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짐승의 왕 (4)
“헉헉!”
창백하게 질린 서량이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공자님!”
마동필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천호의 무공을 상대하며 그 역시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서량은 헐떡이는 와중에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았지?”
“공자님께서는 정말이지…….”
“헉헉! 응?”
마동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극마에 오른 절대고수가 이렇게나 피폐한 상태로 너부러져 있다. 상대 역시 화경에 이른 고수였다지만 이건 말이 안 된다.
‘내가 실수했다.’
호위무사로서 호위 대상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었다.
‘공자님께서 굳이 본인이 할 필요가 없는 일까지 도맡아서 하신 셈이야.’
야수궁주와 인질극을 벌인 것부터 시작해서 온갖 전투는 물론이거니와 당가와의 기 싸움까지.
서량이기에 그 모든 싸움을 성공리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혼자서 움직일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일례로 당가를 유인하는 것은 자신이나 여강휘, 둘 중 하나만 있어도 되었다. 하지만 여강휘는 인질극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제외됐고, 자신 역시 자칫 당할 수 있다며 배제되었다.
합당한 이유였다. 그러나 그리되면 공자님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자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상황에 끼어들었다면 공자님께서 이렇게까지 무리하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 역시 어느새 공자님을 의지하게 되었는지도 몰라.’
혼란과 죄책감으로 물든 마동필의 얼굴.
무엇을 느꼈을까? 서량이 짐짓 헛기침을 했다.
“일 다 끝나면 업고 가라. 힘이 하나도 없다.”
“……예.”
“재미없긴.”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아쉽게 기회를 놓쳤구나.”
“예?”
“너 말이야, 너.”
“무슨 말씀이신지……?”
“아, 거기까지 깨닫진 못했나?”
마동필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아냐, 됐어. 괜히 말해 줘 봤자 혼란스럽기만 할 테니까.”
“예에.”
서량이 끄응 소리를 내며 상체를 세웠다. 마동필의 부축을 받은 그가 전방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달라졌군.’
전방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래 힘의 삼 할밖에 되지 않는 내력으로 펼친 유혼비천으로도 땅이 갈리다 못해 뒤집혀 있었다. 몸이 멀쩡했다면 그 범위가 훨씬 늘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위력 자체의 차이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내공은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흔적이었다.
‘아직은 더 신경을 써야 해. 범위는 축소시키고 힘을 집중해야 한다. 덩어리일 뿐인 힘을 다루는 건 진짜 이기어(以氣馭)가 아니야.’
그래도 뭐…….
“확실히 작살은 냈으니까.”
가루가 된 땅에 파묻힌 천호에게선 더 이상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마기를 소모해서 감각이 둔해졌지만, 죽은 것이 분명했다.
“그놈 참, 몸뚱이 하나는 예술로다가 단단하네. 그 와중에도 제법 멀쩡하잖아?”
유혼비천에 직격을 당했음에도 형체를 유지한 것 자체가 놀랍다. 왼팔은 날아갔지만, 오른팔과 호왕에게 물어뜯긴 다리는 멀쩡히 달려 있었다.
크릉.
금호가 한옆에 떨어진 호왕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저놈도 마찬가지고.”
눈과 코,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유혼비천의 직격 범위에선 벗어났지만 그 충격파로 오장육부가 진탕된 것이다.
서량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렸다.
‘찝찝하군.’
짐승,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마물인 놈이다. 하지만 그런 마물이라도 제 주인이었던 인간을 공격하게 했다.
어떻게든 이기면 그만일 싸움이었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가만히 호왕을 바라보던 서량이 걸음을 옮겼다. 마동필이 재빨리 옆에 붙어 그를 부축해 주었다.
크르릉. 크릉.
쌕쌕 숨을 내쉬던 호왕이 서량을 힐끔거렸다.
짐승은 표정을 지을 수 없다. 하지만 눈빛에는 은근한 공포가 깃들어 있는 듯했다.
그럴 만도 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무공에 당했으니 두려움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서량이 호왕의 머리에 손을 짚었다.
움찔!
호왕의 거체가 떨렸다.
“가만히 있어라. 아직 술력의 핵을 전부 없애진 못했어.”
부르르.
“어쩌다 괴물이 되긴 했다만, 이제라도 산중대왕으로 살아라. 어디에도 얽매이지 말고.”
서량의 손에 다시 한번 마기가 피어올랐다.
마동필의 얼굴에 걱정이 깃들었다.
“공자님.”
“괜찮아. 금호가 기를 나눠 주고 있어.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다.”
마동필 역시 서량과 금호의 관계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걱정이 사라지진 않았다.
“흡.”
숨을 멈춘 서량이 마기를 쏟아부었다.
부르르르!
호왕의 몸이 크게 떨려 왔다.
서량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역시 어렵군.’
해체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마기였다.
거친 마기로는 섬세한 작업이 힘들다. 게다가 사람으로 치면 상단전을 건드리는 작업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뇌가 곤죽이 되어 죽을 것이다.
물론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위협이 된 걸 떠나, 이놈이 살아 있으면 이 부근의 초식 동물들이 씨가 마를 것이다. 술력의 끈이 끊어지면 궁주를 향한 충성도 끊어질 테니까.
하지만…… 굳이 거기까지 걱정하고 싶진 않았다.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거지, 뭐.’
솔직히 찝찝하잖아.
우우우웅!
호왕의 눈이 어느새 흰자위만 남았다. 부글부글 거품까지 무는 게 무척이나 위험한 상태로 보였다.
그때, 왼손을 들어 올린 서량이 그대로 호왕의 복부를 후려쳤다.
투우웅!
호왕이 왈칵 피를 토했다.
치이이익!
놀랍게도 토해 낸 피에 닿은 땅이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갔다. 게다가 피 색깔도 어두운 녹색이었다.
상단전에 틀어박혀 있던 술력의 핵을 위장으로 이동시킨 뒤, 탁혈(濁血)로 감싸 토해 내게 만든 것이다. 타인의 혈액에 기(氣)를 스며들게 하는 것은 극상승의 진기 조율인바, 서량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시도하기 어려웠으리라.
크르릉!
피를 토해 낸 호왕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붉은 동공이었지만 이전처럼 맹목적인 흉포함은 사라져 있었다.
“후우, 됐구만.”
털썩 주저앉은 서량에게 금호가 다가왔다. 서량의 볼을 핥아 주는 모습이 왠지 그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공자님.”
“응?”
마동필이 북쪽을 바라보았다.
“마기가 느껴집니다.”
“아, 그래?”
몸이 정말 엉망진창이 됐구만.
천라육통식이라도 써 볼까 생각했지만 관뒀다. 어차피 거의 다 끝난 싸움이다. 더 이상 무리할 필요는 없다.
“위 대주냐?”
“아닙니다. 광마대의 기도치고는 다소 진중한 것이, 아마도 진마대인 것 같습니다.”
“그렇구만.”
“그리고…… 굉장한 기파가 하나 섞여 있습니다. 마장인 모양입니다.”
“마장 하나에 부대 하나라. 진즉에 와 줬으면 기가 막힌 도움이 되었을 텐데.”
서량이 투덜거렸다.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잠시 후, 이백이 넘는 마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번쩍!
선두에 선 초로의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교불패! 만마앙복! 칠(七) 마장이 삼공자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진마대의 이백 마인들 역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삼공자님을 뵙습니다!”
쩌렁쩌렁한 외침에 강력한 마기가 묻어 나온다.
서량은 저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예전에는 마기가 그렇게 떨떠름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
“반갑소.”
칠 마장, 곽상(郭翔)의 얼굴이 굳어졌다.
“삼공자님. 그 상처는……?”
“아, 이거? 뭐…… 그렇게 됐수다.”
곽상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어떤 죽일 놈이 감히!”
“힘 빼도 되오. 이 지경으로 만든 놈 방금 황천길 보냈으니까.”
서량이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린 곽상은 깜짝 놀랐다.
초토화된 땅에 묻혀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저놈은……?”
“야수궁주.”
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무공으로 저런 흔적을 낸 것도 믿기 어려웠지만, 그곳에 파묻힌 사람의 정체가 그들을 경악게 했다.
‘남왕(南王)을 이겼다고?!’
남만의 제왕 야수궁주는 그 무위가 조화지경에 달했다고 알려졌다. 그런 고수를 삼공자가 죽였다면, 그의 무공 역시 극마에 도달했다고 봐야 한다.
곽상이 서량을 돌아보았다.
피로가 극에 달한 얼굴, 하지만 두 눈만큼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싹!
곽상은 저도 모르게 팔뚝을 쓸었다.
‘진짜다!’
일체의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왜 지금에야 알았는지 의아할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이었다.
‘삼공자는 정말로 극마를 깨우친 것이야.’
곽상은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의 나이 올해 쉰여섯이었다. 평생 무도(武道)에 매진했지만 아직 극마의 발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한데 자신의 반밖에 안 산 삼공자가 극마를 깨우쳐 남만의 절대강자를 쓰러트린 것이다.
‘괴물이 따로 없구나.’
그가 힐끔 호왕을 바라보았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커다란 호랑이가 연신 크르릉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 큰 범은 야수궁주가 키운다는 호왕밖에 없다.’
곽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마인 대 마인으로서 존경심이 들었던 것이다.
“대공(大功)을 경하드립니다.”
서량이 손을 저었다.
“됐소. 일단 이쪽 일은 얼추 마무리됐으니까 속히 광마대부터 호출해 주시오. 괜히 이상한 데로 빠지지 말라고.”
“광마대에는 또 다른 마장이 붙었습니다.”
“아, 그랬었지? 이거 참 정신이 하나도 없군. 세 번째였나, 네 번째였나?”
“사(四) 마장입니다. 무공도 믿을 만하지만 전략전술에 특히 뛰어난 사람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광마대를 쥐고 흔들려면 골치 좀 썩겠군.”
곽상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
뭘까, 이 섬뜩하면서도 기괴한 기분은?
곽상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파아아아아…….
마치 시간이 느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흙더미 부서지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곽상의 눈이 커졌다.
파아앙!
일순간 시야에서 놓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한 사람, 아니 한 짐승이 있었다.
왼쪽 팔을 잃은 피투성이 짐승이 봉두난발이 된 백발을 휘날리며 돌진해 왔다. 황금빛 안광을 뿜어내는 짐승의 돌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빠르…….’
사고의 속도마저 앞지르는 극속(極速)의 움직임.
포효하듯 입을 쩍 벌리며 날아온 천호가 서량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굵직한 손가락이 단숨에 서량의 목을 뜯어낼 듯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바로 그때, 서량의 옆에서 또 다른 황금빛 광채가 폭발했다.
* * *
“그랬군.”
느릿하게 술잔을 돌리는 이천상.
무심하고도 나른한 얼굴에 한 줄기 흥미가 치솟는다.
“해서 결과는?”
“야수궁의 세 지파는 당가의 암기와 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당가 역시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때 사 마장을 위시한 광마대가 출격하여 손쉽게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림자가 고개를 조아렸다.
“경하드리옵니다, 교주님. 이로써 남만의 골칫거리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아직은 아니지.”
“예?”
이천상이 태사의에 등을 파묻었다.
“야수궁은 수백 년 동안 명맥을 이어 온 새외의 강자일세. 우두머리가 죽고 지파의 정예 병력 몇백이 날아간 정도로 망할 집단이 아니야.”
“아, 예.”
“그래도 고무적인 성과임이 틀림없군.”
술을 비운 이천상이 빈 잔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허공을 가른 잔이 부드럽게 다탁 위에 놓였다.
“설마하니 정말로 야수궁주를 묻을 줄은 몰랐어.”
이천상의 눈매가 즐겁다는 듯 휘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녀석이야.’
차라리 협정을 맺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셋째의 성격은 알고 있지만, 빙궁의 소궁주까지 끼어든 판에 막무가내로 일을 벌이긴 어려웠을 테니까.
한데 야수궁의 수장을 죽이고 당가 놈들에게까지 큰 굴욕을 안겨 주었을 줄이야.
“당가주는?”
“사로잡긴 했지만 아직 본교로 이송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야겠지. 이미 당가의 독룡각주도 잡아들인 판에 가주까지 뇌옥에 처박으면 문제가 커져.”
개인으로 생각했을 때, 당가주 따위야 이천상의 눈엔 벌레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집단으로 생각했을 때 당가주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시대의 중심에 서진 않았지만,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선 자. 지금은 함부로 당가주를 건드릴 때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천상의 얼굴에 드물게 의문이 떠올랐다.
“셋째는 지금 어디에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