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답이 없는 문제란 없다 (4)
은은한 금빛 광택을 내는 가죽은 놀랍게도 곰의 그것이었다.
때 하나 타지 않은 곰 가죽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했다. 짧지만 윤기가 도는 털로 빽빽하게 뒤덮인 것이, 황제의 침상보다도 부드럽고 푹신해 뵌다.
그 가죽 위, 방만한 자세로 드러누운 노인은 실로 위풍당당한 풍채의 소유자였다.
홀딱 벗은 상의는 두툼한 근육으로 꽉 차 있었다. 팔뚝은 여성의 허벅지만큼 두꺼웠고, 부푼 가슴은 바위보다 단단해 보였다. 큰 키에 걸맞은 거대한 덩치가 보는 이를 압도하는 노인이었다.
제멋대로 뻗친 하얀 수염, 대충 묶어 올린 머리카락은 야성미가 물씬 넘쳤다.
“빙궁의 작은 주인이 사라졌다고?”
거대한 덩치, 넘치는 야성미와 어울리지 않게 노인의 목소리는 다소 높은 감이 있었다. 그 어울리지 않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오히려 노인의 인상을 더욱 위험해 보이게 만들었다.
노인 앞에 선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사내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흐음.”
노인의 눈에 흥미가 일었다.
“호남까지는 번개처럼 이동했던 놈이 느닷없이 어디로 숨었을꼬?”
“기이한 점은, 빙궁의 호위들을 그곳에 놔두고 혼자 없어졌다는 겁니다.”
“확실한가?”
“하오문의 지부에 의뢰한 것이니 확실할 것입니다.”
“하오문이라면 믿을 만하지.”
힘없는 밑바닥 인생들이 뭉쳐서 만든 정보단이 지금의 하오문이다. 그들은 무력보다 정보력이 더 큰 힘이라 믿었으며, 생존에 유용하다고 맹신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실력으로 어느 정도 입증된 상태였다. 적어도 하오문은 의뢰에 양념을 치진 않는다.
“흐음, 그놈이 대관절 어디로 사라졌을꼬?”
“거기까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크르릉.
동시에 그의 침상 뒤, 어둑한 그림자 안에서 길고 굵은 꼬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분명 짐승의 꼬리지만 상식적인 굵기가 아니었다. 황색과 흑색의 무늬로 물든 꼬리는 두 손으로 쥐어도 절반은 남을 만큼 굵직했다.
번쩍!
시커먼 어둠 너머, 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두 개의 안광.
중년 사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갑작스레 확 끼쳐 드는 노린내에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호위도 내팽개치고 사라졌다는 건 놈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나.”
“그, 그렇습니다.”
“그럼 거기까지 알아 왔어야 할 것 아닌가.”
“다시,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노인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어렸다.
“근래 패웅(覇熊)의 지파와 부딪침이 잦다고 들었네.”
“……!”
“매의 발톱이 날카롭다 한들 곰 가죽에 상처나 낼 수 있겠는가?”
중년 사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창공을 지배하는 지파, 뇌응(雷鷹)의 수장으로서 패웅과 비교된다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백수(百獸)의 왕이자 야수궁의 주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곰을 해칠 만한 수단이 있어도 야왕(野王)이 개입하면 판이 엎어진다. 그리고 그건 당연히 사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사내를 보던 노인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가장 총애하는 제자의 아비라 하여 힘을 실어 줄 거란 생각은 말게나.”
“…….”
“애뇌산으로 제자들을 보냈네. 녀석들이 일을 끝내기 전까지 알아 오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이만 나가 보게.”
중년 사내가 나가자 노인, 천호(天虎)가 늘어지게 하품했다. 쩍 벌린 입 안, 날카로운 송곳니가 유독 길어 보였다.
쩝쩝거리던 그가 중얼거렸다.
“긴장이 풀렸군. 그래서야 패웅은커녕 혈랑에게도 어려울 터인데.”
충성 경쟁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중 어떤 곳도 도태되지 않도록 막는 것 또한 제 일이었다.
한 번 지그시 눌러 줬으니 다시 정신을 차릴 것이다.
“그나저나 혼자 사라졌다…… 제 동생을 구하기 위해 온 게 분명할 텐데, 길잡이라도 구하러 간 것인가?”
어찌 되었든 놈은 야수궁으로 찾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호의 안광이 점점 붉어졌다.
“어서 오너라, 북왕(北王)의 아들.”
* * *
“정지!”
귀응(鬼鷹)의 외침에 따라 다섯 명의 남녀가 신법을 멈추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도록 한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섯 남녀가 나무에 기대어 다리를 두들겼다.
“휴, 힘들구만.”
“벌써 오백 리나 주파한 건가?”
“벌써라니? 앞으로 천 리는 더 가야 돼.”
“젠장, 멀기도 하네.”
투덜거리는 목소리.
귀응은 그들과 조금 떨어진 거리의 바위에 앉아 눈을 감았다. 중원의 무도(武道)처럼 가부좌도 틀지 않았고, 허리도 다소 구부정했다.
그것은 야수궁의 운기법(運氣法) 중에서 가장 정적이라는 대연양생법(大然養生法)이었다. 축기(畜氣)로 내공을 쌓을 순 없지만, 피로를 풀고 육체의 감각을 활성화하는 데 특화가 된 호흡법이었다.
말하자면 남만(南蠻)식의 운기행공법. 거기에 야수궁의 무학이 섞였기에, 일정 수준에 오르면 호흡에 집중하면서도 기감은 멀쩡히 유지할 수 있다.
그 기감이 주변의 대화를 똑똑히 들려주었다.
“저거 봐라. 저놈은 지치지도 않나? 또 수련이야?”
“지쳤으니까 체력을 회복하려 드는 거겠지.”
“어차피 하루 보낼 거 아냐? 하여튼 유난은.”
목소리에 질투가 뚝뚝 묻어 나온다.
아마 들으라고 하는 소리일 것이다. 대놓고 덤벼들진 못하니, 치졸한 질투심을 풀려면 뒤에서 욕이나 하는 수밖에 없겠지.
‘마음대로들 떠들어라.’
뒤에서 욕한다고 실력이 늘진 않는다. 귀응은 오히려 그런 경쟁자들의 행태를 비웃었다.
저 열정을 수련에 쏟았다면 적어도 지금보단 나았을 것을.
그때, 묵직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모두 조용히들 해.”
그 한마디에 질투 섞인 대화가 싹 사라졌다.
“주둥이 나불댈 시간에 너희도 체력이나 회복해.”
꽤나 거친 언사였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반발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귀응의 곁으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끝났나?”
귀응이 눈을 떴다.
그의 눈에 거대한 덩치의 청년이 보였다.
청년, 웅산(熊山)이 말했다.
“길을 어디로 잡을 생각이지?”
“애뇌산 동쪽 입구.”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웅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굳이 길을 돌아서 가려는 거지?”
“그걸 말해 줘야 하나?”
“물론 네가 대장인 만큼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유라도 알려 줘야 저 머저리들도 수긍할 거 아닌가.”
귀응이 차갑게 웃었다.
“수긍을 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다.”
“상관이 있을 거다. 사부님께서 내리신 명령을 제대로 완수하고 싶다면.”
“임무를 방해하는 것 역시 저들의 선택이다.”
“생각이 있다면 방해는 않겠지. 하지만 원활한 교류를 원한다면 상의 정도는 해 보는 게 좋을 거야.”
웅산의 눈이 깊어졌다.
“그런 면에서, 넌 율랑을 배울 필요가 있어.”
순간 귀응은 가슴 안에서 뭔가가 울컥 치미는 걸 느꼈다.
그가 이 무리의 수장이 되기 전, 후계자들을 기가 막히게 통제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율랑으로, 혈랑의 지파에서 내놓은 천재였다.
하지만 임무를 받고 중원으로 진출한 율랑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명확한 생사(生死)가 확인되진 않았지만, 이젠 모두가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런 율랑의 뒤를 이어 후계자들의 수장이 된 사람이 바로 귀응이었다. 야수궁, 뇌응의 지파에서 내놓은 인재로 궁주의 총애를 받는 제자가 그였다.
“율랑은 거칠고 오만했다. 하지만 소통은 할 줄 알았어. 녀석을 본받으란 말은 않겠다만, 원활한 임무를 위해서는 사람을 다독일 줄도 알아야 한다.”
귀응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렇게 잘 알고 있었다면 네가 힘을 키워서 이 자리를 차지해 보지 그랬냐?”
“…….”
“애뇌산 동쪽 입구로 진입한다. 그렇게만 알고 있어.”
물끄러미 귀응을 내려다보던 웅산이 몸을 돌렸다.
귀응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겉으로는 제법 무게를 잡지만 다른 후계들이 자신을 욕하도록 은근히 부추기는 사람이 웅산이라는 걸 그는 모르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주의 제자는 모두가 같은 위치지만, 웅산은 이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율랑이 사라졌으니 내심 자신이 이들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력 없는 머저리 자식.’
정히 그러고 싶었다면 이 악물고 단련을 했어야지.
‘하긴, 없는 재능에 여기까지 온 것만도 나름 대단하군.’
웅산을 비웃는 귀응의 눈빛은 그를 질투하던 다른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잠시 후, 귀응이 모두의 앞에 섰다.
“웅산.”
“말해라.”
“비강사(秘綱蛇)와 함께 식량을 확보해.”
웅산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비강사가 짜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식량은 충분하잖아. 뭣 하러 또…….”
퍼어억!
한 줄기 신음조차 없었다. 귀응의 장력에 맞은 비강사가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느닷없는 사태에 깜짝 놀란 모두가 귀응을 바라보았다.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힘들다고 중간에 야금야금 퍼먹은 걸 모를 줄 아나?”
“……!”
“이동 중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식량과 식수를 최대한 아끼라고 했다. 내 말을 귓등으로 들은 거냐? 아니면 사부님의 당부를 벌써 잊은 거냐?”
모두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귀응이 웅산에게 말했다.
“영표(影豹)와 다녀와.”
“……알겠다.”
일어난 웅산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삐이이익!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몇 마리의 매가 빙빙 돌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그 크기가 평범한 매의 서너 배는 됨직했다.
뇌응의 지파는 자기 영역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안다. 창공의 지배자 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짐승은 없었다.
“영표, 가자.”
“……그래.”
그렇게 웅산과 영표가 움직였다.
귀응은 다시 바위로 걸어갔다. 등 뒤로 자신을 노려보는 후계자들의 눈빛이 느껴졌지만 싹 무시했다.
바위에 앉은 그는 생각에 잠겼다.
‘아직 당가(唐家) 놈들을 믿을 순 없어. 마교의 관리 지역을 벗어나서 움직이고 있을 테니, 딱히 헛소리는 못 하겠지.’
애뇌산의 심처는 마교도들이 점령해 영초를 관리하고 있다. 그 영초는 분기별로 마교에 보낸다고 했다.
귀응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번 기회에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군.’
본래 애뇌산은 야수궁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물론 수백 년 전의 일이었다. 힘에서 밀려 쫓겨났으니 그들도 할 말은 없었지만, 고향을 되찾으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있었다.
‘이번 탈환 작전의 첫 시작은 내가 끊을 것이다.’
포부를 안고 달려온 임무다. 귀응은 더 이상 멍청한 후계자들의 행태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의 다짐은 반 시진도 채 가지 못했다.
“왜 이렇게 안 와?”
정신을 차린 비강사가 이죽댔다.
“우리도 모르지.”
“쓸모없는 것들.”
귀응의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그가 엄지와 검지를 말아서 입으로 가져다 댔다.
삐이이이익!
그의 휘파람 소리는 매의 울음소리와 판박이였다.
곧이어 저 하늘 머나먼 곳에서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웅산과 영표를 따라갔던 천태신응(天態神鷹)의 울음이었다.
“저기 있군. 병신들, 뭣들 하고 있…….”
삑!
순간 귀응의 눈이 흔들렸다.
‘신응?’
그가 다시 한번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익!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가 연신 휘파람을 불어 댔다. 하지만 역시나 신응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쿠웅!
요란한 충격음과 함께 야산 일대가 흔들렸다.
“뭐, 뭐야?!”
깜짝 놀란 그들은 본능적으로 신법을 펼쳤다. 웅산과 영표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수풀을 헤치고 나아간 그들 앞에 큼직한 공터가 나타났다.
“여어.”
공터의 중앙에는 참마도와 유사한 보도(寶刀)를 어깨에 멘 잘생긴 청년이 있었다.
“한 놈, 두 놈, 세 놈, 네 놈…… 앞에 두 놈까지 여섯. 딱 맞네.”
“……네놈은 뭐냐?”
“나?”
청년, 서량이 싸늘하게 웃었다.
“납치, 폭행, 살인 등을 저지를 준비가 된 예비 중범죄자시다.”
후우우우웅!
거대한 칼날에 시뻘건 바람이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