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불쾌한 씨앗 (3)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나.”
“나도 그렇게는 생각하는데…… 어쨌든 교주님께서 올해 후계를 확정한다고 하시잖아. 마음 급해질 만도 해.”
“교주님께서 후계를 확정하신다는 것도 소문이잖아? 확실한 정보가 아니라.”
“뭐, 그렇게 말하면 나도 할 말은 없지만.”
“다 뜬소문이야. 설령 그렇다 해도 삼공자님처럼 호탕하신 분이 설마 그 어린 칠공녀님을 제물 삼겠어?”
“그거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말 잘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는데 아무도 모를 일을 주절대는 것 따위 무의미해.”
“명언인데?”
“웃기고 있다.”
“근데 말이야, 그 소문이 아주 신빙성 없는 소문은 또 아닌 것 같던데?”
“엉?”
“삼공자님이 귀교하시기 전에 다른 후보분들이 죄다 마신궁으로 불려 가신 거 알아?”
“그랬었어?”
“역시 모르고 있었군. 칠 조 애들한테 들었는데, 그때 마신궁에서 나오는 후보분들 얼굴이 심각했다고 하더군.”
“음…….”
“어쨌거나 시국이 다소 어수선해지겠어. 큰일은 없었으면 좋으련만.”
한참 떨어진 거리지만 감각을 곤두세운 서량의 귀에는 두 마인의 대화가 똑똑히 들려왔다.
‘역시 다 퍼졌군.’
때론 소문이 진실보다 무섭다.
사람의 성격이란 게 참 간사해서, 진실을 두고는 명확한 찬반을 갈라 물어뜯지만 소문은 한없이 부풀리길 좋아한다. 옆 동네 문파 문주가 공식 석상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실종됐느니, 급사했느니 별의별 소리가 다 나오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소문이 ‘의혹’에서 멈추지 않고 ‘광신’으로 접어들면 심각한 문제가 된다.
‘여론은 분명 큰 무기지만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한 수가 되진 못해. 소문을 조장한 놈도 그걸 알고 있을 거다.’
그렇다면 이런 소문을 유포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이로군.’
어린아이를 제물 삼아 후계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쥐겠다?
그럴 생각이 있든 없든 밖을 함부로 나다닐 수가 없다. 소문이 사실이란 인상을 여론에 보여 주지 않기 위해 애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문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도 문제다.
평소처럼 밖으로 나다니면 그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될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론은 강력한 통제 수단인바, 결국 당사자만 피해를 보는 것이다.
입소문 하나로 사람의 손발을 간단히 묶을 수 있다. 허상과 거짓이 가진 힘이었다.
서량이 채여민에게 말했다.
“혹시 들었니?”
“네? 뭘요?”
“사람들이 그러더구나. 내가 여민이를 해칠 거라고.”
채여민의 말간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요?”
“그런 소문이 돌더라고.”
“오라버니가 절 해치실 리 없잖아요?”
몇 번 본 적 없지만, 이미 채여민에게 서량은 은인으로 콱 박혀 있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그런데 왜 그런 소문이 났을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게다가 그 소문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도 많더구나.”
채여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바보들이에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구나. 바보들이구나.”
“네, 다 바보들이에요. 우리 사정도 모르면서.”
두 사람의 뒤를 따라오던 소당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모시는 분이 바보라고 한 사람의 명단에 자신도 올라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는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만에 하나를 염두에 두어야 해.’
이래서 지키는 사람은 힘들다. 명백한 진실도 진실로 보지 못한다. 설령 서량이 채여민과 혈육 관계라도 의심부터 하고 봤을 것이다.
“근데 오라버니.”
“음?”
채여민의 눈이 반짝였다.
“조금 전에 했던 얘기 또 해 주세요.”
“아, 야수궁?”
“네! 그렇게 동물이 많나요?”
동물이라.
맞는 말이다. 맹수도 동물이니까.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까지 많이 보진 못했어. 하지만 그중 한 마리와는 나름 친분을 쌓아 뒀지. 나중에 보여 주마.”
“정말요?”
채여민이 반색했다. 만날 무공 익히랴, 공부하랴 딱딱한 생활만 했던 그녀에게 서량이란 존재는 단순한 은인 이상이었다.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대신 조심해야 해. 성깔이 보통이 아니라서 말이야. 뭣하면 내가 꿀밤 먹여 주마.”
천마벽력권으로다가.
기대된다며 꺄르륵 웃던 채여민이 손뼉을 쳤다.
“아! 그리고요.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어요.”
“음? 뭔데?”
“오라버니, 혹시 후계자가 되려 하시나요?”
순간 소당의 눈이 흔들렸다.
“고, 공녀님!”
“응?”
“그런 말씀은…….”
서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지. 난 반드시 후계자가 되려고 한다.”
“그래요?”
“응. 꿈이 있거든.”
“어떤 꿈인데요?”
“여민이한테 들려주기는 좀 무서운 꿈이지. 어찌 되었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차기 후계자가 되는 게 편해.”
채여민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어떤 꿈인지 알려 주세요.”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던 서량이 멋쩍은 듯 말했다.
“의천맹을 작살내 버리려고.”
소당이 입을 쩍 벌렸다. 저게 지금 어린 여아한테 할 말인가.
채여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천맹을 왜 작살내려고 하세요?”
“글쎄다? 설명하기 복잡한데…… 어쨌든 나쁜 놈들이야.”
“나쁜 놈들은 우리 아니에요?”
서량이 비난 어린 눈빛으로 소당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애한테 무슨 소리를 했길래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 사람은 애와 대화해 본 적 없는 바보였고, 한 사람은 뼛속까지 마인이었다. 결국 서량이나 소당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적어도 나한테는 의천맹 놈들이 최고로 나빠.”
“그런가요?”
“응. 철천지원수라고나 할까.”
채여민이 인상을 찡그리며 검지로 턱을 문질렀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서량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후계자가 되면 의천맹을 혼내 줄 수 없는 거예요?”
“혼내 줄 수는 있지. 하지만 나만큼은 아닐 거야.”
“그렇군요.”
잠시 고민하던 채여민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는 후계자 안 될래요.”
소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녀님!”
“왜?”
“그,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돼?”
“교주님의 제자 된 몸으로 어찌 그리 나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분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응당 최선의 노력을 다해 봐야 옳습니다!”
“오라버니도 사부님 제자잖아?”
“그렇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소당은 말문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서량도 서량대로 놀랐다.
“후계자가 안 되겠다고? 되기 싫니?”
“되고 싶어요.”
“그런데 왜 포기하려고 그래? 내가 되고 싶다니까 그냥 포기하는 거야?”
“그렇기도 하고요, 우우움…….”
채여민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소당을 위해서는 되고 싶어요. 하지만 제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서량은 그녀의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이뤄 주고 싶긴 하지만 너의 꿈은 아니란 말이로구나.”
“네에.”
서량의 얼굴에 측은함이 맺혔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힘든 생활을 했군.’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가 입교해서 철저히 통제된 생활을 했다. 한참 뛰어놀고 싶을 나이에 힘든 무공을 익히고,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공부를 해야 한다.
오로지 최고가 되기 위해서.
수많은 무림 명가의 자제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 다음 세대 무림을 책임진다. 아마 서량도 그런 과정을 밟아 왔다면 헛소리 말고 열심히 하라며 호통을 쳤을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삶이란 무척이나 끔찍한 것이지.’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여민이 몫까지 이 오라비가 열심히 뛰어 보마.”
“네! 응원할게요!”
“고맙다.”
소당이 깜짝 놀라 외쳤다.
“안 됩니다! 공녀님, 후계 싸움이란……!”
“어이.”
서량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자꾸 끼어들래?”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공녀님의…….”
“시녀잖아.”
“……!”
“네 기대에 여민이가 맞춰 줘야 되냐? 네가 뭔데? 네 입맛대로 여민이를 맞추려 들지 말고, 여민이가 한 명의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게 열심히 보조나 해 줘.”
“저, 저는 제 기대에 맞추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꾸 말 끊어서 미안한데, 네 말은 굳이 듣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해 두겠는데.”
서량의 눈에 은은한 마기가 일었다.
소당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무시무시한 공포가 엄습했다.
“여민이는 어리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아니야.”
서량이 채여민을 보며 물었다.
“그렇지?”
“네. 그렇긴 한데…….”
채여민이 서량의 옷깃을 살짝 쥐었다.
“싸우지 마세요.”
“어? 아, 싸우는 거 아냐. 그냥 대화지, 대화.”
애초에 싸움이 되어야 말이지.
“여하간 가자. 이제 대로네.”
널찍한 거리가 나오자 주변의 시선이 세 사람에게로 확 몰려들었다.
눈을 마주친 모두가 고개를 조아렸다. 서량은 일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인사해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서량은 자신을 향한 시선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것을 느꼈다.
‘소문의 확산이 생각 이상으로 빨라. 역시나 뒤에서 조장한 자가 있어.’
이제는 확신한다. 아니, 그냥 뜬소문이었대도 그리 믿고 움직여야 한다.
‘이런 뜬금없는 소문 따위, 한 방에 잠재우는 방법이 있지.’
생각과는 달리 서량은 연신 채여민과 조잘대며 이동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많이 어색했는데, 마음을 열고 친근하게 다가가니 대화에 별달리 어려움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삶의 목표를 명확히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천마신교를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 깨달은 지금의 그는 무엇에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일각이 지나, 세 사람은 진관용의 처소 앞까지 도착했다.
놀랍게도 세 사람을 슬금슬금 따라온 이들이 은근히 많았다. 무척이나 예의가 없는 짓이지만 마인들은 소문 속의 서량이 얼마나 화통한 성격인지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런 거로 문제 삼을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서량은 그들의 믿음을 충족시켜 주었다. 불쾌하지도 않거니와, 불쾌하다 해도 지금은 그들을 붙잡아 둬야 했다.
“호오, 과연 대공자의 거처는 뭐가 달라도 다르군.”
화려한 대문 앞, 수문위사가 번을 서고 있었다. 다른 제자들의 거처와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줄곧 안아 들고 있던 채여민을 내려 주고 난 후, 서량이 말했다.
“삼공자와 칠공녀가 찾아왔다고 전해라. 못다 한 차나 한잔하자고 전하면 알 거다.”
수문위사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문을 열고 들어간 수문위사는 반 각 만에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엉?”
“……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이 집에 들어가려고 찾아온 게 아니야.”
“무, 무슨 말씀이신지…….”
“말했잖아, 차 한잔하자고. 하지만 여기서는 마시고 싶지 않아.”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되지도 않는 소문을 조장한 사람 집에 들어갔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으면 자네가 책임질 텐가?”
“……!”
“다시 전하게. 예서 기다릴 테니까 후딱 나오라고. 자미루로 가자고 전해.”
모두의 시선이 서량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은 서량의 시건방에 가까운 화통함보다 소문을 조장했다는 말에 정신을 빼앗겼다.
서량의 얼굴에 나른함이 번졌다.
“아, 넷째 거처 꼴 나고 싶지 않으면 일각 안에 나오라는 말도 꼭 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