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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199화 (199/774)

199화. 불쾌한 씨앗 (5)

콰르릉!

아침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에 어느 순간 먹구름이 끼었다.

먹구름이 하늘을 지배하는 속도가 몹시 빨랐다. 본격적인 가을을 알리려는 것일까? 두꺼운 구름 속에서 얇지만 번뜩이는 빛이 보였다.

잠시 후.

쏴아아아아!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끝없이 펼쳐진 십만대산을 몽땅 적실 기세였다.

찰박찰박.

젖은 땅을 밟는 발걸음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끼이이익.

“어서 오…… 헉?!”

점소이와 마인들이 놀라서 무릎을 꿇었다.

“신교불패! 만마앙복!”

“조용.”

“……!”

“어디에 있지?”

의미를 알기 힘든 물음이었지만 용케 그 뜻을 이해했는지 점소이가 계단 위를 가리켰다.

남자가 풍기는 분위기가 워낙 무겁고 강렬했던 걸까? 그의 손가락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끼익. 끼익.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왠지 모르게 소름 끼쳤다.

그렇게 한 남자가 자미루의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 * *

진관용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네가 참으로 무서운 말을 하는구나.”

“무섭다?”

“결국 그것이 목적이었느냐?”

“그럼 너와 나 사이에 달리 할 말이라도 있는 줄 알았나?”

깍지 낀 손을 탁자 위에 올려 둔 서량이 웃으며 말했다.

“귀교하고 나서 나와 이곳을 오려고 했었지. 그때 네가 짓던 미소를 난 아직도 잊지 못해. 넌 분명 그때 날 죽이려 했었어.”

“…….”

“이곳에다가 뭔 짓을 해 놨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넌 분명 자신에 차 있었다. 극마에 오른 고수를 죽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어. 넌 너 자신을 믿고 있지만 싸움에 변수가 많다는 걸 모를 만큼 바보도 아닌 것 같은데, 어찌 그리 확신할 수 있었을까?”

진관용은 말이 없었다.

여전히 진관용을 주시하며, 서량이 채여민에게 턱짓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괴상한 소문이 나더군. 내가 여민이를 후계 싸움의 제물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 말이다.”

“…….”

“네가 아닐 수도 있어. 어쩌면 널 따르는 마인들의 과잉 충성일 수도 있고, 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상황이 너무 기묘하지 않은가.”

“기묘하다?”

“기묘하지. 그런 소문을 퍼트릴 거였다면 내가 없을 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불을 지피는 게 좋지 않았을까? 자연스럽게 난 소문인 것처럼, 그 소문의 출처가 흐려지도록 시간을 들이는 게 훨씬 낫지.”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조장했다…… 오히려 들키고 싶어서 환장한 것처럼 보이는데.”

소문에 휩쓸려 행동에 제약이 온다?

그럼 그것대로 좋은 일이고, 나아가 소문이 ‘진실’인 것처럼 조장되어도 좋을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미미한 이득일 뿐이다. 적을 공략하는 데 나름의 타격을 줄 순 있지만, 결정적인 공격이 될 수는 없다. 마치 여론의 시선처럼.

결국, 소문을 이용해 서량을 자극한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다.

“내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군.”

“…….”

“나는 잡스러운 짓거리를 혐오해. 그냥 대놓고 박살 내자는 주의지. 나를 자세히 조사한 너는, 내가 홍위문 때처럼 난장을 부릴 걸 알고 있었어.”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내 발로 너를 찾아오게 만들고 싶었던 거 아냐?”

진관용은 생각했다.

‘무서운 녀석이로군.’

이놈은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사소한 쟁점거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을 때, 겉이 아니라 속을 들여다보는 놈이다.

사태의 근본, 본질을 파악하는 눈.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이보다 무서운 능력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진관용은 이와 흡사한, 그러나 훨씬 고차원적인 안목의 소유자를 알고 있었다.

‘사부.’

삼라만상을 꿰뚫어 보는 마신의 신안(神眼).

감히 그에 비할 순 없지만, 만일 이놈이 성장한다면 사부가 가진 안목의 발치에나마 이를 수 있지 않을까.

‘대체 어떤 경험을 토대로 여기까지 성장한 것인가.’

이러한 본능은 절대 타고날 수가 없다. 셀 수 없는 아수라장을 겪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경험의 소산이다.

서량이 시시하다는 듯 의자에 등을 묻었다.

“결국 지금까지 네놈이 보여 주던 언행은 다 거짓된 것이었군.”

물끄러미 서량을 바라보던 진관용이 담담하게 말했다.

“거짓된 모습을 보여 주면 안 되나?”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진관용 역시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안 될 건 없지. 들키고도 잡아떼는 것처럼 추한 짓은 없지만. 그런 면에서 넌 최악은 아니야.”

“고마운 평가로군.”

더 이상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의자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치고 다리를 꼰 그의 모습은 교만하면서도 자유분방해 보였다.

진관용이 눈살을 찌푸렸다.

“넌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녀석이다. 짓누르기가 쉽지 않아. 너의 행동 양상을 분석했지만, 그것은 일부분일 뿐이야. 결정적인 순간에 네가 어디로 튈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런가?”

“그렇다. 장담컨대, 지금 내 무공은 너를 앞서 있다. 하지만 막상 싸우게 된다 생각하면 결과가 보이지 않아.”

서슴없이 자신의 무공이 한 수 위라 말한다. 그럼에도 너와의 싸움에서 완벽한 승리를 자신할 순 없다고 말하고 있다.

‘까다로운 놈이야.’

의뭉스럽고 오만한 놈이다. 하지만 와중에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눈도 갖고 있다.

이런 놈들은 상대하기가 생각 이상으로 까다롭다. 보통 사람들과 사고의 방식도, 상황 대처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진관용은 서량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라 평가했지만, 서량 역시 진관용의 한계를 알지 못했다.

‘결국 그 한계는 직접 부딪쳐서 알아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지.’

진관용이 채여민을 힐끔거렸다.

“네가 그 소문을 접했을 때 어찌 행동할지 생각해 봤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지. 너라면 분명 나한테 올 줄 알았다. 다만 그 많은 마인들을 구경꾼으로 끌고 올 줄은 몰랐지만.”

“그랬군.”

“하지만 거기까지도 괜찮았다. 널 내 거처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곧바로 행동에 나설 생각이었다.”

진관용의 눈이 깊어졌다.

“한데 넌 거기서 또다시 예상 밖의 행동을 했어. 내게 찾아왔지만, 내 거처로는 들어오지 않고 외려 날 끌어냈다. 네가 구경꾼을 달고 온 이유를 알겠더군.”

서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거기까지 생각할 머리는 없어. 다만 그 순간의 불길함을 읽어 냈을 뿐이야.”

“그렇다면 더더욱 대단하다. 네 감각이 상식을 벗어났다는 뜻이니까.”

“칭찬 고맙구먼.”

“그래서 넌 어떠냐?”

“뭘?”

“이 나를 상대로, 정면 승부를 해서 이길 자신이 있냐는 말이다.”

묵직하게 내리깔린 목소리에 뚝뚝 묻어나는 강한 자신감.

얼핏 지배자의 그것과도 같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천박했다. 하지만 그가 겪었던 경험, 그가 이룩한 경지는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진관용의 진짜 모습이었다. 천박하리만치 교만하지만 냉정하고, 자신감이 넘치지만 방심하지 않으며, 추진력은 좋지만 급하지는 않다. 상대하기 어려운 부류였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상대할 자신이 있어서 붙고, 없어서 꼬랑지 말고 했던 인생은 아니라서 말이지.”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승패는 마지막까지 아무도 모르는 거야. 다만 머리 굴릴 시간에 난 선택을 할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내게 이로운 작용을 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그래서 묻겠는데…….”

툭.

서량이 검지로 다탁 위를 때렸다.

“잡소리는 이쯤하고 결론부터 내려. 붙을 거야, 말 거야?”

“…….”

“보아하니 포기는 안 하겠군.”

진관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기는 안 한다. 그리고 난 너와 달리 이기는 싸움이 아니면 발을 들이지 않아.”

“소심하긴.”

“승병선승이후구전(勝兵先勝而後求戰)이라 하였지. 싸움이란 본디 먼저 이겨 놓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류의 싸움이지.”

진관용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패병선전이후구승(敗兵先戰而後求勝). 싸움부터 벌여 놓고 승리하고자 애쓰는 너의 방식은 내게 통하지 않아.”

서량이 피식 웃었다.

“별 잡스러운 짓거리로 요란 떠는 놈이 문자는 그럴싸하게 쓰는군.”

“미리 말해 두겠는데, 너의 유치한 도발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이기기 전까지는 붙지 않겠다?”

진관용의 미소가 짙어졌다.

“글쎄다. 다소 급한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면 너와 붙어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하다.”

드르륵.

서량이 일어났다.

“얘기는 이걸로 끝났군. 나와라.”

“그 전에.”

“또 뭐?”

진관용이 옆을 바라보았다.

쟁반을 든 도위경이 조심스레 걸어오고 있었다.

“이왕 차를 마시러 왔으니 차부터 한잔 마시고 시작해 볼까 싶군.”

“여유만만하셔, 아주.”

“급할 것도 없지 않은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주위를 짓누르는 긴장감에 목을 잔뜩 움츠린 도위경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진관용이 검지로 다탁을 두들겼다.

“뭐 하나? 내왔으면 속히 올리게.”

“아, 예!”

조심스레 차를 내려놓은 도위경이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진관용은 서슴없이 차를 마셨고, 서량은 인상을 찡그리며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왜 마시질 않나? 독이라도 탔을까 무섭나?”

“너라면 그보다 더한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딱히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야.”

“음?”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이 이상해.”

진관용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 저 계단으로 올라오는 놈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것 참 희한하군.”

끼익. 끼익.

목조 계단에 무게가 실리며 기묘한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자미루의 최상층에 한 명의 사내가 등장했다.

채여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오라버니?”

서량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진관용이 담담하게 말했다.

“둘째 왔느냐.”

비에 흠뻑 젖어 들어선 사람은 바로 관평이었다.

하지만 이전에 봤던 그 관평이 아니었다.

뚝. 뚝.

젖은 옷가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왔다. 하물며 눈빛은 그보다 백 배는 더 음산하고 음험해 보였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관평이 진관용에게로 다가갔다.

서량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느릿한 보행,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살기.

‘공격?’

스륵.

이내 서량과 채여민의 눈에 놀라움이 담겼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오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관평,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그 인사를 받는 진관용.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적어도 서량의 상식으로는 이해될 상황이 아니었다.

“셋째가 이 자리에서 후계를 정하자고 하는구나. 그간 셋째의 행보를 보아 왔을 때, 생사결을 벌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렇군요.”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관평이 서량을 바라보았다.

깊고 깊은 그 안광에 드리워진 짙은 살의가 보는 이의 기분을 섬뜩하게 했다.

“수락하시지요. 형님이 지실 일은 없을 테니.”

“역시 그런가?”

“예. 정 어렵다 싶으면 제가 도울 터이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충격에 충격을 더하는 발언이었다. 지금 관평은 진관용의 편에 서서 서량을 압박하고 있었다.

놀라움으로 물든 서량의 얼굴에 한 줄기 흥미가 일었다.

“저놈 밑으로 기어들어 갔나?”

관평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따위 얄팍한 격장지계는 통하지 않는다.”

“격장지계라? 기고 싶어서 긴 건 아니란 말이로군.”

관평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리 여유를 부릴 처지가 아닐 텐데?”

“왜지?”

“제 사람도 지키지 못한 무능한 놈에게 부릴 여유가 있다는 게 더 신기하구나.”

순간 서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진관용이 웃으며 말했다.

“벌써 잊었느냐? 승병선승이후구전, 나는 이기는 싸움만 한다.”

“…….”

“네 질문을 이제 내가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번쩍!

창가에 비치는 전광(電光)이 진관용의 미소를 새하얗게 비춰 주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후계를 정하겠느냐? 아니면 포기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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