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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173화 (173/774)

173화. 답이 없는 문제란 없다 (3)

문서를 내려다본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군.”

“그렇습니다.”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호요성이 말을 이었다.

“천보금가가 재정을 지원해 주고 있다곤 해도 적사가의 회복 속도는 유례가 없을 만큼 빠릅니다. 가내 마인들이 독기를 품은 모양입니다.”

탁자 위로 문서를 던진 이천상이 나른하게 말했다.

“타성에 젖었다고 해도 마인은 마인. 자기 앞마당에서 눈 뜨고 당했으니 분하지 않을 수 없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가주석은 여전히 공석인가.”

“그렇습니다. 현재로선 전(前) 가주의 딸, 홍여린이 후계로 가장 적합하나 그녀는 금가주의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아마 그 가르침이 끝날 즈음 정식으로 논의가 되겠지요.”

이천상이 잔을 들며 중얼거렸다.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녹슨 칼은 갈지 않고 부러트린다. 그런 신조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부러트리려 했던 칼이 묘하게 갈아지고 있단다. 아직 제 쓰임새를 증명하진 못했지만, ‘무기’로서의 효용성을 되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활은 셋째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까지 들여다보진 못했겠지.’

아마 셋째 역시 적사가를 발아래 두고 휘두르려 했지, 이전처럼 되살려 줄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녀석의 머리에는 증오로 범벅된 목표가 있을 뿐, 적사가에 대한 동정심 따위는 없으니까.

하지만 녀석이 이 판에 끼어든 이후 적사가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럿이 죽어 나갔지만.

‘병기로서의 효용 가치가 다시 증명되기만 한다면야.’

그때, 호요성이 조심스레 말했다.

“교주님.”

“말하게.”

“이번 운남 건 말입니다.”

“셋째 말인가.”

“예. 삼공자가 극마에 이른 고수라도 야수궁은 지나치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야수궁이었군.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난 녀석이 야수궁으로 가는지 몰랐네.”

“예?”

천하의 호요성도 이번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면 교주님께 따로 말씀을 드리지 않았던 겁니까?”

“그렇다네.”

호요성이 입을 쩍 벌렸다.

“이, 이런…….”

“왜 그리 놀라나.”

왜 놀라냐는 말에 더 놀랐다. 호요성은 저도 모르게 허허 웃고야 말았다.

“후보들이 출교하려면 교주님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관례이긴 하지. 하나 정식으로 출교를 관리하는 곳은 군사부 아니었나.”

맞는 말이긴 했다. 그래도 교주이자 스승이거늘, 말 한마디 안 하고 쑥 나가 버렸을 줄이야.

‘허가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지.’

이천상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이번에도 내 마음에 드는 결과를 들고 올 수 있겠느냐?’

결과만 좋으면 사소한 관례 따위는 문제 삼지 않는다.

셋째는 자신의 성격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본디 운남 역시 우리의 권역에 있었네. 그간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 그것을 이 기회에 확실히 알릴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지.”

“정말이지…… 교주님과 삼공자의 일 처리 방식엔 상상을 초월하는 뭔가가 있습니다.”

“…….”

“죄송합니다. 좀 무례했지요?”

“괜찮네.”

호요성이 멋쩍은 듯 차를 들이켰다.

그때, 이천상의 눈이 반짝였다.

“할 말 끝났으면 이만 나가 보게.”

“예?”

호요성이 상처받은 얼굴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차도 다 안 마셨는데요.”

“제자와 할 얘기가 있네.”

“제자요?”

잠시 후, 대전의 문밖에서 마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 대공자가 뵙기를 청하옵니다.”

* * *

햇빛이 드문드문 비치는 우거진 숲속.

남부 지역 특유의 습기는 여전했지만, 자연이 만들어 준 시원한 쉼터는 무척이나 개운한 맛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환경도 여강휘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후우, 여전히 후덥지근하군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은 그가 땀도 흐르지 않는 이마를 훔쳤다.

서량은 피식 웃었다.

“네 빙공(氷功)으로 시원하게 만들어 봐.”

“그건 참기로 했습니다.”

“왜?”

“덥다고 시원하게 만들고, 춥다고 따뜻하게 만들고. 뭐, 당연한 생존 본능이지만 너무 유난 떠는 거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여강휘가 입맛을 다셨다.

“여러 환경을 접하고 익숙해지는 것도 공부가 아닐까 합니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효율성을 떠나 경험과 배움에 있어 시야가 트였으니, 별다른 일이 없다면 크게 성장할 것이다.

물론 서량의 생각은 여강휘와 달랐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말해 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나저나.”

여강휘가 힐끔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은근한 감탄이 일었다.

“굉장한 마차로군요.”

서량과 마동필, 여강휘가 타고 온 마차는 사륜(四輪)의 육두마차(六頭馬車)였다.

무려 여섯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는 차체도 커서 고작 세 명이 타기엔 지나치게 넓었다.

게다가 차체를 받치고 있는 구조물은 신교 특제 철로 구성되어, 무게는 줄이고 강성을 높인 걸작이었다.

“사두마차까진 본 적이 있지만 육두마차는 본 적이 없습니다. 굉장하네요.”

“딱히 멋있으라고 여섯 마리나 붙여 놓은 건 아니야.”

“예?”

“효율적이거든. 힘과 속도 면에서 육두마차가 최고야.”

“음…… 그걸 생각한다면 차라리 말을 더 붙이는 게…….”

서량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강호에 머리 굳은 머저리들은 말이 많으면 좋은 마차라고 생각하지만 틀렸어. 가장 빠르고 안정성이 높은 건 육두마차야. 말이 너무 많으면 통제하기도 어렵고, 자기들끼리도 발을 맞추기 힘들어하거든.”

순식간에 머저리가 되어 버린 여강휘는 머쓱함에 입맛을 다셨다. 생각해 보니 다소 단순하게 접근한 감이 없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균형이다. 어떤 영역이든 균형이 최우선이야. 무공도 마찬가지로 균형이 깨지면 편협해지고, 나중에 반드시 파탄이 드러나게 마련이야.”

마차 얘기를 하다가 무공 얘기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여강휘의 눈이 대번에 반짝였다.

“그 균형을 잘 이루었기 때문에 삼공자가 그리 강해진 것이로군요?”

“딱히 그건 아냐.”

“그럼요?”

전생의 경험 덕이라고는 말 못 한다. 말해도 믿지 않을 테지만.

“한데 그 균형이라는 게 참 묘하지 않습니까?”

“뭐가?”

“어떻게 보면 귀교의 마공이나 본궁의 빙공이나 한데 치우친 무공이 아니겠습니까. 음양의 이치를 깨는 거니까요.”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균형이란 힘의 분배, 나와 무공의 어우러짐 등을 말하는 거다. 음양의 이치를 한데 담은 무공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지.”

“그렇군요.”

“너도 다 아는 거 아냐?”

“제가 알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너는 칠가의 가주만큼, 혹은 그보다 강해. 그 정도 무리(武理)를 모르면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없지.”

한옆에서 쉬고 있던 마동필은 내심 깜짝 놀랐다. 여강휘의 경지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강휘가 미소를 지었다.

그린 듯 아름다운 미소 속, 은근한 호승심이 엿보였다.

“언젠가 한 번은 삼공자와 비무를 해 보고 싶군요. 제 모든 것을 꺼내 들고.”

“두들겨 맞고 울지나 마라.”

“말씀 참 예쁘게 하십니다.”

“천성이야.”

여강휘가 헛기침을 했다. 왠지 출교 이후, 서량의 반응이 줄곧 뚱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서량은 기다렸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연락이 안 오고 있거든.”

“연락이라니요?”

“하오문.”

“하오문이라면 중원 음지(陰地)에서 최고로 치는 정보 단체 아닙니까? 정파의 개방(丐幇)과 필적한다는?”

“맞아.”

여강휘가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하오문하고도 연을 맺고 계셨습니까?”

“강제성이 있긴 했지만 뭐…… 그렇지.”

강제성이라?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여강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하오문주에게 애도를 표하고 있을 때.

서량은 인상을 찡그렸다.

‘부문주 놈, 열흘 안쪽으로 연락을 준다고 하더니만 뭐 하는 거야?’

야수궁으로 가는 것과 하오문에 한 의뢰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하지만 이왕 나온 김에 그쪽 일도 싹 해치우려던 참이었는데.

‘어차피 사천하고 인접했는데 어떻게 안 되려나?’

뭐, 무리할 필요는 없지만.

한숨을 푹 내쉰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선하니 좋구먼.”

광서의 한 숲, 신교를 떠난 지 이틀 만에 도달한 곳이었다. 방향이야 마부가 잘 잡아 주고 있으니 걱정 없지만 운남으로 진입하려면 시간이 제법 남았다.

조금 더 여유를 가져 볼…….

“괜찮을까요.”

응?

서량이 여강휘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져 있었다.

“제 동생 말입니다.”

“거야 나도 모르지.”

“팔불출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은 없지만 제 여동생은 아주 아름답습니다. 무도한 놈들이라 해도 전쟁을 벌일 생각이 아니라면 섣부른 짓은 하지 않겠지만…… 걱정이 되는군요.”

누군가는 말한다. 강호는 낭만과 꿈의 세상이라고.

또 누군가는 말한다. 강호는 그저 지옥 같은 사바세계의 본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폭력의 무대일 뿐이라고.

다 맞는 말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낭만의 대지이자 꿈을 이루는 세상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업(業)으로 똘똘 뭉친 지옥 같은 세상일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지옥이라 느끼는 이들의 대부분은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 여인이 납치를 당했다. 그것도 힘 대 힘으로 부딪쳐 패자가 된 여인이었다.

야만스럽다고 악명이 자자한 야수궁이라면, 몹쓸 짓을 당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저도 알고는 있습니다. 만약 제 동생을 욕보이려 들었다면 굳이 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령 그랬다 해도 납치했다는 사실을 본궁에 알리지도 않았겠지요.”

“맞아. 놈들은 원하는 게 있어. 그래서 네 동생을 납치한 거야.”

“문제는…… 이성보다 본능을 추구하는 놈들의 문화입니다. 약육강식의 세계, 강자는 모든 걸 얻고 약자는 도태되기 마련이지요.”

여강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 적나라한 본능을 제 동생에게도 적용했을까 걱정입니다.”

급하게 움직여 봤자 동생을 구출할 수 없다는 냉정한 자각이 그를 지금까지 지탱해 준 것뿐이다. 언뜻 평온해 보이는 겉과는 달리 걱정으로 속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예.”

“놈들은 단독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야. 삼궁(三宮)이 손을 잡고 중원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지. 어쩌면 네 동생을 납치한 것은 야수궁의 의지가 아니라 삼궁의 의지일 수도 있다.”

“…….”

“아군한테 칼 맞기 싫으면 낙엽 하나도 조심해야 할 판이다. 나아가 중원의 시선도 무시할 수 없지.”

여강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원의 시선이라니요?”

“중원의 강호는 개방적인 듯하면서도 보수적인 면이 강해. 설령 중원에 정착한다 해도 여인을 겁탈한 집단의 도덕성이 까발려지면? 그땐 개박살 나는 거야.”

“아…….”

“하물며 놈들은 본교가 아니라 의천맹과 손을 잡았어. 외부의 시선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그런 짓은 못 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량도 아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끔찍한 죄도 돈과 정치로 묻어 버린 행태를 워낙 많이 봐 왔기 때문이었다.

다만 믿는 게 있다면.

‘노친네.’

의천맹주는 본인의 추함은 문제 삼지 않지만, 타인의 도덕성은 확실하게 따지는 부류였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삼궁은 결코 의천맹주의 비위를 거스르지 못한다.

“어차피 쉴 마음도 안 들 테니 슬슬 움직…… 어라?”

“왜 그러십니까?”

서량이 고개를 돌렸다. 숲 너머, 은밀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후 복면을 쓴 왜소한 사내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컥.

어느새 서량의 앞에 선 마동필이 칼날받이에 엄지를 대었다.

“누구냐.”

낮고 힘 있는 목소리에 복면인이 무릎을 꿇었다.

“하오문에서 왔습니다. 신교의 삼공자께 서신을 전달해 드리려 합니다.”

서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벌, 빨리도 온다.”

복면인이 전달한 서신을 읽은 서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전령.”

“예.”

“이거 사실이냐?”

“저는 그저 서신을 전달할 뿐, 서신의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서량이 전령에게 말했다.

“너희 광서와 운남에도 지부를 두고 있지?”

“그렇습니다.”

“부문주한테 따로 사례한다고 전하고 애뇌산 인근 정보 싹 몰아와. 마차로 이동할 거니까 알아서 찾아올 수 있지?”

“……닷새 내로 찾아뵙겠습니다.”

복면인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무공은 보잘것없는데 신법만큼은 절정고수라 불릴 만했다.

여강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야.”

“예?”

“어쩌면 일이 좀 더 쉬워질 수도 있겠다.”

서량이 사악하게 웃었다.

“적당히 기분 맞춰 주면서 빼 오려고 했는데, 성질머리 안 버려도 될 것 같아.”

이게 웬 횡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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