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실몽당이 (3)
서량의 거처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곳.
한 그루 거목에 올라탄 제환이 안력을 키웠다.
‘삼공자의 거처…….’
제환의 눈이 번뜩였다.
‘오공녀가 삼공자의 거처에 있다니.’
그는 상당히 놀랐다.
오공녀 주서윤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강함이라는 것 하나에 목숨을 건 타고난 무골(武骨)이었다.
그래서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덕분에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무(武)를 궁구할 사람, 그게 바로 오공녀 주서윤이었다.
그런 그녀가 삼공자의 거처로 왔다.
‘심상치 않군.’
강철처럼 단단하고 북극 빙해만큼이나 차가운 그 마음에 한 줄기 금이라도 간 것일까?
‘설마 둘이 정분이라도 난 것인가.’
제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없다.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껄끄러운 기분이었다. 정분이라도 난 게 아니라면 저 무심한 오공녀가 어찌 삼공자의 거처에 들어가 있을까.
‘어찌 되었든 오공녀를 감시하란 공자님의 말씀은 옳았어. 정분이든 뭐든, 혹시라도 둘이 힘을 합친다면 공자님께서 걸으실 길에 큰 방해가…….’
그때였다.
‘응?’
제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삼공자의 거처가 훤히 보이는 거목의 가지, 연무장 한옆에서 식사 중이던 네 사람 중 하나가 사라졌다.
‘어디로 간 거지?’
순간 제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깐 생각에 잠겼다고 대상이 움직이는 걸 놓쳤다? 그것도 이렇게 멀리서 보고 있는데?
‘설마?’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이지 마라.”
‘헉!’
제환은 깜짝 놀랐다.
어느새 자신의 목젖 옆으로 서늘한 검신(劍身)이 대어진 게 느껴졌다. 진한 먹물로 칠한 것처럼 빛깔이 어두운 검신은 짙은 마기와 기이한 요기(妖氣)로 정련되어 있었다.
“누구냐.”
“……!”
“이곳은 삼공자님의 거처다. 감히 공자님을 엿보는가.”
제환이 살짝 침을 삼켰다.
‘고수!’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자신보다 한 수 위의 고수임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걸렸구나.
이 먼 거리에서 어떻게 알아챘는지 모르겠다. 신법만큼 은신의 경지도 뛰어나서 교내 수뇌부들도 누구 하나 자신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제환이 입술을 깨물었다.
‘별수 없지.’
우우웅.
제환의 몸에서 은밀한 마기가 일었다.
동시에.
퍼어어어엉!
굵은 나뭇가지 십여 개가 그대로 박살 나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희뿌연 연기가 사방으로 번졌다.
사악!
그 연기를 뚫고 나아가는 제환의 신법은 가히 놀라운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신법만큼은 초절정고수의 그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이 커지겠군.’
품 안의 독탄(毒彈)을 마기로 터트리며 도주했다. 이 정도 독탄에 죽진 않겠지만, 행위 자체가 위협이다. 이 일이 교내에 공론화되기라도 한다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플 것이다.
‘그래도 이게 나아. 자칫 공자님의 이름이 언급되면…….’
빠각!
제환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검병(劍柄)으로 이마를 가격당한 그가 그대로 거꾸러졌다.
어느새 그 앞에 나타난 마동필이 서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촤아아악!
“헉!”
몸을 덮쳐 오는 서늘한 감각에 깜짝 놀란 제환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흡!’
본능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리려던 그는 지독한 고통에 몸을 수그렸다. 단전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왔다.
‘보, 봉인?!’
단전이 봉인되었다. 그것도 완벽하게.
마도 무림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명한 수법이었다. 억지로 내력을 끌어올리려 했다간 단전 주변의 혈도들이 상할 것이다.
“흥미로운 녀석일세.”
제환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흡!’
참마도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큰 칼을 어깨에 걸친 청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양을 등진 청년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떡 벌어진 체형과 사람 몸뚱이만 한 칼이 무지막지한 박력을 풍겼다.
제환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본능적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지만,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존재감에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가진 힘은 능히 대호(大虎)를 방불케 하는데, 정작 쓸 수 있는 힘은 고양이만 하다…… 게다가 음기(陰氣)는 찾아볼 수 없고 양기(陽氣)만 가득해. 마공이라도 이렇게 균형이 무너져선 움직일 수 없을 텐데.”
정신이 아득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제대로 들어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스르륵.
서량이 제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너 누구냐?”
“…….”
“누구냐고.”
제환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상대의 엄청난 존재감에 몸이 바르르 떨릴 뿐이었다.
스윽.
섬뜩한 흑색 검신이 또다시 목과 쇄골 사이에 대어졌다.
“공자님의 물음에 속히 답할 수 있도록.”
제환이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저는…….”
“그래, 너는?”
어차피 되지도 않는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는 현재 천마신교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신진고수이자 교주님의 제자다. 알아보려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정체는 밝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왜 이곳을 감시했는가에 대한 이유는 밝힐 수 없다.
“제환이라 합니다.”
“제환?”
서량이 마동필을 바라보았다.
“알아?”
마동필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서량이 앵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도 모르지?”
“네에.”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주서윤에게로 향했다.
“넌 아냐?”
주서윤 역시 고개를 저었다.
“야, 유명인도 아닌데 이름만 툭 던져 놓으면 누가…….”
“감히 삼공자님의 거처를 들여다본 죄, 달게 받겠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상황에 따라서는 그럴까도 생각 중이야.”
오싹!
제환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허락도 없이 삼공자의 거처를 들여다본 건 충분히 중죄라 할 만하다. 하물며 독탄까지 터트리고 도주를 감행했으니, 빼도 박도 못할 죄인 신분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죽음의 위협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죽이겠다는 말을 실제로 들으니 사타구니가 축축해지는 기분이었다.
“네가 여기에 온 이유는?”
“저는…….”
“그래.”
부들부들 떨던 제환이 홱 하고 고개를 돌려 주서윤을 바라보았다.
핏발 선 눈, 두 눈에서 뿜어지는 광기가 보는 이를 압도했다.
“저분이 이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주서윤에게로 향했다.
무심하기만 하던 주서윤의 얼굴에 한 줄기 당혹감이 어렸다.
“다섯째가 내 거처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예!”
“그러니까, 나를 감시하러 온 게 아니라 다섯째 때문에 왔다는 뜻이냐?”
“그렇습니다.”
“왜?”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심정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 제가…….”
“그래.”
“제가 저분을…….”
“혹시나 해서 말하겠는데, 다섯째를 열렬히 사모해서 뒤따랐다는 변명 따위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순간 제환의 눈이 흔들렸다.
서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찰나지간 제환의 얼굴에 떠오른 당황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확실히 나 때문에 온 건 아닌 것 같아. 다섯째를 보러 왔다는 말은 진심인 것 같다구.”
“……!”
“그런데 왜 ‘이유’에 대해서는 숨기려 드는지 모르겠네?”
제환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그는 죽어도 모를 것이다. 극마지경에 오른 자의 안목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화술과 거짓, 응변을 전문적으로 훈련받았거나 초절정고수 정도가 아닌 이상 서량의 마안(魔眼)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물며 마(魔)에 속한 자라면 더더욱.
“소속.”
“……?”
“소속이 어디야? 그것부터 말해 봐. 알다시피 소속을 숨기는 건 의미 없는 짓이야. 조금만 조사해 보면 다 나오니까.”
츠츠츠.
서량의 동공이 피처럼 붉어졌다.
“너 어디 소속이냐? 다섯째한테 널 딸려 보낸 사람이 누구지?”
빠르게 달려 나가는 제환의 뒷모습을 보던 서량이 주서윤을 힐끔거렸다.
주서윤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이번만큼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량으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너 인기가 좋구나?”
“…….”
“널 열렬히 사모하는 사람은 저치가 아니라 저치가 모시는 쪽인 모양인데?”
꾸욱.
펑퍼짐한 소매 속, 주서윤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 녀석도 참 힘들게 사는군.”
실제로 관평이 주서윤을 좋아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사실 교주의 제자라는 위치상, 주서윤을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 수하를 보냈다는 게 더 신빙성이 있다.
주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는 문제예요.”
“상관있는 문제지.”
“…….”
“누가 널 죽이겠다고 칼을 들이밀어도 상관없는 일이라며 얌전히 칼을 맞아 줄 거냐?”
“…….”
“일방적인 관계도 관계. 돌발적으로 생겨난 예기치 못한 관계라도, 네가 엮여 버렸다면 그때부턴 네 문제다.”
주서윤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한 손 거들어 주랴?”
“……네?”
“넌 대권에 관심이 없더라도 난 그 대권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거든. 관평과는 언제가 되었든 부딪쳐야 하지. 홍 씨 그 머저리처럼 먼저 건드리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만, 이렇게 뒤에서 알게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면 나도 마냥 가만히 있긴 좀 뭣하잖아?”
주서윤의 눈에 한기가 어렸다.
“오라버니 말마따나 상관이 있다 해도 이건 제 문제예요. 오라버니와는 상관이 없을 텐데요?”
“맞다.”
“제 문제는 제가 해결해요.”
“물론 네 문제는 네가 해결해야지. 다만 한 손 거들어 주겠다 한 것은 널 돕기 위해서가 아니야. 나를 위해서지.”
“……미래의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함인가요?”
“고민거리를 하나 줄일 기회잖아.”
“도대체…….”
주서윤의 눈이 번뜩였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극마에 오른 거죠?”
“또 그 질문이냐.”
“무공 외적으로 이것저것 손대길 주저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와 같은 경지에 올라선 건지 모르겠어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대답 없는 웃음에 주서윤이 몸을 돌렸다.
“나중에 다시 찾아올게요.”
“원하는 대로.”
그렇게 주서윤도 사라졌다.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오가 막 지난 하늘은 몹시 맑았다.
“며칠 남았지?”
마동필이 대답했다.
“공자님께서 출교하겠다 말씀하신 날은 사흘 남았습니다.”
“사흘이라…… 여유롭군.”
그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목을 풀었다.
“공주님 구출하기 전에 음흉한 인간 낯짝에 그림 몇 개 그려 주고 가야겠다.”
* * *
“…….”
“……죽여 주십시오.”
제환을 내려다보는 관평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차가웠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행일세.”
“예?”
“별 해코지를 당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것이면 되었어.”
제환이 이를 악물었다. 임무에 실패한 수하의 귀환인데도 안도부터 해 주는 주인이다.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그보다는 자괴감이 더 컸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네. 둘러대든 시인하든 자네는 내 사람이야. 칼을 휘두른 것도 아니니 별일 없을 걸세.”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자네를 믿네.”
휴식하라 제환을 내보낸 관평.
잔에 차를 따르며 그가 중얼거렸다.
“만전을 기한다? 진즉에 그랬어야지.”
한 번 지나간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슬슬 잡아먹을 때가 됐어.”
제법 일을 잘하는 녀석을 구했구나 싶었더니 삼 년 만에 제 무능함을 증명했다.
겉으로 드러난 무능함은 두 번, 세 번의 실수를 만들기 마련이다. 그는 실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제법 길게 간 셈인가. 쓸 만했는데 아쉽군.”
의자에 등을 묻은 관평.
그의 눈에 은근한 열기가 일었다.
“셋째와 다섯째라…… 정분이라도 난 건가.”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주서윤의 얼굴을 떠올렸다.
새하얀 피부에 무표정한 얼굴. 절세미녀라는 표현은 딱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말 같았다.
“재미있어.”
그 아리따운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지는 걸 상상하니 절로 짜릿해진다.
그가 한참 주서윤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문밖에서 하인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무슨 일이냐.”
“삼공자가 찾아왔습니다.”
순간 관평의 얼굴이 굳어졌다.
“셋째가?”
“그렇습니다.”
“……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 시진만 기다리라 전해라.”
“바, 반 시진 말씀이신지요.”
“그래.”
차갑기만 하던 관평의 얼굴에 하얀 미소가 어렸다.
“반 시진이면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