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도전생기-170화 (170/774)

170화. 실몽당이 (5)

관평의 눈이 부릅 뜨였다.

‘이럴 수가…….’

지이잉. 지이잉.

안정시킨 마기가 갑작스레 들끓기 시작했다.

자신이 의도한 게 아니었다. 상대에게서 풍겨 나오는 마기, 그 마기의 위압감 때문에 자신의 기가 흔들리는 것이다.

마도칠가의 가주급에 비견될 만한 자신의 기가.

‘이놈이 어떻게?!’

피처럼 붉어진 눈동자는 마치 맹수의 그것과 같았다. 범의 샛노란 눈과 마주한 것처럼 알 수 없는 섬뜩함이 전해져 온다. 동시에 그 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지금의 그로서는 상상도 못 할 경지. 완전히 다른 차원을 거닐고 있는 절대고수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마치 저 마존들처럼.

“……극마?”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지. 어떤 머저리가 제 알량한 힘을 믿고 날 눌러 보려 한 적이 있었다.”

스으윽.

탁자를 쓰는 서량의 손.

구유마기가 실린 손으로 탁자를 훑자 표면에 글자가 새겨졌다. 음각으로 파인 글자 뒤로 고운 가루가 흩날렸다.

관평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탁자에는 ‘홍위문’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세 글자가 주는 죽음의 예고보다, 진기로 탁자를 갈아 글자를 파낸 능력이 더 경악스럽다. 손으로 표면을 훑었을 뿐인데 예리한 비수로 깎아 낸 것처럼 글자가 음각되었다.

그야말로 신기(神技)에 이른 내공 운용이었다. 진기를 다루는 섬세함이 차원을 달리했다.

서량이 탁자를 후려쳤다.

콰앙!

볼품없이 쪼개진 탁자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소리에 관평은 정신을 차렸다.

셋째가 극마에 올랐다는 사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웠으나 그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칫 상대에게 휩쓸렸다가는…….

‘당한다.’

관평은 짐짓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설마하니 네가 벌써 극마지경에 오른 줄은 몰랐구나.”

“운이 좋았지.”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어찌 운만이 작용하겠느냐. 남들 모르게 네가 많이 노력했던 모양이지. 대단하다.”

진심 어린 감탄이었다. 실제로 관평은 서량에게 감탄했다.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극마지경에 오른 자가 고금에 몇이나 되겠는가.

서량 역시 관평의 목소리에 어린 감탄을 읽을 수 있었다.

다만 감탄은 읽었으되 그 이상을 읽기는 힘들었다.

‘진심, 그 이면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가.’

제환 정도의 수준이면 마안으로 진심을 꿰뚫어 볼 수 있다. 하지만 관평은 능히 초절정고수라 할 만하며, 그 수준은 칠가의 가주에 육박한다.

무력(武力)으로는 압도할 수 있지만 마안의 통찰력으로 마음을 엿보긴 힘들었다. 이유인즉, 관평의 기(氣)가 무의식적으로 상단전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거 무안하게 되었다. 나는 우리 사형제들 중, 폐관에 든 큰형님을 제외하곤 내가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다.”

“자신감을 가질 만하군.”

“그래. 다섯째, 그리고 막내의 재능이 유례가 없을 만큼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세월의 힘을 무시할 순 없지. 나중은 몰라도 지금만큼은 내가 최고인 줄 알았어.”

관평이 씁쓸하게 읊조렸다.

“진짜 괴물은 따로 있었구나.”

서량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인정이 빠르군.’

놀라움은 여전하지만 순식간에 마음을 수습한 듯했다. 저렇게 마음을 가다듬는 것 역시 재능이라면 재능일 것이다.

“어찌 되었건 네 호위무사에게 일어난 일은 미안하게 되었다. 네 마음이 편치 못한 것도 당연하겠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그 부분만큼은 내가 확실히 사과하마.”

“한판 붙어 볼 생각은 접은 듯하군.”

“내 어찌 지금의 너와 손속을 나누어 보겠느냐. 난 충분히 자신을 가졌지만, 너는 내 손이 닿지 않는 영역으로 나아가 버렸다. 그 격차는 경험과 귀계(鬼計) 정도로 메워 볼 만한 게 아니야.”

솔직한 평가였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자신감이 넘치지만 자만은 하지 않는다. 상대에 대한 인정도 빠르고 물러설 땐 물러설 줄도 알아.’

그렇다고 그것이 비굴해 보이지도 않는다. 강자 앞에서 고개를 조아린 것이 아니라, 그저 현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보통이 아니란 말이지.’

지금껏 보아 왔던 후보들과는 전혀 다르다. 홍위문이든 주서윤이든 채여민이든, 하나같이 재능이 두드러진 녀석들이었지 사람 자체가 뛰어나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직 어리기 때문이다. 나이도 나이지만 인간적으로 성숙해질 만한 경험이 부족했다.

관평은 달랐다.

무공도 대단하지만, 인간적으로도 많이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조금 더 솔직한 평가를 내리자면, 강호의 평지풍파를 수도 없이 겪어 본 중견고수를 보는 듯했다.

‘그렇다면…….’

서량이 눈을 찡그렸다.

‘내 생각이 틀렸나?’

그는 관평이 제환의 내공과 생명력을 몽땅 빨아먹고 강해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을 보자니, 그런 짓까지 할 놈 같진 않았다. 분명 야망도 있고 비밀도 있지만, 수하를 먹잇감 삼아 비상(飛上)하려 할 만큼 독한 놈처럼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정이 많고 소박한 성품이라…… 그 말이 사실이란 걸까.’

물끄러미 관평을 바라보던 서량이 툭 던지듯 물었다.

“입으로만 사과할 건가?”

“달리 원하는 것이라도 있느냐?”

“나는 탐욕에 절어 버린 인간이라 주면 주는 대로 다 받아 처먹거든. 하지만 오늘은 내 욕심을 좀 줄여 보도록 하지.”

“무엇을 원하느냐.”

“당사자의 사과.”

“음?”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 대신 사과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 하지만 난 당사자를 직접 보고 싶어.”

“…….”

“당사자가 와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면 그대로 물러나겠다.”

서량이 바닥을 힐끔거렸다.

“부서진 탁자 값도 물어 주고 말이야.”

관평이 마주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지었지만, 어딘지 조금은 어색해 보이는 미소였다.

“나의 사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냐?”

“당연하지. 책임은 언제나 스스로가 지는 법 아니겠나. 아랫사람의 잘못을 대신 책임져 주는 모습이야 감동적이지만, 나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군.”

“수하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은 나다. 그러니 수하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너는 내 수하가 아니라 나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

“네 수하가 터트린 독탄에 내 호위무사가 죽었다면, 너에게도 책임을 묻겠지만 그 전에 너의 수하부터 죽였을 것이다.”

관평의 눈이 흔들렸다.

서량의 미소가 점차 싸늘해졌다.

“책임은 공평하게 나눠야지.”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겠느냐?”

“그래.”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나의 사과라면 충분히…….”

“긴말 않겠다. 놈을 불러와. 놈이 내 앞에서 사과하고, 이후 내 호위무사에게도 사과해야 할 것이다.”

관평의 눈이 깊어졌다.

홍위문은 이런 서량의 언행에 실망했지만 관평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서량의 이 무모함은 단순함에서 나오는 무모함이 아니다. 무모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신감이요, 실력인 것이다.

과거, 사부 이천상이 제자들을 모아 놓고 한 말이 떠올랐다.

- 하늘에 이른 지혜보다도 무서운 것이 상대가 없는 무력, 즉 무적(無敵)의 무도(武道)다. 극에 이른 무력은 금력(金力), 전술, 상황 등 모든 것을 초월하지. 적이 없기에 제어도 안 되며 제어할 필요도 없다. 걸어 다니는 재앙이 되는 것이다.

걸어 다니는 재앙.

존재 자체가 법도이고 공포이며, 나아가 신앙의 대상이 된다. 말 그대로 신(神)이 되는 것이다.

‘어떠한 지혜보다도 무서운 막무가내로군.’

그리고 재앙이다. 관평에겐 서량의 말을 거부할 힘도, 명분도 없었던 것이다.

흔들리는 눈으로 서량을 주시하던 관평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정히 그래야만 하겠느냐?”

“어.”

“……좋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수하를 직접 불러 주마. 다만 네 말마따나, 온전히 사과를 받는다면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마주하지 않았으면 싶구나.”

데려온다고? 정말로?

관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리도록 해라.”

이것 봐라?

서량이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그는 굳이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호오? 녀석이 멀쩡하단 말인가?”

“무슨 말이냐.”

“사실,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그저 네 수하가 멀쩡한지 궁금했지. 한데 정말로 데려올 생각이구나, 너.”

느닷없이 진심을 말한다. 관평의 주먹이 저도 모르게 꽉 쥐어졌다.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도 그리 날 몰아붙였단 말이냐?”

“응.”

“금일 너의 무례가 참으로 과하구나. 이 형을 농락하고 싶었던 게냐?”

“전혀.”

서량의 눈에 마기가 서렸다.

등골이 절로 오싹해지는 무시무시한 마기가.

“그냥 대권 주자 중 하나인 널 얌전하게 밀쳐 내려 했지. 이유야 어찌 되었든 우린 경쟁자니까. 다만 내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적이 없으니 권고 정도로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

“그래서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 했다. 홍위문, 그 개자식처럼 뒤에서 칼을 갈 놈인지 아닌지 궁금했거든.”

“…….”

“담백하게 포기할 놈이라면 그것으로 끝. 내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어.”

관평의 눈이 깊어졌다.

“그게 아니라면?”

우우우웅.

서량의 몸에서 웅혼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내가 힘을 좀 써야겠지.”

치이이이익.

관평의 몸에서도 마기가 피어올랐다. 서량의 강력한 기운에 맞서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산되는 것이다.

쿠르르릉.

객당 건물이 떨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참아 주기가 힘들구나.”

“그렇겠지.”

“나가라. 내 앞으로도 널 보고 싶지 않구나.”

“네가 날 보지 않아도 될 경우를 지금 만들어 주려고 하잖아.”

관평의 눈에 핏발이 섰다. 참고 참았던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놈이……!”

그때였다.

“거기까지 해라.”

두 사람의 눈이 번뜩였다.

“간만에 사형제들이 모였거늘, 그 어인 추태란 말이냐.”

목소리는 객당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가만히 관평을 바라보던 서량이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푸스스스스.

놀랍게도 방 안의 벽에 큼직한 구멍이 뚫렸다. 힘으로 박살 낸 것이 아니라 극도로 예리한 마기를 이용해서 벽면을 갈아 버린 것이다.

그 구멍 너머.

당당한 체격의 한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 뒤에는 주서윤과 채여민, 이제 열여섯쯤으로 보이는 소년이 있었다.

사내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셋째의 무공이 실로 놀랍구나.”

셋째.

오라버니도, 형님도 아니고 셋째라고 한다. 교주인 이천상과 관평을 제외하고 그를 셋째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서량 역시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녀석 대단한데?’

관평에게 집중해 있었다곤 해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니? 은신술이 극에 이르렀거나, 자신과 엇비슷한 경지에 오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너희 둘의 기파가 너무 강해서 애들이 다칠까 무섭다. 내 진기로 막(幕)을 형성하긴 했지만 더 이상은 무리일 듯싶다. 힘들 거두거라.”

서량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은신술 따위가 아니야.’

사내, 진관용(秦寬龍)이 담담하게 말했다.

“간만에 큰형이 왔는데도 계속 그러고 있을 참이냐?”

* * *

태사의에 앉은 이천상은 눈을 감고 있었다. 항상 손에 쥐고 있던 호화스러운 잔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대전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법원주가 교주님의 부름을 받고 도착했사옵니다.”

“들라.”

쿠구궁.

대전이 열리고 무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리려던 찰나, 이천상이 손을 들었다.

“쓸데없는 인사는 되었네.”

“…….”

“가져왔나?”

“예.”

품에서 대여섯 장의 문서를 꺼낸 무담이 공손하게 들어 보였다.

우우웅.

문서가 저절로 날아와 이천상의 손에 잡혔다.

번쩍!

이천상이 눈을 떴다. 평소의 무심한 안광과 달리, 두 눈에 깊은 흥미가 깃들어 있었다.

문서를 훑어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르륵.

문서들이 재가 되어 흩어졌다.

“오늘 아침이었군.”

“그렇습니다.”

“과연,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 힘의 정체는 첫째의 것이었단 말이지.”

무담이 고개를 조아렸다.

“경하드리옵니다, 교주님.”

키우는 제자 중 무려 두 명이나 극마에 올랐다.

이는 신교의 천년 역사를 살펴봐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제자를 스물이 넘게 둔 교주도 있었고 하나, 혹은 두셋만 둔 교주도 있었다.

하나 후계자들이 둘씩이나 극마에 오른 건 초대천마, 그리고 칠대천마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였다.

“이것이 정녕 축하를 받을 일인지는 생각을 해 봐야 할 문제겠지.”

“예?”

이천상의 눈이 반짝였다.

“어찌 되었든 놀랍긴 놀랍군.”

첫째 진관용은, 최초로 받았지만 결국 실패작이 되고야 말았던 ‘그 녀석’과는 전혀 달랐다.

게다가 서량만큼 영혼이 단련되지도 않았고, 주서윤만큼 눈에 띄는 재능이 있지도 않았다.

그가 진관용을 제자로 삼은 이유는 녀석이 자신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각자가 이천상의 일면을 닮은 구석이 있었고 재능도 있어서 뽑은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가장 자신과 닮은 제자는 역시나 진관용이었다.

“셋째에 이어 첫째도 내 예상을 벗어나 버렸네.”

“무슨 말씀이신지…….”

“폐관이 삼 년이나 될지도, 극마를 깨우쳐서 나올지도 몰랐단 말이지.”

진관용의 나이는 서른일곱.

이천상보다 이삼 년 늦은 나이지만 거의 같은 나이대에 극마를 깨우쳤다. 정말이지 이런 면에서도 닮을 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 첫째가 둘째의 숙소로 애들을 끌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 셋째도 있다?”

이천상의 입꼬리가 쑥 올라갔다.

이전까지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 없는 큰 미소.

“삼파전이 벌어질지, 둘만의 신경전으로 끝이 날지 기대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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