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최고의 해답 (1)
“…….”
“…….”
한참이나 서신을 들여다보던 당전(唐典)의 눈은 지독한 살기로 얼룩져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고개를 든 당전의 눈에 부복한 흑의인이 보였다.
“이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 주는 이유가 무엇이지?”
“저는 그저 전령일 뿐, 높으신 분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딱딱한 어조지만 어딘가 신뢰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당전에게는 아니었다.
핑!
팽팽했던 금현(琴絃)이 툭 끊어지는 소리.
동시에 복면인의 몸이 흔들렸다.
“우웨에엑!”
뒤집어쓴 복면 위로 토해 낸 핏물이 가득 번졌다.
“모르면 죽어야지.”
“쿨럭! 커헉!”
답답했는지 복면을 벗어 든 사내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사내의 얼굴에는 붉은 반점이 촘촘하게 돋아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이 정보를 전해 준 하오문의 저의가 무엇이냐.”
“컥! 저, 저는 모릅니다.”
“이놈이.”
콱!
당전이 사내의 멱살을 틀어쥐고 들어 올렸다.
중독의 고통으로 미칠 것 같은 와중에 숨도 못 쉬겠다. 사내가 연신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스르륵.
사내의 몸이 축 늘어졌다. 기절해 버린 것이다.
냉랭한 눈으로 사내를 보던 당전이 그를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애뇌산까지 얼마나 남았는가.”
암운각주(暗雲閣主) 당표(唐飄)가 특유의 딱딱한 목소리로 답했다.
“쉬지 않고 이동하면 사흘 안에 도착합니다.”
“지금 당장 출발할 것이네. 애들더러 채비하라 이르게.”
“알겠습니다.”
우우우웅.
당전의 몸에서 은은한 연녹색의 안개가 치솟았다. 저도 모르게 독공(毒功)이 개방된 것이다.
“빌어먹을 마교도 놈들이 감히 본가를 우습게 봐?”
대(大) 사천당가의 가주인 그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애뇌산을 점령하러 왔지만, 이렇게 된 이상 뒤에서 수작질 부릴 필요도 없어졌다.
“본가의 혈육을 건드린 죄, 만 배로 갚아 주리라.”
* * *
“다 왔군.”
서량이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굉장한데? 애뇌산이 이런 곳이었구만.”
찌를 듯한 봉우리와 깊은 협곡으로 가득한 애뇌산은 신비롭다기보다는 을씨년스러웠다. 산 일대에 깔린 짙은 안개 때문에 더더욱 위험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갔다간 길 잃기 십상이겠군요.”
“그래 뵈네.”
여강휘는 혀를 내둘렀다.
허연 빙하로 둘러싸인 북해와는 달리 중원의 땅은 무척이나 다채로웠다. 그중 애뇌산은 단연 압권이었다.
우거진 숲이 지금 같은 대낮에도 위험해 보이는데 밤이 되면 더더욱 음침할 것 같다. 우중충한 날씨도 날씨지만 산 자체가 미지의 위험으로 꽉 차 있었다.
서량이 마동필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에 본교의 마인들이 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애뇌산의 심층부, 천수곡(千獸谷)이라는 곳입니다. 저도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랬겠지.”
산 자체가 너무 넓고 크다 보니 마기를 읽어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도 이게 있어서 다행이구만.”
서량이 품에서 꺼내 펼친 것은 총군사에게 받은 애뇌산의 지도였다.
제법 세세한 지형이 적힌 이 지도는 신교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물건이기도 했다. 아마 전 중원에서 이만큼 세밀한 지도를 보유한 방파는 없을 것이다.
“어디 보자, 천수곡이…… 여기네. 애뇌산에서도 다소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어.”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에 뭐가 이렇게 많냐.”
안 그래도 산 전체가 협곡투성이인데, 천수곡 주변에는 유독 더 많았다. 지도만 보면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이자 귀신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동필이 물었다.
“천수곡으로 가실 생각입니까?”
“음? 딱히 그럴 생각은 없지만, 그래선 안 될 이유라도 있나?”
“그렇습니다.”
“왜?”
“교주님께서 직접 허락해 주시지 않는 한, 누구도 천수곡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예. 아무래도 신교에 보낼 영초들을 관리하는 곳이다 보니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하는 모양입니다.”
“그럴 수 있지.”
신교로 유입되는 약재와 영초 중 절반 이상이 천수곡에서 재배되고 있다고 들었다. 당연히 그 중요도는 고죽림에 필적할 것이다.
다만 고죽림은 신교 내에 있고, 천수곡은 신교 바깥에 있다는 게 다를 뿐.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연이 닿으면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하면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아, 말 안 했나?”
서량이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우리가 갈 곳은 여기야.”
“만요림(萬妖林)…….”
지명이야 붙이기 나름이라지만, 이름 한번 살벌하다. 만 마리의 요괴, 혹은 만 가지 요사스러움이 판을 치는 숲이라니?
“하오문의 정보로는 야수궁과 당씨 개새끼들이 여기서 몇 번 회합을 벌였다고 하더구만.”
여강휘의 얼굴에 의아함이 맺혔다.
“당가와요?”
“엉.”
서량이 씨익 웃었다.
득의양양한 미소 속, 싸늘하게 가라앉은 살기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고생스럽게 머리 굴려 놨으니 이제는 썩어지게 때려 줘야지.”
마침내 도래한 축제의 시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여섯 남녀를 마차 위에서 끌어 내린 서량이 마부에게 작은 금낭 하나를 건넸다.
“수고하셨소. 귀교하는 길에 맛난 것 좀 사 드시구려. 자, 우리는 이제 슬슬 갈 길 가자.”
마차와 마부를 보낸 일행이 신법을 펼쳤다.
터엉!
높은 언덕 밑으로 활강하듯 내려선 세 사람.
순식간에 애뇌산의 입구로 들어온 그들이 속도를 더했다.
파아앙!
중간에 몇 번 움직이긴 했지만 이십 일이 넘도록 마차 생활을 했다. 시원하게 신법을 펼치는 세 사람은 애뇌산의 음습한 공기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상쾌해 보였다.
여강휘는 은근한 놀라움이 어린 눈으로 서량과 마동필을 보았다.
‘괴, 굉장한데.’
세 사람씩 나눠 들쳐 메고 신법을 펼치는데도 그들의 얼굴에는 한 점 힘든 기색이 없었다.
아무리 고수라도 사람을 셋씩이나 업고 달리면 힘들어하는 게 정상이다. 체력이 문제가 아니라 자세가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일을 수십 번 해 본 것처럼 익숙해 보이는 것을 넘어 신명 나는 기색이었다.
‘여러모로 신기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척.
선두에서 달리던 서량이 멈춰 섰다.
여강휘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살기.”
“예?”
“살기가 느껴져. 정확하게 우리를 노리는군.”
여강휘가 기감을 증폭시키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군요. 한데…….”
“맞아. 무림인이 아니야.”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짐승이로군.”
그렇다.
애뇌산은 천혜의 험지로서 인간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었다. 수많은 기화요초(琪花瑤草)는 물론이요, 온갖 독물과 이름 모를 맹수들이 판을 치는 심산(深山)이었다.
말하자면 중원에서도 가장 야생성이 두드러지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여강휘의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분명 짐승은 짐승인데 심상치 않은 살기를 품고 있군요.”
짐승의 살기는 사람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짐승의 사고는 본능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고로 살기 역시 뚜렷한 목적을 가져서, 어떤 면에선 순수하다는 인상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곳 짐승들의 살기는 달랐다. 훨씬 은밀하면서도 무척이나 독했으며, 마치 무인 특유의 투기(鬪氣)마저 엿보였다.
서량이 한숨을 쉬었다.
“별수 없지.”
이름 모를 짐승들과 드잡이질을 벌이며 시간을 낭비하는 건 사양이었다.
그가 구유마공을 개방했다.
츠츠츠츠.
은은하게 피어오른 마기가 순식간에 일대로 퍼져 나갔다.
마동필의 안광이 명멸을 반복했다. 서량의 마기에 자극받은 것이다.
“가자.”
터어엉!
다시 이동하는 그들.
여강휘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요악한 살기를 뿜어내던 짐승들이 서둘러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다. 정도 이상의 자극 없이 그저 물러나게만 하고 있어. 그것도 반경 수십 장에 걸쳐서.’
심지어 대상은 한 번 본 적도 없는 짐승들이었다. 그 말인즉, 살기를 내보인 짐승들의 수준을 단박에 간파하여 진기를 조절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이런 속도로 달리면서.
‘알면 알수록 정말이지…….’
섬뜩하다.
이제는 놀라움 이전에 이질감이 느껴진다. 지닌 무력보다 상식을 파괴하는 지혜가 더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무공을 운용하는 방식 역시 평범함과는 궤를 달리한다.
‘인간의 영역이 아니야.’
여강휘의 눈이 깊어졌다.
사람이 다른 게 아니라, 아예 존재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이다.
‘이런 사람과 손을 잡았다…… 괜찮을까?’
지금껏 살아오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선택을 내렸으면, 그 선택이 정답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을 따름이다.
생애 최초로 자신의 선택을 되돌아보는 그.
하얀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을 했어.’
동생을 구할 수만 있다면 천마신교의 삼공자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사람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
‘조금만 버텨 다오. 곧 구할 수 있…….’
그때였다.
“다 왔군.”
깜짝 놀란 여강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그들은 드높은 산 정상 부근에 도달해 있었다.
“은밀한 회담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야. 운무도 깊고, 나무들도 우거졌고. 결정적으로…….”
서량의 형형한 안광이 저 멀리 떨어진 음침한 협곡을 향해 번득였다.
“천수곡으로 들어가는 길도 보이고.”
마동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야수궁이 천수곡을 노리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삼궁(三宮)은 의천맹과 손을 잡았어. 검궁이 적사가를 작살낼 때 당가의 독을 썼지. 야수궁과 밀담을 벌이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당가라니요?”
서량의 얼굴이 어느덧 진지해졌다.
“하오문에서 말하길, 야수궁과 당가가 여러 차례 밀담을 가졌다고 하더군. 바로 이곳에서.”
“……!”
“애뇌산은 위험한 만큼 온갖 독초들이 나는 장소야. 당가로선 이보다 매혹적인 곳이 없지. 게다가 야수궁은 본교에 애뇌산을 빼앗겼다.”
마동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이 일치하는군요.”
“그렇다고 생각해. 야수궁은 애뇌산을 접수하고, 그걸 도운 당가는 이곳에서 나는 약초와 독초를 공급받고. 뿌리 깊은 대적인 본교에 한 방 먹여 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여강휘의 얼굴이 굳어졌다.
“삼공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네 여동생의 구출을 최우선으로 할 생각이니까. 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주의야.”
“…….”
“날 믿기 힘들면 네 눈과 선택을 믿어.”
서량이 어깨를 빙빙 돌렸다.
“자, 호랑이와 독사가 올 때까지 정비나 좀 하자.”
“아, 공자님.”
“왜?”
“예전부터 궁금했던 게 하나 있습니다만.”
“말해.”
“금호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 근처에.”
사흘 후.
천호가 호왕과 백왕수(百王獸)들을 이끌고 만요림에 접근했을 때.
“정지.”
천호가 고개를 들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 훤칠한 청년 한 명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천호의 눈에 짙은 살기가 맺혔다.
“네놈이 서신을 보낸 놈이냐?”
“오냐.”
“……이 핏덩이가 감히!”
“새외의 절대강자라더니 기파가 뭐 무지막지하구만. 쉽진 않겠어.”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보긴 보는군.
서량이 차갑게 웃었다.
“반갑소, 야옹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