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도전생기-196화 (196/774)

196화. 불쾌한 씨앗 (2)

소연심은 할 일이 있다며 비무를 거절하곤 돌아갔다.

연무장에 앉은 서량은 생각에 잠겼다.

‘확신은 못 해. 하지만 그런 민감한 소문이 느닷없이 날 리는 없지.’

기다렸다는 듯 서량이 귀교하고 나서 터진 소문이다. 그것도 고작 하룻밤이 지나자마자.

그런 소문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 때까지는 나름의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누군가가 조장했다면 미리 준비했을 거야.’

그리고 그런 준비를 할 수 있는 사람,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신교 안에서도 딱 다섯 명뿐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후보.’

물론 그중 진관용이나 관평일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그는 다른 후계일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았다.

사람은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법이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이 느닷없이 배신하는 경우는 숱하게 봐 왔다.

‘하지만 좀 의아하군. 뭘 획책하려는지 몰라도 이런 방법은 위험 요소가 많은데.’

소문대로 서량이 채여민을 죽인다면?

신들의 싸움에 마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량을 보는 마인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못할 것이다. 살벌한 마도 무림의 총본산이라지만 그래도 채여민은 너무 어린아이였다.

홍위문에 대한 마인들의 호감도가 최하였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물증은 없지만, 그가 치졸한 전략으로 사형제들을 공략하고 있다는 걸 마인들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연심의 말마따나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새로운 시대를 열 파순의 대리자를 뽑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여론은 여론일 뿐, 판을 뒤집을 결정적인 한 수는 되지 못한다.

‘나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되겠지. 하지만 그게 전부야. 반면 이 소문을 흘린 당사자의 정체가 까발려지게 되면?’

인간의 잣대를 대지 않는 데에도 정도가 있는 법, 그때 불어닥칠 역풍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후계자의 자질 논란이 일진 않겠지만, 대다수의 마인들이 등을 돌릴 게 분명하다.

잔학함은 수용될 수 있지만 치졸함은 수용되기 힘들다. 적어도 신(神)이 할 짓은 아닌 것이다.

서량이 어깨를 으쓱했다.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군. 고민해 봤자 답은 안 나오겠어.”

자리에서 일어난 서량은 문득 강한 햇살을 느꼈다.

“벌써 동이 텄나.”

고민을 깊게 한 모양이었다. 시간의 흐름도 잊을 정도로.

“안녕하세요.”

한옆에서 여상린이 걸어왔다. 어제와는 달리 깨끗한 백색 옷을 입은 그녀의 자태는 눈이 돌아갈 만큼 아름다웠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잤냐?”

“네.”

여상린의 얼굴은 무척이나 상쾌해 보였다. 첫날은 다소 긴장했지만 서량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난 후 평소의 발랄함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때도 야수궁주한테 쌍욕을 했었지 아마?’

워낙 긴박한 상황이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쌍놈의 새끼니, 뭐니 해 댔던 것 같다. 그런 걸 보면 이 녀석의 성깔도 보통이 아니다.

“그나저나 넌 참 하얀 걸 좋아하는구나.”

“네?”

“피부도 하얗고 옷도 하얗고. 밥도 무진장 많이 먹어 대니 앞으로 널 백반이라고 부르겠어.”

여상린이 입술을 삐죽였다.

“다른 사람들이 적게 먹는 거라고요.”

“나 한창 클 때도 너처럼은 못 먹었어. 위장 한정으로 넌 천하제일인 후보라 봐도 무방해.”

그 많은 음식이 저 호리호리한 몸의 어디로 다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녀석의 최대 장기는 돌도 소화하는 소화력일지도 모르겠다.

“아까 나오려고 했는데 중요한 얘기를 하시는 것 같아서 기다렸어요. 높으신 분인가요?”

“어, 환희원주라고 본교 살림을 담당하는 사람이야.”

“언뜻 보니 굉장히 아름다우시던데요.”

서량이 투덜거렸다.

“한 인물 하는 양반이지. 사람의 탈을 쓴 여우라서 문제지만.”

“사람한테 여우라니요.”

“고드름에 백반도 있는데 여우 정도야 뭐.”

그가 주방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밥 차려 줄 테니까.”

여상린은 당황했다.

“아, 제가 해도…….”

“손님한테 밥 차리라 할 만큼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니야, 내가.”

서량의 눈이 빛났다.

‘일단 애들부터 멕이고 움직여야겠군.’

* * *

“총군사님.”

“무슨 일인가.”

“삼공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대놓고 눈치를 줬는데 하루가 지나서야 오시는구나. 어서 모시거라.”

잠시 후, 서량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호요성이 반색하며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예.”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집무실이 이렇게나 살벌해 보이는 건 또 처음입니다.”

호요성의 집무실은 헤아릴 수 없는 문서들과 정리되지 않은 서책들이 가득 쌓여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무질서 속의 질서라고 아십니까?”

“뭔진 모르겠지만 딱히 알고 싶지도 않네요.”

“소인(小人)의 눈으로 보면 어지러워 보이겠지만 대인(大人)의 눈에는 나름 체계적으로 보일 겁니다.”

“근래 들은 헛소리 중 단연 최곱니다그려.”

“캬하하!”

호요성이 호들갑을 떨며 의자로 서량을 안내했다.

“식사는 하고 오셨지요? 차라도 한잔 드시겠습니까?”

“굴송차만 아니면 됩니다.”

“눈치가 귀신이시군요.”

“집무실에 향이 뱄어요. 대체 그 괴상한 차를 왜 마시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은근 중독성이 있는데.”

투덜거리던 호요성이 잠시 후 벽라춘을 꺼내 왔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서량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그렇게 대놓고 눈치를 주신 이유는 뭡니까?”

“어엇?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는 겁니까?”

“공사가 다망하신 총군사님의 시간을 농담 따위로 뺏을 수 있나요.”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정말 제 시간을 뺏기 싫으신 겁니까? 아니면 몸이 후끈 달아오르신 겁니까?”

서량이 씨익 웃었다.

“소문 들으셨습니까?”

“물론입죠. 아까 전, 소 원주의 마차가 공자님의 거처로 향했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정말이지 교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을 알고 계시는군요.”

“그것도 실시간으로요.”

“잘 찾아왔군요.”

호요성이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소문의 주동자가 누구인지 궁금하신 겁니까?”

“안 궁금하겠습니까, 그럼? 누굽니까?”

“무엇을 기대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요?”

“저도 중립을 지켜야 하니까요.”

서량이 피식 웃으며 손목을 돌렸다. 순식간에 집무실 내 공기가 후덥지근하게 달아올랐다.

“알고는 있다는 거군.”

호요성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당연합니다. 비각(秘閣)이 제 휘하에 있거든요. 모르기가 더 힘들지요.”

“계속 중립을 지키시겠습니까?”

“그래야지요. 그래야 하긴 하는데…….”

호요성이 서량의 손을 힐끔거렸다. 그 큼직한 손이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움켜쥘 것 같았다.

“말 안 하면 사고 치실 겁니까?”

“고민 중입니다.”

“많이 발전하셨습니다. 예전이었다면 일단 손부터 쓰셨을 텐데.”

호요성의 눈이 빛났다.

“감찰 일을 기점으로 생각을 바꾸신 모양이지요?”

확실히 눈치 하나는 귀신이다.

서량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다 집어치우고 한적한 곳에 틀어박혀 무위자연의 도(道)나 추구하려 했습니다. 그때는요.”

“지금은요?”

“다 작살내고 복잡한 이곳에서 주인 노릇이나 해 볼 생각입니다. 지금은요.”

호요성의 미소가 짙어졌다.

“의천맹을 박살 내시려고요?”

“교주님께 들었습니까?”

“그런 말을 해 주시는 분은 아니지요. 그저 돌아가는 상황과 돌변한 삼공자의 언행을 끼워 맞춰 본 것뿐입니다.”

서량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똑똑한 사람은 무섭다. 하오문의 소문주, 공야치도 그랬지만 호요성 역시 머리 쓰기로는 누구 못지않은 사람인바 서량의 목적을 약간의 정보와 상황만 갖고도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계속 입 닫고 계실 겁니까?”

“예.”

잠시 고민을 거듭하던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수 없군요.”

미소 가득하던 호요성의 얼굴에 한 줄기 긴장이 드리워졌다. 서량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간파하고 있지만, 이 폭탄 같은 사람의 끝이 어딘지는 여전히 모르고 있다.

어떻게 나올 것인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젊은 범은 어찌 움직일 것인가?

“차, 잘 마셨습니다.”

“어? 벌써 가시게요?”

“원하는 게 있어서 들렀는데 못 주겠다니 더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호요성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나 총군산데…… 나름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리는 권력잔데…….

“아직 제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습니다만.”

서량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저 바쁩니다.”

“바쁘셔도 조금만 시간을 내주시죠.”

“누가 소문을 냈는지 말해 주면 생각해 보죠.”

“무슨 거래가 그렇습니까?”

“말장난 다 끝나셨지요? 갑니다.”

그대로 일어난 서량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진짜로 갈 기세였다.

호요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혹시라도 대공자나 이공자의 처소로 가서 난장을 치실 생각이면 관두는 게 좋으실 겁니다.”

서량이 호요성을 힐끔거렸다.

이유를 묻는 눈빛에 호요성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대공자는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공자 때처럼 무턱대고 직진만 하다가는 절벽에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충고, 새겨듣지요.”

“더 들으셔야 할 겁니다.”

“나중에 듣겠습니다.”

호요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막무가내입니까? 항상 이런 식이면 언젠가 크게 탈이 나실 겁니다. 그걸 모르시는 분도 아닐 텐데요.”

물끄러미 호요성을 주시하던 서량이 느닷없이 포권을 취했다.

“친분이 깊진 않지만 호 군사에게는 항상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에?”

“앞으로도 본교를 위해 헌신해 주십시오. 호 군사가 본교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저에게도 복입니다.”

……갑자기 왜 이래?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오늘의 대화는 이것으로 마무리 짓도록 하지요. 사흘 안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제대로 된 회포는 술상과 함께 푸시지요.”

호요성이 눈썹을 찡그렸다.

‘뭐야?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지?’

갑작스러운 변화에 천하의 호요성도 말문이 턱 막혔다.

그렇게 서량이 집무실을 나갔다. 그윽한 다향과 함께 집무실에 홀로 남겨진 호요성의 얼굴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본교를 위해 헌신해? 그게 그렇게 고마울 일인가?”

사흘 안에 다시 찾아온다? 대체 왜 사흘이란 시간을 강조한 거지?

차를 마시며 생각을 가다듬으려던 호요성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찻잔을 떨어트렸다.

째애앵!

떨어진 찻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지만 호요성은 그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저 양반 저거?!”

* * *

“오, 오라버니?!”

“오랜만이구나.”

서량이 웃으며 채여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채여민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서량이 귀교했다는 걸 아직 듣지 못했던 것이다.

“언제 오셨어요?”

“어제 왔다.”

“그러셨구나.”

채여민이 빙긋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막내는 여전히 귀여웠다. 절로 볼을 잡아당겨 주고 싶을 만큼.

“운남은 어떠셨어요? 여기보다 훨씬 덥다고 들었어요.”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말도 마라. 덥기도 엄청 덥고 비도 엄청나게 오더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여민이는 모를걸?”

“우와.”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지만 아직 세상 경험이 일천한 그녀였다. 입교한 후, 한 번도 신교를 나가 본 적 없는 채여민에게 산 밑의 얘기는 어떤 것보다도 흥미로웠다.

채여민을 보며 웃던 서량이 옆을 힐끔거렸다.

그곳에는 이제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시녀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과거 채여민이 말했던 소당이라는 시녀가 바로 그녀인 것 같았다.

“여민이 혹시 바쁘냐?”

“네? 아, 아뇨! 오전 수련은 끝났어요! 안 바빠요!”

“그래? 그럼 이 오라비와 마실이나 나가련?”

채여민의 얼굴이 밝아졌다.

“네! 네!”

소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급했던 것일까? 불쑥 한 걸음 앞으로 나온 그녀가 고개를 조아렸다.

“공녀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오후에는 제왕학을…….”

“이봐.”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제왕학 하루 안 배운다고 뭐가 어떻게 되나? 아직 어린애를 왜 그렇게 쥐 잡듯 잡아?”

“죄송한 말씀이지만 공녀님의 일과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무리 삼공자님이라도 관여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법 당찬 어조였다.

서량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깊은 걱정과 날 선 긴장을 느꼈다.

‘소문을 들었군.’

그냥 참고 들어 주기에는 말투가 다소 거슬렸지만, 동시에 그녀가 채여민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나는 지금 여민이 교육에 관여하는 게 아니야.”

“하면 이만…….”

“그러니 너도 관여하지 마라, 사형제들 간의 대화에.”

“네?”

“윗사람들 대화에 끼어드는 버릇은 어디서 배워 먹은 버릇이야? 환희원주가 그렇게 가르치던가?”

소당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지금 공녀님은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이었다.

“저는 그저…….”

“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야. 동필이도 가끔 선을 넘기도 하니까.”

서량이 채여민에게 말했다.

“적당히 산책하다가 큰형이나 한번 보러 갈까?”

“큰 오라버니요?”

“그래.”

채여민의 미소가 더욱 밝아졌다.

“좋아요!”

서량이 소당을 보며 씩 웃었다.

“제왕학을 책 따위로 배워서야 쓰겠나?”

“……!”

“걱정되면 너도 따라와라. 앞으로 여민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직접 보고 느끼도록 해.”

“네, 네?!”

막을 새도 없었다. 어느새 서량이 채여민을 들어 올려 품에 안고 있었다. 마치 조카를 안는 것 같았다.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인생은 실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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