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최고의 해답 (2)
“뭐, 뭐라?!”
천호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서량이 턱으로 호왕을 가리켰다.
“고양이를 부리고 있잖아. 그럼 야옹 선생이지 뭐. 어이구, 근데 쟤는 뭘 먹여 키웠길래 저리 크냐? 금호한테 미안해지려고 하네.”
천호는 기가 막혔다.
운남 최고수이자 새외사궁의 일익을 담당하는 그는 중원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인사였다.
대문파의 장문인도 함부로 못 대하는 자신에게, 이제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어린놈이 농지거리를 뱉다니?
발작적으로 욕을 뱉으려던 천호는 이내 무엇을 떠올렸는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긴말 않겠다. 북왕의 자식은 어디에 있느냐.”
상대의 신분도 묻지 않고 대뜸 여강휘를 찾는다.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녀석이 우리와 손을 잡았다는 걸 알았군. 하오문이 알려 줬을 리는 없을 테니, 유추해 낸 건가?’
폭급한 성정으로 보이지만 두뇌 회전이 제법 빠르다. 한 조직의 수장이 될 만한 능력은 있다는 소리였다.
“북왕의 자식? 북왕이 누군데?”
“말장난하지 마라. 네 어떠한 교언(巧言)도, 요언(妖言)도 듣지 않겠다.”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기야, 야옹 선생 정도 되는 분을 불러내 놓고 쓸데없이 시간 잡아먹는 것도 할 짓이 아니지.”
“…….”
“근데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니오? 그놈이 어디 있는지를 묻기 전에 내 정체부터 물어보는 것이 정상일 텐데.”
“너 따위 핏덩이가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다.”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이것 봐라?’
이 거리.
분명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아주 멀다고 할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다. 하물며 그들 같은 고수들에겐 더더욱.
한데도 천호는 자신의 힘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자신은 명백히 한 수 위인 그의 진신진력을 꿰뚫어 보고 있는데도.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가? 그건 아니야. 그렇다면…….’
서량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정말로 모르고 있다. 저리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음에도.’
사실 조화경이니 극마지경이니 하는 것은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호들갑일 뿐이다.
절정이나 초절정이란 것도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오며 정립된 명칭일 뿐, 실제로 무공의 경지에 이름을 붙이는 건 무의미하다. 이유인즉, 사람은 제각기 다른 깨달음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다만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이 경지란 것에서만큼은 각기 다른 무공을 익혔다 해도 비슷한 지점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탈을 벗고 무공의 한계마저 초월했기 때문이다.
극마, 화경(化境)에 이르렀다면 저럴 수가 없다. 한눈에 자신의 경지를 꿰뚫어 보고 날을 세웠어야 정상이었다.
‘남만야수궁의 무공이라…… 확실히 독특하단 말이지.’
짐승과 교류하며 인간이 얻을 수 없는 힘을 손에 넣은 문파.
하지만 정작 야수궁 최고의 고수라는 양반은 상대의 실력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무공의 한계마저 돌파했음에도.
천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빌어먹을 놈이 본궁의 후계자들을 납치한 것 아니더냐! 당장 놈을……!”
“내가 했다.”
“뭣이?!”
서량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선생이 키운 새끼 짐승 여섯 마리, 내가 납치했다고.”
“애송이가 어디서 거짓…….”
그는 말을 다 끝내지도 못했다.
스륵.
어느새 서량의 왼손에 밧줄에 꽁꽁 묶인 세 사람이 들려 있었던 것이다.
“들고 오기 힘들어서 셋씩 둘로 나눴다. 선생 제자들 맞지?”
“……!”
직접 키운 제자들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천호의 눈에 벌겋게 핏발이 섰다.
‘웅산, 영표, 비강사.’
각기 패웅과 은표, 그리고 청사(靑蛇)의 지파에서 선발된 그의 제자들이었다.
분노와 경악 이전에 천호는 의아함을 느꼈다.
‘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지?’
야수학(野獸學)을 익힌 자라면 야수궁의 정점에 선 그의 영안(靈眼)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데도 그는 제자들의 존재감을 일절 느낄 수 없었다.
‘봉인?!’
천호의 몸에서 일어난 거친 기운이 일대에 파랑을 일으켰다.
츠츠츠.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야수의 기파.
무형의 기가 순식간에 서량이 선 영역까지 번져 나갔다.
그때,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화르르륵!
불꽃처럼 타오르는 붉은 마기가 천호의 기파를 원천 봉쇄했다.
천호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마기? 그것도 이 정도의?’
선천(先天)의 영역을 엿보는 절대마기. 이런 마기를 풍길 수 있는 자는 온 천하에 흔치 않다.
‘마교!’
크르르릉!
마기를 느낀 호왕이 으르렁댔다.
천호에게서도 파멸적인 살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마인, 특히 천마신교 소속의 마인이라면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네놈…….”
천호의 붉은 안광이 노랗게 변했다.
“구대마존 중 누구냐?”
그는 상대가 마존 중 하나라고 확신했다.
외양이야 주안술로든 뭐로든 바꿀 수 있다. 게다가 마도학(魔道學)에는 워낙 기상천외한 기공(奇功)들이 많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저 고차원적인 마기는 어떤 마도학으로도 꾸며 낼 수 없다. 기(氣)가 극에 이르러 무(武)의 본질에 도달해 있었다.
상대는 구대마존, 혹은 전대의 마인이 분명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난 마존이 아니야.”
“내 분명 말장난은 사양이라고 말했다. 네놈의 정체를 밝혀라!”
“진즉에 물어봤어야지. 지금은 알려 주고 싶지 않아.”
“이노옴!”
꾸욱!
“……!”
화를 못 참고 덤벼들려던 천호가 움찔했다. 서량이 비강사의 목을 밟아 눌렀기 때문이다.
목이 부러지진 않았지만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기절한 와중에도 고통을 느끼는 건지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좋아, 야옹 선생 말마따나 말장난은 그만하도록 하지.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고.”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빙궁주의 여식은 데려왔나?”
“…….”
“안 데려왔으면 네 제자들 모가지 싹 뽑을 거야.”
천호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잠시 심호흡을 한 그가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든 넌 마교 소속이 분명해.”
“더할 나위 없는 사실이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묻고 싶다. 왜 빙궁과 손을 잡은 것이냐?”
“우문(愚問)이다. 조직 간의 연수가 체결되는 이유는 오직 하나야. 서로가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
“대체 빙궁 놈들이 무슨…….”
“마치 너희와 당가처럼.”
“……!”
천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너희가 이 산을 차지하고 이곳에서 나는 약초들을 당가 측에 공급해 주기로 한 거, 모를 줄 알았나?”
“…….”
“훤히 들여다보이는 짓거리에 웃음이 다 나더라. 일을 획책하려면 티 좀 안 나게 해, 야옹 선생.”
어떻게 알았지?!
천호는 혼란스러웠다.
혹, 신(神)에 이른 두뇌의 소유자라면 그러한 가능성을 꿰뚫어 보고 다각도로 조사하여 이내 확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당가 놈들이 불었나? 그럴 리가?’
천호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오문이 그간 서량에게 어떤 정보를 물어다 줬는지.
그들이 야수궁에 건넨 정보와 시기 역시 이쪽에서 조종했다는 것도.
“궁금한 건 다 풀었나?”
“…….”
“그럼 이제 빙궁주의 여식을 데려와라.”
입술을 짓이기듯 씹던 천호가 손을 들었다.
잠시 후, 저 멀리서 세 명의 사내가 큼직한 관을 들고 걸어왔다.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관?’
설마 죽은 건가?
‘……평범한 관이 아니로군.’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 관은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얬다.
그리고 차가웠다.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은은한 한기(寒氣)가 느껴질 정도였다. 관을 멘 사내들의 어깨에도 허연 서리가 끼어 있었다.
“미안하지만 인질이 죽었으면 협상은 결렬이야.”
“죽지 않았다.”
“안 죽었는데 왜 관짝에 넣어서 왔냐? 이제 곧 죽여 버리겠다는 예고를 형상화한 건가? 장난해, 지금?”
천호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건 관에 든 계집이 정신을 차리면 물어보도록 해라. 애초에 저 관을 요구한 것이 계집이니까.”
“음?”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사내들이 천호 옆에 관을 내렸다.
쿵.
허옇게 피어오르는 먼지. 하지만 신기하게도 관에 먼지가 내려앉진 않았다.
서량이 턱짓했다.
“열어서 앞에다 놔.”
“그 전에.”
“…….”
“다른 아이들도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
콰직!
천호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어느새 서량이 비강사의 한쪽 팔을 부러트린 것이다.
서량이 차갑게 말했다.
“개소리는 적당히 하시지, 야옹 선생.”
“…….”
“열어.”
천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정말이지 이런 수모를 당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빙궁주의 여식을 납치할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좋게 풀릴 줄 알았거늘.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 다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설마 저놈 주둥이에서 부탁이란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 제자 중 귀응이란 아이가 있다. 그 아이가 무사한지, 그것만 확인하게 해 다오.”
“…….”
“부탁한다.”
천하의 야수궁주가 자세를 낮춰 말한다.
서량도 뜻밖이었지만 그를 따라온 백왕수들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모시는 수장은 절대 타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흐음.’
서량은 뚜렷한 걱정이 담긴 천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서량이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우우우웅.
마기가 박동하더니 어느새 두둥실 떠오른 세 명의 남녀가 서량 옆에 나타났다.
그것을 본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요술인가?!’
야수궁에서 저만한 신기(神技)를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은 당대 궁주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익힌 야수학 자체가 기공의 섬세한 운용과는 다소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중원의 무학과 궤를 달리하는 남만 무공의 특징이었다.
“확인했나?”
축 늘어진 귀응을 본 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계집을 넘겨주마.”
쿠구궁!
무거운 관이 둥실 떠오르더니, 천천히 날아가 절벽 앞 땅에 안착했다.
천호가 허공에서 손을 뒤집었다.
끼기긱! 쿵!
육중한 소리와 함께 관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서 새하얀 운무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주변 땅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놀라운 한기였다. 운무에 닿는 것만으로도 반경 삼 장 거리가 죄다 얼어붙었다.
여전히 운무가 새어 나오는 관 안에는 한 명의 여인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가사 상태에 빠져 있다. 스스로가 원한 것이지.”
“…….”
“직접 확인해 봐라.”
걱정이 가득했던 천호의 눈에 은은한 살기가 일었다. 상대가 내려온다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분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좋지.”
그가 허공으로 발을 내디뎠다.
후우우우웅.
하강하는 서량.
그를 보는 야수들은 또다시 놀랐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계단이라도 있는 듯, 뒷짐까지 떡 하니 진 채 서서히 내려오는 서량의 모습은 신선을 방불케 했다. 그의 주변으로 붉게 피어오르는 마기가 두려움보다는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사박.
부드럽게 땅에 안착한 서량이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여강휘와 꼭 닮은 외모지만 그보다 훨씬 섬세한 생김새다. 이 여인을 보니 여강휘는 그래도 남자답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끄러미 여인을 내려다보던 서량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가사 상태에 빠진지라 직접 맥을 짚어 확인해 보려는 것이다.
천호의 눈에 불똥이 튀고, 호왕이 으르렁거렸다.
서량의 손이 여인의 손목에 닿으려는 그 순간.
“이상하네.”
“……뭐?”
“생사를 직접 확인하라? 그게 확실하긴 하다만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올 필요는 없을 텐데.”
서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공에 그리 자신이 있는 건가, 아니면…… 노림수가 있는 건가?”
번쩍!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인이 눈을 떴다.
파아아악!
섬섬옥수가 서량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