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비인외도(非人外道) (2)
삼공자를 보러 왔다.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하오문의 소문주 정도 되는 사람이 그냥 얼굴이나 보자고 오진 않았을 것이다.
“날 보러 왔다…… 이거 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는군.”
서량이 상체를 앞으로 수그렸다. 적극적인 대화를 시작하고 싶은 자세였다.
“이왕 이리된 김에, 허심탄회한 대화의 장을 만들어 볼까? 당가주 문제는 잠시 제쳐 두고 말이지.”
“좋습니다.”
서량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공야치의 눈이 깊어졌다.
가부좌를 튼 채로 오른손을 무릎에 얹고 상체를 수그렸다. 흥미롭다는 듯 왼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는 자세에서 은은한 위엄이 엿보였다.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서량이란 마인의 분위기 자체가 남들과는 다를 뿐이었다.
천하 만민을 발밑에 두려는 패왕의 위엄이 아닌, 독보천하(獨步天下)를 추구하는 절대자의 위엄에 가깝다고 할까.
공야치가 말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하오문에서 유일하게 지부를 세우지 못한 곳이 광동입니다. 광서성의 서쪽 끝에 몇 개의 지부를 숨겨 두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하면 지부라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지요.”
“들었어.”
“그리고 그 이유는, 짐작하신 대로 귀교의 신경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저희는 광서성과 광동성에도 본문의 지부를 세우고 싶습니다.”
사아아악.
마동필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서량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마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공야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마동필을 돌아보진 않았지만, 그는 크게 놀랐다.
‘굉장한 무공이다. 한낱 호위무사의 실력이 이 정도란 말인가.’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사람을 잘못 찾았군. 정히 그것을 원한다면 내가 아니라 교주님이나 총군사에게 연락을 취했어야지.”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도 나한테 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공야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서량의 미소가 짙어졌다.
“힘을 써 달라고 하는 거라면…….”
“의천맹.”
“음?”
“철혈성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의천맹은 확실합니다.”
“뭔 소리야?”
“삼공자는 의천맹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
공야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닙니까?”
사무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어조였다.
서량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여전히 공야치를 주시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서서히 차가워지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나?”
“저희는 중원 전역의 정보를 쥐고 흔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 천마신교에 관한 정보는 한 줌이나 될까 싶은 정도지요.”
“…….”
“그리고 그 대부분이 삼공자에 대한 정보입니다.”
마동필의 엄지가 움직였다.
철컥.
묵왕검의 시커먼 검신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수틀리면 일검에 베어 버리겠다는 의도였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
“지난 일 년간 삼공자는 중원에 노출이 제법 많이 되었습니다. 삼십여 년 전부터 강호사에 잘 간섭하지 않았던 천마신교의 위치를 생각하면 이례적이라 할 만큼 높은 빈도였지요.”
“그런가?”
“삼공자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호남과 강서 인근, 야수궁의 한 지파와 부딪쳤을 때입니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그랬지.”
어떻게든 신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때다. 환희원주 소연심에게 부탁하여 몰래 수송대에 끼어 이동했던 때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삼공자는 의천맹의 대장로 정일룡을 죽였습니다.”
놀랍군.
서량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걸 알고 있었나?”
“그렇습니다.”
마인들을 급파하여 전투의 흔적까지 몽땅 지웠다. 당연히 그 인근에 민간인이나 무림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한데도 하오문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들의 정보력이 대체 어느 정도인 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교로 돌아간 삼공자는 그다음, 특수감찰사 신분으로 호남에 왔습니다. 감찰 대상인 마도칠가를 둘러보기 위해서였지요.”
“그랬지.”
마도칠가의 대부분이 호남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신교의 본진은 광동과 광서에 있었다.
호남 역시 마도 무림에서 꽉 잡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신교가 가지는 위압감은 다소 떨어졌다. 호남에 하오문의 지부들이 많은 이유였다.
“그곳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 본 문주님의 평가입니다. 신교의 후계자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지만, 삼공자는 십중팔구 후계 싸움의 핵(核)이 될 만한 인사라고 말씀하셨지요.”
“거 영광이구먼.”
“그리고 그곳에서 검궁과 부딪쳤지요. 나아가 얼마 전에는 야수궁과도 다시 부딪쳤습니다.”
서량은 말이 없었다.
“짐작하고 계실는지 모르겠지만 야수궁과 검궁, 그리고 천룡궁은 의천맹과 손을 잡고 있습니다. 삼공자는 의천맹과 연수한 두 궁의 중원 진출을 막아 버린 셈이지요.”
의천맹과 삼궁이 손을 잡았다.
그 사실을 공야치는 확정하듯 말했다. 짐작과 확신은 그 무게감부터 다른바, 담담한 대화 속에서 그는 값어치를 따지기 힘든 정보를 건넨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정일룡입니다.”
공야치의 눈이 빛났다.
“정일룡은 비리로 점철된 자입니다. 맹주 모르게 야수궁의 후계자와 밀약까지 맺고 있었지요. 하나, 삼공자 입장에선 굳이 정일룡을 죽이려 들 필요까진 없었습니다.”
적대 세력의 대장로라서?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적대 세력의 대장로이기 때문에 부딪혀선 안 된다. 한 번의 부딪침이 무시무시한 후폭풍이 되어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중심에 섰느냐, 서지 않았느냐를 따지는 건 결과론적인 평가일 뿐이다. 상식이 있다면 애초에 둘은 부딪쳐선 안 되었다.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귀교의 수장이 시킨 일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리 생각하지?”
“무인들은 말합니다. 기(氣)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정보를 다루는 상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정보에서 오만 가지 냄새를 맡을 수 있지요.”
“확신은 아니로군.”
“하오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네는 다르다?”
“예. 그리고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지금 삼공자를 보고 확신했습니다.”
이거 재미있는데?
서량이 자세를 편히 풀었다.
“자네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는 알겠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날 통해서 광서, 광동에 지부를 세우겠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건물 하나 올리겠다는 게 아니다. 지부를 세운다는 것은 광동과 광서의 정보를 적극적으로 얻어 보겠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거래로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겐 그럴 권한이 없어. 내가 교주가 된다면 모를까.”
공야치의 눈이 빛났다.
“그렇겠지요.”
물끄러미 공야치를 바라보던 서량이 피식 웃었다.
“내가 워낙 살벌하게 살아와서 그런가? 주변에 매번 위험한 사람들만 꼬이는군.”
“…….”
“내가 교주가 되는 데에 일조하겠다는 뜻인가?”
“비슷합니다.”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지 비슷한 건 또 뭐야?”
그다음 이어진 공야치의 담담한 말에, 서량과 마동필은 경악했다.
“삼공자의 주도하에 의천맹이 사라져 버린다면 삼공자는 차기 후계자로 확정될 확률이 높아지겠지요.”
“……!”
“저는 삼공자가 교주가 되기를 바라서 온 게 아닙니다. 의천맹을 증오하는 삼공자의 그 ‘분노’가 필요해서 온 겁니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공야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확답을 들으러 온 것은 아닙니다. 떠나시기 전까지 생각해 주십시오.”
“음.”
“그리고 당가주 건은 수락하겠습니다. 저희 측에서 신병을 맡도록 하지요. 대금은 지금 이 자리에서 건방을 떤 제 목숨값으로 대신 치겠습니다.”
그날 밤.
작은 정자 옆, 연못의 돌담에 앉은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짝거리는 별빛이 무척 아름다운 밤이었다.
별을 바라보던 서량이 그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이렇게 어수선하냐.”
야수궁주를 작살내고 당가 측 병력까지 아작을 내 놨다.
애초에 야수궁주와는 당장 마주칠 필요가 없었다. 빙궁의 소궁주과 동맹을 맺고, 그 동맹의 시작으로 여동생을 구출하기 위해서 간 것뿐이다.
물론 의천맹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에 일조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도발했고, 아예 묻어 버릴 생각도 했다.
좀 거칠긴 했지만 일도 잘 마무리됐고,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 한데 느닷없이 하오문의 소문주란 놈이 찾아와 또 동맹을 맺자고 한다.
“복잡할 건 없지만 신경 쓸 일이 많이 생기는군. 이것 참, 전생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하기야 도구로만 살아왔으니까.
시키는 일만 하는 삶과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삶은 완전히 달랐다. 강호 경험도 많고 눈치도 빨라 지금까지 왔지만, 슬슬 머리가 무거워지려 한다.
‘난 그냥 그 개자식들을 몽땅 조지고 싶을 뿐인데.’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새삼스레 앓는 소리 하지 말자. 놈들 작살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잖냐.”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이렇게 알아서들 손을 내밀어 주는데.
그때, 뒤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놈들, 삼공자의 표적이 되었다는 걸 알면 잠도 잘 못 자겠군요.”
서량이 피식 웃었다.
“알면 안 되지. 대비할 게 뻔하니까.”
“대비를 하든 말든 일단 밀고 나가는 게 삼공자 아닙니까?”
“얼씨구. 일 한 번 같이 했다고 나에 대해 제법 알았다, 이거냐?”
“그냥 그렇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요.”
“기분 나쁠 게 뭐가 있어. 뒷골목 거지든 세 살배기 어린애든 누구나 평가는 할 수 있는 건데.”
“역시 삼공자는 대단합니다.”
“칭찬 고맙게 받지. 앉아.”
여강휘가 서량의 옆에 앉았다.
“동생은 좀 어때?”
“생각보다 훨씬 괜찮습니다. 기력이 조금 쇠하기는 했지만 그거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낫겠지요.”
“그래도 신경 써라. 야수궁 놈들이 건드린 건 상단전이야. 거기가 얼마나 예민하고 중요한 부위인지 알지?”
“예. 하지만 걱정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확실히 괜찮은 것 같았다. 어쩌면 빙궁의 무공에 상단전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절학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여강휘가 서량에게 술병을 건넸다.
“한 모금 하시겠습니까?”
“차갑게 만들어 놨네?”
“예. 향이 너무 세서요.”
“좋지.”
서량이 꿀꺽꿀꺽 술을 들이켰다.
“크, 독한 놈이군.”
“이름은 모르겠지만 보통 놈이 아닙니다. 저도 찔끔찔끔 마시고 있어요. 통째로 비우면 심장마비 걸릴 것 같더라고요.”
여강휘에게 술병을 건네며 서량이 물었다.
“이제 빙궁으로 가 보는 거냐?”
“그럴 생각입니다.”
“그래, 여동생한테 전해 줘라. 앞으로 괜히 기웃거리다가 납치 안 당하게 조심하라고.”
여강휘가 미소를 지었다.
“삼공자가 지켜 줄 텐데 뭐가 걱정입니까.”
“엥?”
“기억 안 나십니까? 우리의 거래 말입니다.”
“아!”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냉정한 거 아니냐? 인질로 잡혀간 거 구해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나한테 딸려 보내? 말이 좋아 동맹의 상징이지 인질하고 뭐가 달라?”
“제 여동생이 인질이 되고 말고는 삼공자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그렇긴 하다만. 네 동생은 괜찮다고 하더냐?”
“린이도 동의한 사항입니다.”
“남매 아니랄까 봐 강단 넘치는 건 오라비를 쏙 닮았군.”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다, 이놈아.”
물끄러미 서량을 바라보던 여강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량은 그를 올려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잘 가라.”
“예. 하지만 조만간 다시 뵙게 될 겁니다.”
“그래야지. 내가 후계자 되는 거 도와줘야 하잖아?”
“하하.”
여강휘가 몸을 돌렸다.
유리잠력대법에 관해서 말할까 싶었지만 관뒀다. 오늘의 서량은 왠지 모르게 지쳐 보였다.
필요하다면 녀석이 말해 주겠지.
“감사했습니다.”
“그래, 너도 앞으로 내가 감사할 일 좀 해 줘라.”
여강휘가 희미하게 웃었다.
“잊지 마십시오. 곧 보게 될 겁니다.”
그렇게 장추에 이어 여강휘도 떠났다.
서량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 이 정도면 쉴 만큼 쉬었지.”
그가 양손으로 뺨을 착 소리가 나게 때렸다.
“또 달려 봐야지!”
* * *
며칠 후.
도열한 광마대 앞으로 서량이 걸어왔다.
“배고프다. 집밥 먹으러 가자.”
남만야수궁과의 결전이 마무리된 지 정확히 삼십 일이 지난 날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