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최고의 해답 (4)
천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것들이!”
흐리멍덩한 안광을 터트리며 미친 듯이 몰려오는 짐승들에게선 맹목적인 살기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몰려드는 짐승 중엔 표범이나 들개 등 맹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빠른 속도로 땅을 기는 독사는 말할 것도 없고 단단하고 뾰족한 뿔이 달린 사나운 인상의 사슴, 팔이 유독 긴 원숭이, 손바닥보다 작은 새는 물론 회색빛 쥐 떼까지.
마치 땅이 스스로 좁혀 온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수였다. 애뇌산에 서식하는 모든 짐승이 총출동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호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쿵!
두 앞발로 땅을 내리찍은 호왕이 거센 포효를 터트렸다.
커허헝!
사람도 한입에 삼킬 거대한 주둥이에서 나온 포효는 가히 압권이었다. 금호의 울음보다 신비롭진 않지만, 그보다 훨씬 괴악하고 살벌했다.
쿠구구궁!
홀린 듯 달려들던 짐승들이 모조리 멈칫했다.
콰지직!
멈춘 짐승들은 후방에서 몰려오는 짐승들에게 짓밟혀 모조리 즉사했다.
금호의 영기(靈氣)는 분명 대단했지만 지나치게 광범위했다. 애뇌산의 모든 짐승을 사로잡을 순 있지만 영기의 농도는 옅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호왕의 포효에 깃든 거센 살기는 지근거리의 영기를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짐승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모조리 죽여!”
퍼어어엉!
백왕수들이 제각기 권장(拳掌)을 휘둘렀다. 권장에 실린 강력한 경파(勁波)에 짐승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천호가 궁주가 되기 전에도 백왕수는 야수궁에서 손꼽히는 전력이었다. 그런 그들이 궁주의 지원을 받아 야수궁 최강의 전력으로 우뚝 섰으니, 그들의 무력은 천마신교의 정예와 비교해도 별 부족함이 없었다.
콰앙! 퍼어엉!
수십 명의 백왕수가 둘러싼 영역은 가히 철옹성을 방불케 했다.
천호가 서량을 노려보았다.
“제자들을 내놓아라.”
서량이 피식 웃었다.
“너 같으면 내놓겠냐?”
“그렇지 않으면 본궁의 모든 전력이 오직 네놈 하나를 죽이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섬뜩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삼궁의 연수, 중원 진출 등 모든 걸 포기하고 오직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움직인단다. 거짓이라도 쉬이 무시하기 힘든 협박이었다.
하지만 그 협박도 서량에겐 먹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후욱!
무시무시한 기파에 실린 마왕의 살기.
“해보시겠다? 거 좋지. 지금 이 시간부로 본교는 야수궁의 섬멸을 위해 잠시간 준전시체제로 돌입하겠다.”
천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존에게 그런 권한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
“난 마존이 아니야.”
휘이이잉!
서량이 치켜든 용린도에 붉은 바람이 모여들었다.
심상치 않은 전조에 천호의 몸에서도 금빛 광채가 일렁였다.
“내 이름은 서량. 당대 천마 이천상의 제자이자 신교의 삼공자가 바로 나다.”
천호의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
‘천마의 제자? 마교의 삼공자라고?!’
설마하니 상대가 그런 신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교주의 제자라면 자신의 제자들과 동년배임이 분명한데, 그 무공은 자신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믿기 힘든 사실에 당황하고 있을 때, 서량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하기야, 애뇌산에서 쫓겨난 정도로는 부족한 감이 있지. 멸망의 신호탄을 알리는 제물로 너 정도면 나쁘지 않겠어.”
“……!”
“이 기회에 운남 땅에서 깨끗이 지워 주마.”
콰앙!
강한 진각에 절벽이 뒤흔들렸다.
금호의 안광이 번뜩였다.
캬아아앗!
날카로운 외침에 짐승들의 붉은 눈에서 오색의 광채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쿵! 쿠르릉!
대지가 뒤흔들렸다. 몰려드는 짐승들의 무차별 공세가 한층 더 격렬해졌다.
백왕수 한 명이 이를 악물고 권법을 전개할 때.
타다다닥!
발목을 타고 오른 쥐들이 백왕수의 피부를 물어뜯었다. 진기로 보호받는 육체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지만, 드디어 철벽의 방벽이 뚫린 것이다.
“이익!”
콰르릉!
호상공(虎祥功)의 기운이 일자 쥐 떼의 몸이 퍽퍽 터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썩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애뇌산, 특히 만요림에 서식하는 쥐들은 체내에 독주머니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퍼펑!
백왕수들 모두가 호상공을 발산하자 수백 마리의 쥐들이 죽어 나갔다.
야수궁의 무공은 단순하기 때문에 강하다. 하지만 섬세하진 않기에 공격 자체가 크게 뭉쳐 있었다.
순식간에 독지(毒地)가 되어 버린 땅.
천호가 이를 갈았다.
“호왕!”
파아악!
백왕수를 단숨에 뛰어넘어 서쪽 길에 내려선 호왕이 앞발을 휘둘렀다.
퍼버버벅!
거대한 앞발에 휩쓸린 표범과 원숭이, 사슴들이 십여 마리 가량 죽어 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호왕은 거대한 덩치에 걸맞지 않게 엄청나게 기민했다. 가히 일류고수의 발검술처럼 앞발을 휘두르는데, 순식간에 백여 마리의 맹수가 온몸이 갈가리 찢겨 거꾸러졌다.
퍼어어억!
호랑이의 무기는 발톱과 이빨만이 전부가 아니다. 근육으로 똘똘 뭉친 꼬리에 잘못 맞으면 사람은 죽을 수도 있다.
하물며 호왕의 꼬리는 어떻겠는가. 매섭게 휘둘러진 꼬리 한 방에 거대한 사슴의 척추가 내려앉고 내장이 죄 터졌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굉장하군.’
실로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절정고수도 저런 속도로 짐승들을 도살할 수 없다. 야수궁 술법의 총화라는 호왕의 진면목은 충격적일 만큼 대단했다.
‘금호라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그가 금호를 바라보았다.
금호 역시 호왕을 보고 있었다. 신비로운 오색의 안광,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한판 붙어 볼래?”
금호가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마치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듯 고고한 자존심이 엿보였다. 호왕을 굽어보는 금호의 모습은 마치 황제의 그것과도 같았다.
“좋아,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하지.”
우우우웅!!
용린도가 거센 도명(刀鳴)을 터트렸다. 그동안 지옥풍의 기운이 집약된 칼은 부러질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파아악!
천호를 향해 달려들려던 서량.
놀랍게도 천호의 움직임이 그보다 더 빨랐다. 더 이상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다는 듯, 엄청난 거리를 뛰어서 절벽에 붙더니 번개처럼 절벽 위로 올라섰다.
투웅!
하늘 높이 날아오른 천호의 눈에 서량과 금호, 그리고 그 뒤에 너부러진 여섯 제자가 보였다.
그때, 제자 중 하나가 꿈틀거렸다.
‘귀응!’
귀응이 몽롱한 눈으로 천호를 바라보았다.
천호의 눈이 번뜩였다. 녀석이 자신의 기와 공명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천호는 생각했다.
‘지금?!’
지금 귀응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하는가, 아니면 기다려야 하는가.
원래라면 최소 일 년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지금 이 난전에 귀응이 휩쓸릴 위험이 있다.
‘……빌어먹을.’
귀응을 아끼는 이유는 단순했다. 수백 년간 절치부심하여 완성한 야수궁의 술법을 녀석에게 걸어 놨기 때문이었다.
그 술법을 자신의 것과 일치시키는 순간, 자신은 역대 야수궁주 중 제일가는 실력자가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십수 년 동안 온갖 영약과 독물을 저 몸뚱이에 쏟아부었다.
설마하니 애뇌산으로 보낸 와중에 마교라는 재앙이 덮쳐 올 줄은 상상도 못 했거늘.
‘별수 없지.’
서량이란 놈은 눈치가 빠르다. 시간을 더 지체했다가는 놈도 뭔가 낌새를 알아차릴 것이다.
‘버티다가 안 되면 오늘 잡아먹는 수밖에!’
그때, 붉은빛이 번뜩였다.
“어딜 보나?”
부아아아앙!
공기가 달아오르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무시무시한 압력이 전해져 왔다. 붉은색을 입은 과격한 도풍(刀風)이 돌풍(突風)이 되어 그에게 쏘아지고 있었다.
천호의 몸이 웅크려졌다.
피이이이잉!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지옥풍의 일격이 허공을 가른 것이다.
‘용케 피했군.’
탄력적인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빠져나간 천호가 어느새 인질들 후방 삼 장 거리에 내려섰다.
서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칠야.”
퍼어어어억!
귀응과 함께 묶인 제자들을 구하려던 천호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날아온 흉흉한 장도 한 자루가 그의 앞에 꽂혔다.
멈추지 않았다면 가슴이 뚫려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놈이!’
파바바박!
사지를 재게 놀려 갈지(之)자로 물러난 천호가 진각을 구사했다.
콰앙!
서량의 진각 못지않은 엄청난 힘.
천호가 배에 힘을 주었다.
“일어들 나지 못하겠느냐!!”
쩌어어어엉!
사나운 일갈에 여섯 제자의 몸이 움찔거렸다.
천호가 재차 입을 열려던 그때.
화르르륵!
집채만 한 야수가 발톱을 세워 할퀴는 것처럼, 세 줄기 시뻘건 도기가 천호에게 날아들었다.
붉은 마기는 고온의 화기로 물들어 있어, 몸에 닿지 않았는데도 피부가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이익!’
천호가 두 손을 휘둘렀다. 독문무공인 야왕조(野王爪)였다.
퍼어어엉!
서량과 천호가 동시에 서너 걸음 물러났다.
천호는 내심 깜짝 놀랐다. 엇비슷한 경지지만 연륜 때문이라도 자신이 유리할 줄 알았는데, 힘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걸렸어.’
퍼퍼퍼펑!
천호가 선 땅 주변으로 무시무시한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도기로 만들어진 불꽃의 환상, 그 온도는 이미 용광로에 준할 정도였다.
‘등활(等活), 흑승(黑繩), 중합(衆合), 규환(叫喚)…….’
거대한 칼날의 형상, 밧줄의 형상, 벽의 형상, 그리고 끓어오르는 화탕의 형상이 불꽃으로 구현되었다.
서량이 빠르게 구결과 식을 읊조렸다.
‘대규환(大叫喚), 초열(焦熱), 대초열(大焦熱).’
꺄아아아악!
불꽃과 불꽃이 부딪치며 비명과 비슷한 소리가 터졌다. 시뻘건 불꽃이 점차 하얗게 물들었다.
사아아아악!
천호의 뒤에 있던 나무 서너 그루가 재가 되어 흩어졌다.
신기한 것은 천호의 제자들이었다. 가깝진 않지만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에 나뒹굴고 있는데 화기(火氣)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있었다. 서량이 화력을 천호에게로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크윽!”
천호의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화염의 늪에서 빠져나가고 싶은데, 빠져나갈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진짜 불꽃이 아니다. 불꽃의 형상을 한 것일 뿐! 화기를 억누르기만 한다면……!’
그때, 신기하게도 서량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무간(無間).”
팔열지옥의 끝, 억겁(億劫)의 고통을 받게 된다는 아비규환의 장(場).
인화도법 이 장 종극무간도(終極無間道)가 진명영창(眞名咏唱)으로 펼쳐진 것이다.
번쩍! 콰르르릉!
반경 이 장 거리의 영역이 통째로 불타올랐다.
홍백(紅白)의 불꽃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번뜩이며 하늘까지 치솟았다.
화염의 칼날로 이루어진 죽음의 무공이었다. 그 안에 갇힌 자, 초고온의 불길로 뒤덮인 화염의 도기로 난자되어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극마에 오른 구유인화도법의 진정한 위력, 무공의 한계를 넘어 술법(術法), 도술(道術)의 영역마저 침범한 무적의 무도(武道)였다.
콰앙!
용린도를 땅에 박아 넣은 서량이 구유마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종극무간도의 화기를 용린도에 묶어 두고 구유마공과 결합시켰으니 마기가 쇠하거나 용린도가 뽑히지 않는 한, 저 불꽃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됐어. 일단은 묶었다.’
묶긴 묶었는데…….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당황하는 눈치였어. 분명 놈에게 뭔가가 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금호! 저 떨거지들에게 집중시켜!”
캬아아앗!
금호의 포효에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짐승들이 백왕수들을 향해 더욱 과격하게 달려들었다. 호왕의 앞발에 죽든 말든, 그저 맹목적으로 달려들어 할퀴는 것이다.
천호처럼 그 영역을 벗어나 버리면 될 터. 그러나 그게 쉽지가 않았다. 짐승들의 공격과 금호의 영기, 나아가 독기로 텁텁해져 영역 전체가 벗어날 수 없는 늪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때, 투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홀린 듯 밧줄을 끊고 일어난 귀응이 한 걸음, 한 걸음 불꽃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저 새끼 봐라?’
서량은 당황했다. 분명 단전을 완벽하게 봉인하고 혼혈까지 짚어 놨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퍼어어엉!
불의 장벽을 뚫고 나타난, 화상과 도상으로 뒤덮인 굵직한 팔이 귀응의 목을 움켜쥐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서량이 왼손을 들어 올렸다.
번쩍!
칠야도와 유성쌍도가 불꽃을 향해 쏘아졌다. 그 중 칠야도는 귀응의 심장을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동시에, 무간지옥의 불꽃이 폭발했다.
콰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