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최고의 해답 (5)
쩌어어엉!
암기를 튕겨 낸 묵왕검이 살짝 떨려 왔다.
‘굉장하군.’
오십 장이 넘는 거리에서 쏘아진 수전(袖箭)은 화살보다도 빠르고 강했다. 게다가 막강한 내공이 실려 있어서 튕겨 내는 것만으로도 손에 충격이 남을 정도였다.
‘초절정고수의 기파, 칠가주에 비견될 만하다. 당가주가 직접 온 건가?’
마동필의 두 발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터어엉!
순식간에 여강휘의 옆까지 도달한 그가 외쳤다.
“거리가 좁혀지고 있습니다! 속도를 더 내야 할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몸에서 새하얀 한기와 금빛 마기가 폭발했다.
콰아앙!
이전보다 한층 빨라진 속도에 쫓아오는 당가 병력과의 거리가 서서히 벌어졌다.
여강휘가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독하기론 중원제일이라고 하더니, 앞뒤 사정도 알아보지 않는군요.”
“제 마기를 읽은 게 분명합니다.”
당가의 무리가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한 걸 본 그들은 서량에게 신호를 주려 했다.
하지만 신호를 주기 직전 당가 측의 공격을 받았다. 수십 장 거리를 격하고 쏘아지는 그들의 암기는 쉽게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할 겁니까?”
“이렇게 된 이상 충격파를…….”
그때였다.
퍼어어엉!
저 멀리 만요림에서 솟구치는 거대한 불기둥이 보였다.
이만큼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전신에 소름이 돋을 만큼 막강한 화기였다. 그리고 그 화기보다 진한 살기와 마기가 모골을 송연케 했다.
여강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탄……?!”
“아닙니다.”
마동필의 눈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공자님의 무공입니다.”
여강휘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사람이 저런 무공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큰일이다. 아무리 습도가 높아도 저만한 화력이라면 일대가 금세 건조해질 거야. 자칫하면 만요림 전체가 불탄다.’
물론 공자님께서 알아서 범위를 조절하실 것이다. 그러나 저 불꽃 자체가 저곳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피이이이잉!
등 뒤에서 두 줄기 암기가 무서운 속도로 쏘아졌다. 마동필과 여강휘가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퍼어어억!
거리가 더 벌어졌는데도 암기의 위력은 여전했다.
거목 깊숙이 박힌 암기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암기에 독낭(毒囊)을 달아 놓은 것이다.
콰앙!
호흡을 멈춘 두 사람이 내공을 폭발시켰다. 이제는 저곳을 향해 달리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콰아앙!
산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거센 폭음이 터졌다.
천공으로 쏘아져 올라가던 불기둥이 원형으로 회오리치며 사라져 버렸다. 내부에서 강력한 충격파가 발생한 것이다.
마동필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이럴 수가?!’
서량의 무공을 숱하게 봐 온 그는 종극무간도의 화력이 인위적으로 흩어진 것을 단번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일렁이던 황금빛 마기가 더욱 진해졌다.
파아아악!
마동필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그 시각.
후두두둑!
사라진 불꽃 아래, 박살 나 비산하는 돌덩이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내렸다.
치이이이익!
시커멓게 그을린 땅 위, 한껏 몸을 웅크린 천호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반쯤 타 버린 귀응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서량의 눈이 번쩍였다.
‘뭐야?’
화상과 도상으로 너덜거리던 천호의 오른팔이 눈에 띄는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요상결!’
기(氣)의 성질에 따라 신체가 치유되는 속도는 달라진다. 물론 기(氣)의 농도가 짙다고 무조건 빠르게 치유되는 것도 아니었다.
크르릉!
절벽 밑에서 호왕의 울음이 들려왔다. 피 냄새 물씬 풍기는 살기가 이전보다 더 진해졌다.
그때, 묘한 신음이 들렸다.
서량이 뒤를 돌아보니 금호의 뒤, 얌전히 누워 있던 여인이 머리를 짚으며 일어나고 있었다.
“끄응…… 머리야.”
머리를 흔든 여인의 시선이 서량에게 닿았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세요?”
갑자기 긴장이 확 풀렸다.
서량이 투덜거렸다.
“됐으니까 더 기절해 계쇼.”
그가 검지를 들었다. 지풍으로 혼혈을 짚으려는 것이다.
그때, 여인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어? 어?”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저 쌍놈 새끼 저거!”
아찔하리만치 아리따운 여인의 입에서 우레와 같은 욕설이 튀어나온다. 천하의 서량조차 그 묘한 부조화에 순간 멍해질 정도였다.
“내 머리에다 뭔 짓거리를 한 거야! 아오, 띵해.”
불쑥 궁금증이 일었지만 지금은 풀 때가 아니었다.
서량이 손가락을 튕겼다.
푹!
“끄어어…….”
괴상한 신음과 함께 여인이 쓰러졌다. 흰자위까지 드러내며 쓰러진 걸 보니 은근히 섬뜩하다.
‘독특한 아이로군.’
서량이 천호를 돌아보았다. 천호는 여전히 몸을 수그린 채 막강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여하간 그냥 둬선 안 되겠지.’
훤히 빈틈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 좋은 기회를 걷어찰 수는 없다.
서량이 땅을 박찼다.
파아아악!
순식간에 접근한 그가 용린도를 휘둘렀다.
묵직한 칼날이 천호의 정수리 한 치 위에 도달했을 때.
따아앙!
서량이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야?’
엄청난 충격에 손이 부르르 떨린다. 천호를 양단했어야 할 용린도는 십여 장 바깥으로 날아가 땅에 박혀 있었다.
‘장법(掌法)?’
아니다.
‘그냥 손으로 쳐 낸 거야. 그런데도 이런 충격이…….’
천호는 여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서량의 용린도를 쳐 내느라 어깨 뼈가 빠져 축 늘어진 오른팔만 제외하면 이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우두둑! 우둑!
오른팔이 제멋대로 꿈틀거리더니 빠진 어깨가 맞춰졌다.
‘의식하고 한 게 아니야. 무의식중에 발현된 요상결로 팔이 알아서 맞춰진 거다.’
서량의 안광이 명멸을 반복했다.
“하여튼 이놈이나 저놈이나.”
무슨 요상결을 쓰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천호는 제자를 자신의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쓴 것이다. 타 버린 귀응의 시체가 눈에 띄게 쪼그라들어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아마도 생기까지 빨려 버린 것 같았다.
‘관평의 수법과 비슷한 건가?’
조금의 부작용도 없이 상대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것.
흡정마공보다도 고차원적인 수법이었다. 물론 부작용이 있을지 없을지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우우우웅.
멀찍이 떨어진 용린도가 오른손에, 길고 날렵한 칠야도가 왼손에 잡혔다.
“이 새끼들아, 무공이 그렇게 만만하냐!”
파아아악!
다시 한번 천호에게 접근한 그가 용린과 칠야를 휘둘렀다. 작정하고 휘두른 두 칼에 엄청난 도풍이 소용돌이쳤다.
콰콰쾅!
기공의 발산까지 막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전신에 칼자국이 난 천호가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서량은 방심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안심하다 뒤통수 맞는 건 사양이었다.
펑! 퍼퍼펑!
용린도와 칠야도가 미친 듯이 휘둘러졌다. 무지막지한 도풍과 도기에 천호의 몸이 연신 들썩였다.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역시.’
피부가 베이고 근육이 찢어졌다. 수십 개의 도상이 전신에 그물처럼 새겨졌다.
그래서 문제였다.
바위도 손쉽게 쪼개 버리는 칼질을 수십 번이나 퍼부었다. 그런데도 몸이 갈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가 옅어지고 있었다.
‘금강불괴(金剛不壞)가 따로 없군.’
그때, 저 멀리서 호왕의 포효가 울렸다.
커허허헝!!
지금껏 내질렀던 어떠한 포효보다도 우렁찼다. 그 충격파가 어찌나 강력한지 서량조차 움찔할 정도였다.
푸르르르!
백왕수를 공격하던 짐승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파아아악!
호왕이 몸을 날렸다.
거대한 동체가 순식간에 절벽을 찍고 도약했다. 절벽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무게, 그러나 다섯 발자국 만에 그 높은 절벽을 뛰어올랐다.
부웅.
하늘 높이 날아오른 호왕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서량에게 돌진했다. 한입에 삼켜 버릴 기세였다.
순간 금호의 오색 안광이 폭발했다.
앉아서 절벽 밑을 굽어보던 금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콰앙!
서량을 집어삼키려던 호왕의 몸이 옆으로 날아갔다. 어느새 다가온 금호가 호왕을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쿠르르릉!
천 근의 거체가 땅을 구른 충격은 엄청났다. 호왕이 구른 땅에 쩍쩍 금이 갔다.
크르릉.
호왕의 앞에 선 금호가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륵.
고개를 흔들고 일어난 호왕이 붉은 안광을 터트렸다. 거대한 송곳니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파아악!
금호가 돌진했다.
실로 엄청난 속도였다. 번개처럼 달린 금호가 호왕을 들이받곤 앞발로 대가리를 후려쳤다.
호왕이라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거대한 앞발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며 금호를 후려치는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무지막지했다.
쾅! 콰앙! 퍼벅!
앞발로 치고 머리로 들이받는 소리는 폭음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황금빛 신수(神獸)와 흑황의 마수(魔獸)의 정면승부. 야생에선 있을 수 없는 짐승들의 피 튀기는 생사결이 벌어졌다.
파바바박!
동시에 백왕수들이 절벽을 타고 올랐다. 그간의 혈전으로 지친 듯 호흡이 고르지 않았지만 흉흉한 기세는 여전했다.
서량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난전을 원하긴 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는데.”
꾸욱.
용린도를 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궁주님!”
“놈을 죽여라!”
함성을 지르며 덤벼드는 백왕수들.
서량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번쩍! 푸화아악!
일도(一刀)에 백왕수 십여 명이 양단되었다.
후우웅.
쓰러진 여인, 여상린(呂霜璘)을 허공섭물로 끌어낸 서량이 용린도를 던졌다.
회전하며 나아가는 용린도가 백왕수들을 차례로 휩쓸었다. 단천삼도(斷天三刀)의 마지막 초식, 선풍열참(旋風裂斬)이었다.
위이이이잉! 퍼버버벅!
피보라가 일었다. 잘려 나간 사지와 조각난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백왕수들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궁주의 생사가 걸린 문제다. 상대가 불세출의 고수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우우우웅!
오십밖에 남지 않은 백왕수들의 발경(發勁).
한둘이야 코웃음을 치며 베어 버릴 수 있지만 오십이나 되는 고수들이 힘을 합친 발경은 서량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같은 무공, 같은 내공을 연마한 그들의 합공은 극마에 이른 고수의 시선도 묶을 정도였다.
“쌍.”
쿵!
진각으로 힘을 받은 서량이 벽력권을 펼쳐 냈다. 도법으로 막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은 탓이었다.
콰아아앙!
백왕수들이 주춤했다. 서량 역시 한순간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파바바박!
재차 달려드는 백왕수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격한 호흡을 보면 도무지 정상이라 할 수 없다. 목숨을 걸고 진격하는 것이다.
서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것들이 진짜!”
우우우우웅!
용린도와 유성쌍도가 그의 머리 위에 둥둥 떴다. 언제 허공섭물로 끌어왔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츠츠츠츠.
세 자루의 칼에 심상치 않은 마기가 어렸다.
극상(極上)의 파괴력, 유혼비천(幽魂飛天)이다. 극심한 내공 소모를 감수하고 저들을 몽땅 날려 버릴 작정이었다.
그때였다.
‘……!’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익숙한 기파, 그리고 낯선 독기(毒氣).
파아악!
재빨리 여상린을 어깨에 멘 서량이 외쳤다.
“금호!”
퍼어어엉!
호왕의 얼굴에 강한 일격을 날린 금호가 순식간에 서량 앞으로 다가왔다.
서량이 금호의 입에 여상린을 억지로 끼워 넣었다. 그 뜻을 알았는지 금호가 턱에 힘을 뺐다.
“시파, 어쨌든 약속은 지켰다, 고드름.”
그가 금호의 등을 쳤다. 금호가 아쉬운 듯 호왕을 돌아보더니 이내 숲을 향해 뛰어들었다.
커허허헝!
피투성이가 된 호왕의 포효, 헐떡이는 백왕수들의 진격, 그리고 차츰 진정되는 천호의 상태.
칠야도를 역수로 쥔 서량이 으르렁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당가는 따로 상대하련다.”
화아아악!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마기가 칠야도에 담겼다.
콰득!
서량이 칠야도를 땅에 꽂았다.
뜻하지 않은 상황이 주는 난국에서의 해결책, 그것은 모두의 목숨을 판돈 삼아 강제로 도박판에 앉히는 것이다.
구유마공이 극한까지 달아오를 때.
번쩍!
마침내 천호의 눈이 뜨였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늦었어, 야옹 선생.”
칠야도에 담긴 구유마기가 땅 전체로 퍼져 나갔다.
콰아아아앙!!
절벽 위, 지반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