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도전생기-183화 (183/774)

183화. 짐승의 왕 (3)

“저기다.”

위홍련이 자세를 낮추었다.

우거진 수풀에 몸을 숨긴 장추가 눈을 빛냈다.

“많기도 하군.”

저 멀리 보이는 야수궁의 병력은 그 수만 삼백에 달했다.

상당한 숫자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많은 병력이라고 볼 순 없다. 그러나 그들 개개인의 무공이 강하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떻습니까?”

“초절정고수가 둘이나 끼었어. 나보다는 한 수 아래인 것 같지만, 둘이라면 버티기 힘든데.”

위홍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차륜전으로 시간을 끌어야 하나?’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완벽하게 은신한 광마대원들의 눈빛은 여전히 흉흉했다. 마기를 숨기는 데에 도가 터서 기파는 잠잠했지만, 가끔씩 불쑥 솟구치는 살기는 매섭기 짝이 없었다.

‘대원들의 정신력에도 한계가 있어. 무턱대고 암습을 가했다간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광마대가 신교 최악의 부대라 불리고 있지만 최강은 아니다. 설령 천마군(天魔軍)이 와도 이만큼 지친 상태에서 앞뒤 안 가리고 암습을 감행했다간 상당한 피해를 볼 것이다.

‘어떻게 할까.’

놈들이 공자님이 계신 곳으로 가면 골치 아파지는데.

위홍련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별수 없다. 해 보는 수밖에.’

호법원만 신교를 수호하는 게 아니다. 교주님의 제자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부대 전체가 아작이 나든 작살이 나든 움직여야 한다.

위홍련이 벌떡 일어나려 할 때였다.

“잠깐.”

“왜요? 김새게.”

장추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기운은…… 예전에 한 번 느껴 본 적이 있는데.”

“그건 또 뭔 소리랍니까.”

작게 투덜대는 위홍련.

생각에 잠겼던 장추가 이내 눈을 크게 부릅떴다.

“설마?!”

“혼자만 알지 말고 같이 좀 알…… 어?”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났다.

“저놈들 저거?!”

“저 새끼들은?”

그들이 바라보는 곳.

능선을 타고 접근해 오는 녹의의 무사들, 바로 사천당가의 정예였다.

* * *

한 시진 만에 운공을 마친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운공을 끝낸 마동필이 재빨리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냐.”

단약 덕에 내상을 어느 정도 다스릴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정상은 아니다. 선천의 영역을 넘보는 절대마기로도 단시간에 내부를 바로잡긴 힘들었다.

“하지만 한 판 싸울 정도는 돼.”

내상을 얼마간 회복한 후, 텅 빈 단전을 채우는 데에 집중했다. 움직일 때마다 속이 시큰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젠장, 운남에도 안가 하나 만들어 놓을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게다가 살수질을 해 먹을 때는 운남에 와 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는 멱을 딸 놈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동필의 얼굴에 걱정의 기색이 스쳤다.

“조금 더 운기를 하시지요.”

서량이 힐끔 무너진 만요림을 바라보았다.

“안 돼. 놈이 움직이고 있어.”

“예?”

“투기(鬪氣)가 느껴진다. 놈이 나타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마동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토록 떨어진 거리에서 상대의 투기를 느낀단다. 지금의 그로서는 상상조차 못 할 경지였다.

물끄러미 마동필을 주시하던 서량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 목숨을 걸어라.”

“물론입니다.”

“제대로 한 칼 날릴 수 있다면 하늘도 너에게 선물을 줄 거다.”

“예?”

이게 무슨 소린가?

마동필은 의아했지만 서량은 더 이상 말해 주지 않았다.

크게 숨을 몰아쉰 그가 호왕에게 걸어갔다. 호왕은 여전히 혀를 빼물고 기절해 있었다.

스르륵.

서량이 호왕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우우우웅.

호왕의 거체가 움찔거렸다. 백회혈(百會穴)로 파고든 마기가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역시 그렇군.”

의천맹의 대장로, 정일룡을 때려잡기 전에 야수궁의 늑대들과 대판 붙은 적이 있었다.

과감한 초식으로 재빠르게 해치웠지만 늑대들의 움직임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지금보단 약했지만, 절정고수로서 무르익은 무공을 구사했던 마동필도 몇 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한데 호왕은 더했다.

상식을 아득히 넘어서는 크기도 크기지만 반응 속도와 체력, 피부의 경도 등 모든 것이 규격 외다. 심지어 뿜어내는 살기는 초절정고수도 긴장케 할 만큼 무시무시했다.

이 정도면 금호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 괴수라 할 만하다. 금호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영기(靈氣)를 축적한 진짜 영물이라면, 호왕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술법의 총화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술법의 핵(核)은 머리, 두뇌 쪽에 있었다.

‘근데 이 술법…….’

서량이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렇게 엉성해?’

엉성하다기보다는 해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정파, 사파는 물론 마도학(魔道學)에도 정통한 서량이었기에 가능한 얘기였지만.

‘게다가 이거, 혈고(血蠱)를 없애는 방법과 유사하잖아?’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혈고는 남만 땅에서 나는 고독(蠱毒) 중 가장 지독한 것으로 악명 높았다. 의천맹주가 서량을 억압할 때 쓴 것이 바로 혈고였다.

그 빌어먹을 벌레를 제거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하지만 이놈 머리에 자리 잡은 핵은 벌레 같은 게 아니야. 술력(術力)으로 똘똘 뭉친 기(氣)의 덩어리다. 그렇다는 건…….’

서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혈고를 제거할 때처럼 귀한 약재가 필요하지 않다는 거다.’

크르릉.

호왕의 목에서 묵직한 울음이 흘러나왔다.

거친 숨을 헐떡이던 호왕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신경을 건드린 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정신을 차린 것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뿐 움직일 수는 없다. 엄청난 무게의 돌무더기에 휩쓸렸다가 간신히 빠져나왔으니 내장까지 상했을 것이다.

사아아악.

호왕의 거체에서 은은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살기가 육안으로 확인될 만큼 달아오른 것이다.

그러나 이 살기는, 오롯이 호왕의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야수궁주.”

크릉!

“네 술법의 핵은 야수궁주와 연결되어 있구나.”

쿠구궁!

무너진 절벽 밑에서 한차례 굉음이 울렸다. 천호가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힘을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빠져나오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거야.’

우우우웅!

서량의 손에 붉은 마기가 일렁였다.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구유마공의 지저옥관귀문식, 그리고 마관상천지문식을 펼치려는 것이다.

“금호.”

스르륵.

금호가 서량의 옆으로 다가왔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이놈도 결국엔 짐승이다. 할 수 있겠어?”

금호의 안광이 오색으로 물들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량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꿰뚫어 보는 게 금호였다.

고개를 끄덕인 서량이 차가운 눈으로 호왕을 내려다보았다.

“그간 했던 짓을 생각하면 죽여도 시원찮지만, 일단은 속박의 사슬부터 끊어 주고 나서 생각하마.”

콰아아앙!

거센 폭음과 함께 땅이 들썩였다.

동시에 숨도 못 쉴 것 같은 기파가 일대를 장악했다. 이 기파에 휩쓸린 자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야수가 목덜미 옆에서 으르렁대는 환청을 들었다.

쾅! 콰쾅! 쾅!

연달아 터져 나오는 폭음.

뻗어 나가는 기파가 점점 더 강해지고 살기 또한 진해졌다. 말도 안 되는 힘을 지닌 절대고수가 무서운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퍼어어어엉!

별안간 집채만 한 바위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당한 체구의 노인이 뛰쳐나왔다.

파앙!

탄력적인 몸놀림.

발판은 필요치 않다. 등에 날개라도 달렸는지 하늘 높이 날아오른 노인이 서서히 하강했다.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한다. 아니, 귀응을 흡수한 이후 넘쳐흐르는 공력을 주체하지 못한 천호의 기파는 이전보다 훨씬 더 격렬해져 있었다.

널찍한 바위에 앉아 있던 서량이 씨익 웃었다.

“땅굴 파기 고되진 않던가?”

사박.

부드럽게 내려선 천호의 눈은 벌겋게 핏발이 서 있었다.

“호왕을 어떻게 한 거냐.”

“죽였다.”

“…….”

“당연한 거 아니냐. 내 목을 벨 수 있는 적의 명검인데 부러트려 놔야지.”

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퍼어어어어엉!!

바위가 박살 나고 그 뒤에 거목 서너 그루가 통째로 부러졌다.

“흡!”

천호가 날린 주먹을 막은 채로 밀려났다. 서량의 왼팔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부들부들 떨리는 두 사람의 팔.

천호가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감히 호왕을 죽여?”

상대는 극마에 이른 고수였다. 충분히 호왕을 죽일 실력이 되는 놈이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여유를 잃지는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지. 네놈이 혹시 몰라 데리고 온 병력도 맹공을 당하고 있다.”

“뭣이?!”

“당가 놈들하고 찐하게 한판 붙는 중이지. 당가 놈들, 얼씨구나 잘됐다는 듯 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가던데?”

천호의 눈이 흔들렸다.

“그럴 리가 없다.”

“믿든 안 믿든 그건 네놈 자유지. 하지만 그걸 고민하기 전에 등 뒤도 신경을 쓰는 게 어때?”

순간 천호가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앙!

그가 섰던 땅에 길쭉한 검흔이 새겨졌다. 서량의 마기로 은신해 있던 마동필이 날린 일격이었다.

“이 깜찍한 놈들이!”

훅!

“……!”

이번만큼은 천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 황금빛 찬란한 갈기를 휘날리며 떨어진 여우의 신형이 제 위를 덮쳐 온 것이다.

천호가 본능적으로 장(掌)을 내치려 할 때.

「크와아앙!」

‘큽!’

금호의 포효는 호왕의 그것과 완전히 궤를 달리했다. 영기가 가득 실린 그 사자후에 단전이 흔들렸다.

한차례 멈칫한 천호.

그 틈을 서량은 놓치지 않았다.

번쩍!

사선으로 휘둘러진 칠야도가 검붉은 도기를 뿜어냈다.

‘익!’

역시나 이놈은 다르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결코 빈틈을 놓치지 않는다. 보통 빈틈을 노릴 땐 강력한 일격을 날리는 게 보통인데, 위력을 축소시키고 속도를 살린 공격을 하는 것도 남달랐다.

천호의 몸이 회전했다.

퍼어엉!

박살 난 도기의 파편이 비산했다. 그 틈에 근거리까지 다가온 금호가 앞발을 휘둘렀다.

‘이런!’

이놈은 영물이 확실했다. 호왕도 그렇지만 생김새 자체가 야생의 동물과 확연하게 달랐다.

늑대에 가까운 여우처럼 보이는데, 발톱은 호랑이처럼 안으로 말려 숨겨져 있었다. 두툼하지만 탄력적인 다리 근육 역시 갯과가 아니라 고양잇과를 닮았다.

그리고 그 앞발에 실린 힘은, 호왕의 전력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콰앙!

천호의 몸이 옆으로 주르륵 밀려났다. 예상치 못한 금호의 일격은 화경에 이른 그조차 막기가 힘들었다.

“이 여우 새끼가!”

퍼어어엉!

곧바로 권풍(拳風)을 날렸지만 어느새 금호는 저 멀리 물러나 있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주먹을 날리려던 천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느새 하단에서 치고 올라오는 흑색 칼날이 보인 것이다. 서량의 칠야도였다.

따앙!

칼날을 쳐 낸 손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일단 이놈부터 박살 내자 싶었던 천호는, 또 한 번의 공격을 받아 내야 했다.

번쩍!

목을 노리고 쏘아지는 거대한 검기, 마동필의 구중마검세였다. 멀쩡한 몸 상태였다면 코웃음을 치며 막았을 일격이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무시할 수 없었다.

퍼퍼펑! 콰앙!

권법과 조법(爪法), 장법을 연달아 쳐 가며 방어한다. 피하고 싶었지만 이인일수(二人一獸)가 번갈아 치고 빠지는 전략이 너무 절묘했다.

‘빌어먹을!’

수왕대법을 뒤튼 인왕대법(人王大法)으로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오르려 하였다. 하지만 대법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귀응의 생명력을 빨아들였다.

최고급 마공에 준하는 회복력, 같은 경지에 오른 어떠한 고수보다 많은 내공력을 갖게 되었지만 그게 전부다. 조화경의 다음 경지로 넘어가지 못한 그는 이 셋의 조합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퍼억!

천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마동필의 발길질에 일격을 허용한 것이다.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개자식들!”

콰아아앙!

진호신권의 오의(奧義), 멸산파(滅山波)로 셋을 한꺼번에 날려 버린 천호가 포효했다.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바로 남만제일의…….”

콰득!

천호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두 눈 가득 오색의 안광을 뿜어내는 거대한 범이 그의 두 다리를 물고 있었다.

“……호왕?”

헉헉대던 서량이 일어났다. 어느새 그의 등 뒤로 용린도와 유성쌍도가 떠올라 있었다.

남은 힘을 쥐어짠 필살의 일격 유혼비천.

“싸움이란 원래 허무한 거야, 야옹 선생.”

세 자루 칼이 폭음을 내며 쏘아졌다.

콰콰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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