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짐승의 왕 (5)
“급보입니다!”
“잠시.”
흘러내리는 소맷자락 안에서 드러난 손엔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노인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이 정갈하고 고운 손에 들린 꽃은 신비로운 칠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음, 이놈은 안 되겠군. 어디 보자…….”
꽃을 다탁 위 물병에다 넣어 둔 노인이 다시 허리를 수그렸다.
“요놈도 아니고…… 이놈도…… 어이쿠! 저기 있었구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꽃 한 송이를 뽑아 든 노인이 해맑게 웃었다. 칠순이 넘어 보이는 나이임에도 어린아이처럼 밝은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십색지화(十色祉花)가 이걸로 벌써 세 송이째 피었군.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야.”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꽃은 열 가지나 되는 색을 입고 있었다. 심지어 시선을 옮길 때마다 그 색깔이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자연에서 날 수 없는 신비로운 외양, 인위적으로 배양한 꽃이 분명했다.
“요놈은 방장에게 보내면 되겠군. 근래 지병이 악화되어 오늘내일한다던데 힘 좀 냈으면 좋겠어.”
미리 준비한 젖은 면포로 꽃을 감싼 노인이 허리를 두들겼다.
“나이를 먹으니 꽃밭 가꾸는 것도 힘들구먼. 나도 이제 갈 때가 되었는가.”
혼잣말을 잘도 중얼거린다. 옆에 사람이 있음에도 전혀 눈치를 보지 않았다.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찻잔을 든 노인이 그제야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남왕이 죽었습니다.”
“호오?”
“보름 전에 운남 애뇌산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흉수는 마교 측 인사로 예상됩니다.”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것참 곤란하군. 그 거친 잡초가 지금 뽑혀서는 아니 되거늘.”
야수궁주의 죽음, 거기에 마교란 말을 들었음에도 딱히 동요하지 않는다. 옆 동네 어린아이들끼리 싸웠다는 말을 들어도 이렇게 여유롭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애뇌산이라?”
“예.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사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야수궁이 애뇌산에 데리고 갔던 정예 병력과 당가 측 병력이 부딪쳤다고 합니다.”
“음?”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법 흥미가 동하는 표정이었다.
“당가와 부딪쳤다고?”
“……그렇습니다.”
“잡초와 독초가 뒤엉켰다…… 나 몰래 손을 잡고 있다는 거야 알고 있었네만. 갑작스레 틀어지기라도 한 건가.”
“현재로서는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당가의 폭우이화침과 칠보단혼산(七步斷魂散), 추왕표와 당가철전(唐家鐵箭)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노인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추왕과 철전은 그렇다 쳐도 폭우와 칠보라…… 가주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으면 쓸 수 없는 물건이거늘.”
“…….”
“마교 측 인사라고 예상된다?”
“그렇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측이 애뇌산에서 접선한다는 정보가 마교 측에 들어간 모양이군. 그래서 마교의 공격을 받은 게야. 애뇌산은 마교에게도 중요한 곳이니까.”
“…….”
“다만 의문인 것은 정작 연수한 야수궁과 당가가 싸웠다는 것인데.”
노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이었다.
“거기까지야 알 바 아니로군. 중요하지도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노인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입을 연 것은 반 각이 지난 후였다.
“당가주는?”
“그것이…….”
사내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당가에서 정보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습니다만…… 운남 인근에서 당가주를 보았다는 증언이 몇몇 올라오고 있습니다. 확실한 정보가 아니라 말씀드리진 않았습니다만.”
“역시 그렇군.”
사내가 의아한 듯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피식 웃었다.
“당전, 그 녀석은 분명 흔치 않은 무공의 소유자지만 다른 가주들보다는 수준이 떨어져. 녀석이 가주가 된 것은 순전히 혈통과 잔머리 덕분이었지. 그래서 가내에 반대파도 많아.”
“…….”
“반대파를 숙청하기에는 명분도, 힘도 약해. 그런 놈에게 애뇌산에서 공급되는 독초들은 무척이나 매혹적일 테지.”
“아…….”
“애뇌산은 양측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곳이야. 놈이 직접 갔을 확률이 높네. 하지만 당가에서 정보를 막고 있다면, 십중팔구 죽었거나 실종이 되었을 걸세.”
노인이 찻잔을 흔들었다. 찰랑거리던 식은 찻물이 조금씩 끓어올랐다.
“이로써 당가에도 풍운이 일겠군.”
대단한 통찰력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몇 가지 정보만 갖고도 사건을 거의 정확하게 유추해 내고 있었다. 그만큼 뛰어난 안목과 넓은 시야를 가졌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사내는 내심 의아했다. 마교보다 당가에 더 신경을 쓰는 노인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반대파의 수장이 누구였지?”
“아, 당양화입니다.”
“그이에게 연락하게. 한번 보자고.”
여유와 인자함으로 가득했던 노인의 눈에 언뜻 탐욕이 일렁였다. 수십 년간 노인을 모신 사내조차 순간 등골이 섬뜩할 정도로 지독한 탐욕이었다.
“제멋대로 날뛰던 망아지 주둥이에 슬슬 고삐를 둘러 줄 때가 되었어.”
“알겠습니다. 한데 마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놔둬야지 별수 있나.”
“…….”
“마음만 먹으면 전쟁을 벌이는 거야 어렵지 않네. 하지만 전쟁을 벌이면 우리도 무사하지 못해. 아직 새외에서 끌어들인 떨거지들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상황에서 모험을 하고 싶진 않네.”
“예에.”
“놈들은 자연재해야. 싸워 이겨야 할 적으로 생각해선 안 되네. 적어도 지금은 말이지.”
노인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유로운 그의 얼굴에 은근한 아쉬움이 깃들었다.
“그놈이 도망치지만 않았다면…… 한번 해볼 만도 했을 터인데.”
* * *
으드득.
여강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열심히 사슴을 씹어 대는 금호를 응시했다.
“이것 참.”
애뇌산 인근에서 잡아 온 사슴은 그 크기가 거의 황소만 했다. 그런 사슴을 목만 남기고 거의 다 먹어 치우다니, 정말이지 놀라운 식성이었다.
“먹성 한번 기가 막히는군. 하기야 영물이라 하니.”
금호가 여강휘를 힐끔거렸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다. 여강휘가 헛기침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미안하군. 먹던 거 먹게, 친구.”
으드득! 쩝쩝.
“뼈까지…….”
홀린 듯 금호의 식사를 바라보던 여강휘가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위홍련이 있었다.
그녀가 입맛을 쩍 다셨다.
“저거 옛날에 봤을 때보다 훨씬 커졌네. 이제는 어지간한 범보다 더 크구먼.”
여강휘가 미소를 지었다.
“오셨습니까.”
“아, 예.”
위홍련이 건성으로 인사했다. 북해빙궁의 작은 주인이라 해서 눈치 볼 그녀가 아니지만, 공자님의 손님이라 하니 별수 없었다.
“더 쉬시지 않고요.”
“한 게 있어야 쉬지요. 게다가 이런 곳에서는 잠도 잘 안 와요.”
애뇌산에서의 일이 마무리된 후, 일행은 애뇌산의 동쪽 끝자락의 커다란 동굴에 잠시 머무르고 있었다.
사 마장 장추는 애뇌산의 지리를 잘 꿰뚫고 있었다. 천수곡에서 보낸 영초를 호위하는 임무를 수십 번이나 맡아 봤기 때문이다. 이 동굴은 그런 장추가 추천한 휴식 공간이었다.
문제는 동굴이 아무리 커도 수백 명의 사람을 수용할 만큼 공간이 넉넉하진 않다는 것이었다.
결국 진마대와 칠마장은 신교로 귀환했고, 사 마장과 광마대만 이곳에 남아 서량을 호위했다.
위홍련이 툴툴거렸다.
“언제쯤 내려가려나.”
“삼공자의 상세가 좀 더 괜찮아지면 내려가겠지요.”
서량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싸움으로 입은 내상도 내상이지만, 무너진 절벽을 뚫고 나올 때 입은 내외상이 워낙에 컸다. 긴박한 상황이라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상처가 싸움이 끝난 직후 문제를 일으켰다.
천만다행이라면 서량의 이룬 경지가 워낙 지고하였고, 회복력도 여타 마인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 있었을 것이다.
위홍련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여강휘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왜 그러십니까?”
“벅차서요.”
“벅차다니요?”
“삼공자님이요.”
“아…….”
“마지막에 헤어졌을 때만 해도 칠가의 가주급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괴물이 되셨잖아요. 안 그래도 쫓아가려다 가랑이 찢어질 판이었는데, 지금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날아오르셨다고요.”
“그, 그렇군요.”
“언제나 제대로 한 칼 날려 줄 날이 오려나.”
“예?”
“아,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제대로 한번 붙어 볼 날이 올까 싶어서 그런 거니까. 그래도 전투 부대 대장씩이나 됐는데 남들한테 뒤처지면 안 되잖아요.”
여강휘는 내심 놀랐다.
서량의 성격상 아랫사람들하고도 격의 없이 지내는 게 이상하진 않았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두고 저런 생각을 하긴 쉽지 않았다.
“위 대주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요.”
“뭐가요.”
“뭐, 여러 가지로요.”
“제가 볼 땐 소궁주님이 더 대단한데요?”
“예?”
“어쩌다가 삼공자님하고 손을 잡으셨대요?”
여강휘가 멋쩍게 웃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삼공자는 현재 신교에서 가장 큰 풍운을 몰고 온 사람 아닙니까. 양측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위홍련이 콧방귀를 뀌었다.
“잡아먹히지나 마세요.”
“예?”
“우리 공자님, 제법 사람 좋아 보이지만 수틀리면 물불 안 가리는 사람입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마신궁도 불태울 인간이에요. 거기에 휩쓸리면 뼈도 못 추릴걸요.”
세상에, 이 여자 정말 신교의 마인 맞나?
사내보다 더 사내 같은 말투는 차치하고서라도 화통함이 장난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교주의 제자인데 타인, 그것도 외부인 앞에서 대놓고 저런 평가를 내리다니.
“커험, 명심하겠습니다.”
“뭐, 딱히 명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일 터지면 막을 수도 없을 테니까.”
“…….”
“아 참, 내 정신 좀 봐.”
위홍련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꼬질꼬질 때가 탄 서신은 무척이나 더러워 보였다.
“이거요.”
여강휘가 떨떠름하게 서신을 받아들었다.
“이게 뭡니까?”
“먹을 것 구하러 내려갔다가 받았어요. 소궁주의 동생한테서 온 서신인데, 내용이 길어서 그냥 적어 달라고 했지요.”
동생에게서 온 서신이라니 무척이나 반갑다. 하지만 그 전에 의문이 들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서신이 이렇게까지 더러워졌을까.
“여하간 전해 드렸으니 전 이만 쉬러 갑니다.”
“예. 쉬십시오.”
그때였다.
크릉.
금호가 나직한 울음을 터트렸다. 자세를 낮추고 눈을 치켜뜨는데, 그 모습이 엄청 살벌해 보였다.
위홍련이 인상을 찡그렸다.
“저거 또 왜 저래?”
스르륵.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거대한 괴수가 수풀을 헤치고 나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 크고 무거운 몸을 갖고도 고수인 두 사람이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은밀했다.
위홍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괴수는 또 뭐다냐?”
사아아악.
여강휘의 몸에서 한기가 뿜어졌다. 그의 눈빛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물러서십시오.”
“엥?”
“호왕이라는 괴물입니다. 야수궁주가 키우던 호랑이지요.”
치이이이익.
위홍련의 몸에서도 마기가 치솟았다.
“뭐야? 지 주인 작살냈다고 복수라도 하러 온 건가?”
사박. 사박.
금호가 두 사람 앞을 막아섰다.
호왕이 콧잔등을 잔뜩 찡그렸다.
으르릉.
금호를 노려보는 호왕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전신에서 뿜어지는 살기에 여강휘와 위홍련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번쩍! 번쩍!
호왕을 마주 노려보는 금호의 눈빛이 오색으로 물들었다. 당장이라도 호왕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뜬금없이 벌어진 야수들 간의 신경전.
그때, 한쪽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호왕이 고개를 돌렸다.
묵왕검을 어깨에 걸친 마동필이 담담하게 말했다.
“공자님이 부르신다. 이리로 와. 금호도.”
두 야수가 다시 서로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도 잠시, 신기하게도 두 짐승이 마동필 쪽으로 걸어갔다.
위홍련의 눈이 황소처럼 툭 불거졌다.
“……사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