자님. 일전에 말씀하셨던 일을…….”
“…….”
“공자님?”
“음, 왔는가.”
“예에.”
제환은 관평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딜 그리 보고 계십니까?”
“제환.”
“예, 공자님.”
“서윤이를 감시토록 하게.”
“오, 오공녀 말씀이십니까?”
“그래. 민감한 아이이니 멀찍이 떨어져서 감시하도록.”
“갑자기 오공녀는 왜……?”
“그냥 변덕일세.”
관평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더 이상 변덕 부릴 일이 없으면 좋겠어. 그래서 감시하라는 거야.”
* * *
“공자님.”
마동필에게서 난감한 기색이 보였다.
“오공녀가…….”
“알아.”
서량이 어깨를 빙빙 돌렸다. 수련하기 전 몸을 푸는 것이다.
“그냥 들여.”
“알겠습니다.”
잠시 후, 방을 나선 서량은 연무장 한옆에 서 있는 주서윤을 바라보았다.
주서윤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서량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밥은 먹었냐?”
“네.”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고개를 끄덕인 서량이 연무장에 올라 몸을 풀었다.
주서윤은 그의 동작을 주시했다.
큰 키에 길쭉한 팔다리, 단련된 근육으로 똘똘 뭉친 서량의 몸은 가히 예술품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수십 개의 흉터가 상체 전반을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그것이 흉해 보이지 않았다.
쿵.
한 발 강하게 내디딘 서량이 자세를 낮추었다.
진지해진 얼굴, 말아 쥔 주먹. 전방을 주시하는 눈빛이 어느새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주서윤의 눈이 반짝였다.
‘수련의 시작인가.’
자신의 수련을 남에게 보이는 것에 개의치 않아 한다. 적어도 그 부분에서만큼은 자신과 공통점이 있다.
스륵.
서량이 주먹을 뻗었다.
주먹질 한 번, 걸음 한 번을 정성스럽게 움직인다. 하지만 그 행동은 무척이나 느릿했다. 둔공(鈍功)을 수련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세를 교정하는 건가?’
스르륵.
천천히, 점점 더 천천히.
느릿한 동작이지만 멍하니 보게 되는 마력이 있다. 속도도 일정했고 근육에 실린 힘도 같았다. 자세 자체의 허점은 많았지만 힘의 낭비는 하나도 없었다.
마치 무희(舞姬)들의 부드러운 춤사위를 보는 듯했다.
‘권법이다. 변화가 적지만 타점(打點)은 정교해. 강권(强拳)의 수법이로군.’
놀랍게도 주서윤은 그저 한옆에서 서량의 부드러운 동작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무공의 성향을 단박에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안목이 남다르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툭. 투두둑.
서량의 몸에서 흐른 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적당한 내공을 쓰고 있음에도 땀을 흘린다. 힘의 분배 측면에서 봤을 때 무척 힘들고 수준 높은 수련이지만, 극마에 이른 고수가 저리 땀을 흘리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주서윤은 내심 의아했다.
‘어렵지만 저렇게까지 힘들어할 수련은 아니야. 그런데 왜……?’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보법?!’
그렇다. 서량이 중점에 두는 수련은 권법이 아니라 보법이었다.
구사하는 권법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막상 다시 깨닫고 보니 엄청난 난이도의 보법을 연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런 보법이 있었다니.’
천재의 안목으로도 어떤 방위를 짚는지 알 수 없다. 공방의 비율은 어떤지, 어떤 빈틈을 쑤시고 들어가는지 하나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학 자체로는 놀랍기 그지없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수준 높은 보법과 권법을 펼쳐 내고 있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힘들어한다는 것은…….’
짙은 의문으로 가득 찬 주서윤.
이윽고 서량의 수련이 끝이 났다.
“여전히 힘들군. 그만해야겠어.”
주서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이동해 있지만 그래 봤자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았다.
‘벌써? 이렇게 빨리 수련을 마친다고?’
폐장이 터질 것 같은 얼굴도 아니고, 내력을 전부 소모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힘들다고 그만한단다.
‘저 정도 강도의 수련으로 만족한다는 것인가?’
극마의 오른 고수라면 남들은 상상 못 할 수련을 할 줄 알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만큼 지쳐서 당분간은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될 줄 알았다.
한데 아니다. 상당히 지친 것 같지만 굳이 운기를 하지 않아도 금세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이다.
‘대체 어떻게……?’
주서윤의 얼굴에 혼란이 일었다. 저런 안이한 수련으로 어찌 만족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고수가 될 수 있었을까.
“앵화야.”
“네, 공자님.”
저 멀리 서서 비질을 하던 앵화가 쪼르르 달려왔다.
“밥이나 먹을까?”
“네!”
서량이 힐끔 주서윤을 바라보았다.
“너도 한 끼 할래?”
“…….”
“앵화야, 일 인분 더 챙겨 줘.”
그렇게 연무장 한편에 자리가 펼쳐졌다.
서량이 수저를 들었다.
“밥 먹자.”
마동필과 앵화가 우걱우걱 밥을 퍼먹었다.
어색하게 자리에 앉은 주서윤이 서량을 보았다. 서량은 거의 식탁 위를 모조리 쓸어 버릴 기세였다.
한참 밥을 먹던 서량이 말했다.
“동필아.”
“예, 공자님.”
“좀 있다가 한 판?”
“저야 영광입니다.”
“좋아.”
짤막한 대화 이후 다시 쩝쩝거리는 소리가 식탁 위를 점령했다.
서량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접시 세 개를 비우고 나서였다.
“앵화야.”
“네, 공자님.”
“거처 여기저기에 삶은 고기 놔둘 필요 없다. 그래도 금호는 안 와.”
앵화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어디선가 신선놀음하고 있을 테니까.”
“네에.”
“그래서 내가 다 주워 먹었다, 고기.”
“아…….”
“안 그래도 습하고 더운데 그대로 뒀다 상하면 음식 아깝잖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어요.”
“그게 죽을죄면 난 만 번은 더 죽었을걸…….”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주서윤은 내심 놀랐다.
‘벽이 없구나.’
셋째 오라비는 호위무사와 하녀에게도 친구처럼 대하고 있었다. 억지로 만든 분위기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분위기라는 게 더 놀라웠다.
“그래서.”
퍼뜩 놀란 주서윤이 서량을 바라보았다.
서량이 탐욕 어린 눈으로 그녀 앞의 고기 요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먹을 거야, 안 먹을 거야?”
“전…….”
“안 먹을 거면 나 줘.”
주서윤이 접시를 건넸다. 서량이 게걸스럽게 접시를 비워 냈다.
“쩝쩝, 뭐 건진 거라도 있어?”
모두가 서량을 바라보았다.
서량이 주서윤에게 시선을 던졌다.
“보고 배운다며? 뭐 건진 거 있냐고.”
“아직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주서윤의 눈이 흔들렸다. 당연히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
“깨달음은 스스로 얻어야 가치가 있는 법. 하지만 시간 죽이는 것만큼 아까운 것도 없으니까 말해 주겠는데, 앞으로도 똑같을 거다.”
“똑같다니요?”
어느새 모든 접시를 싹 비워 버린 서량이 배를 두들겼다. 나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너와 나의 무공 격차 때문이 아니야. 지금의 넌 누구의 수련을 봐도 너의 문제를 알기 힘들어.”
“왜죠?”
“왜긴 왜야, 집착이 심해서 그렇지.”
“무(武)에 대한 집착을 말씀하시는 거면…….”
“아니. 네 방식이 널 가장 빠르게 성장시켜 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 믿음에 대한 집착이지.”
“……!”
“집착을 버리라고는 말하지 않겠다만, 네 집착이 모두에게 옳은 방법이 아니라는 건 인정해야지.”
주서윤은 서량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집착? 내가 내 방식에 집착하고 있다고?’
그럴 리가 없다. 그녀는 분명 누구보다 힘들게 수련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쉴 때는 확실하게 쉬어 줄 줄도 알았다. 그 휴식까지 포함해서 수련이라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인간관계도 똑같잖아? 상대를 이해해야 관계가 발전하는 거지. 무공도 같아. 무수히 많은 무인들에게는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을 인정하고 고심해 보지 않으면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 뿐이야.”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굳이 너한테 할 말은 아니다. 지금 네 나이에 너만 한 경지를 구축한 후기지수가 천하에 몇이나 될 것 같으냐? 장담컨대 다섯을 넘지 못할걸.”
“만족하지 못해요.”
“만족하지 못하면 시야를 넓혀.”
도대체 그 시야를 넓히라는 것이, 머리가 굳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무에 관한 한 충분히 유연한 사고를 하고 있는데 이 사람과 난 무엇이 그리도 다른 것일까.
“후우, 배가 부르니 이제야 살 것 같군. 힘이 난다.”
서량이 팔을 빙빙 돌리며 씨익 웃었다.
“미리 말하는데 안 봐준다.”
마동필이 마주 웃었다.
“바라 마지않습니다.”
“자신감 미쳤구만? 좋아, 오늘 두 눈을 시퍼렇게 만들어 주…….”
순간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마동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일변한 분위기, 주서윤은 의아했다.
‘왜……?’
“동필아.”
“예, 공자님.”
“잡아 와라.”
파아악!
마동필이 번개처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